우리는 참 농땡이였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안가고 당구장에서 살다시피해서 학사경고를 연속 2회를 먹는가하면 어딜가건 사고를 치기 일쑤였었다. 동네 건달들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못해서 퇴학을 눈앞에 둔 자식을 보는 부모님의 걱정은 건달아들 대하는 것 못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였었다. 세상이 우릴 보는 눈이 어지어울 뿐 우리는 10년 쯤 후에는 모두가 멋진 사람들이 되어 있을 거라는 미래의 행운을 점쳐보곤 했었다.
각자에겐 뭔가 관심 분야가 하나씩 있었다. 한 친구는 노동해방과 민주 등 사회운동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또 한 친구에겐 음악이 있었고 또 나에겐 컴퓨터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각자의 관심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할말도 많았고 당해낼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가 자랑스러웠고 누구 하나가 잘 풀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뿌듯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친구 자랑을 늘어놓기를 즐겨했었다.
시간을 흘러 친구들과 나는 바야흐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나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던 친구는 글을 참 잘 썼다. 시를 써서 어느 시인을 찾아가 평을 받았는데 괜찮은 이야기를 들었다며 즐거워했고, 때로는 잡지에 기고를 해서 원고가 채택되기도 했었다. 그 친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도울 것이라 하여 캐나다 유학 후 신학 대학원을 준비하게 되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는 일류 가수들의 노래를 녹음하고 편집해주는 레코딩 엔지니어가 되었다. 가수 제이, 젝스키스, 핑클 등의 노래를 녹음해 줄 때 난 그 친구가 그렇게 자랑스러웠었다. 그리고 나는 대기업 연구소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 때 까지는 우리 모두의 인생은 장미빛이었고 풍운의 꿈을 안고 세상을 바라보는 두 눈매에 두려움이란 없었다.
몇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시간이란 것은 인간의 가슴 속에 잊어야할 아픔을 치료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의 일도 한다. 신학 대학원을 준비하던 친구의 아버지께서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집에 1억 가까운 빚을 만들어 내고 결국 돌아가시게 되면서 친구는 당분간 대학원의 꿈을 접고 좌초된 배처럼 방향을 잃고 백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류 가수들의 노래를 녹음해 주던 친구는 고향에서 뭔가 사업을 해보려고 내려왔다가 아무 일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애기 분유값을 마련하는 것이 삶의 큰 고민거리가 되어 버렸다. 운 좋게도 나는 어떻게 잘 풀려 휴대폰을 만드는 국내 대기업 연구실에 채용되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친구들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언젠간 잘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시간은 또 그렇게 조금씩 흘렀다.
얼마전 나의 두 친구는 큰 결심을 했다며 나더러 당분간 자기들을 찾지마라고 했다. 알고보니 외항선을 타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그들은 떠났다. 그러나 며칠 후 그들은 계약을 어기고 도망나왔다. 원채 일을 겁내지 않는 친구들이라 도망칠 것이라 생각은 못했지만 20대 초반의 그 단단함은 어디론가 어디론가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동안 나는 한달에 3~4주씩 해외 출장을 다니며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친구들을 잘 만날 시간이 없었다. 뱃사람들에게 몰매맞을 것을 무릅쓰고 도망나온 그들을 언젠가 만났을 때는 예전의 그 멋진 모습들, 지방의 미스코리아를 상대하고 많은 미녀들 사이에서 젊음을 보내고 풍운의 꿈만이 빛나던 그 멋진 모습들을 거의 잃어버린채 약간의 궁핍함과 초췌함이 이마에 조금 양 볼에 조금씩 패여가고 있었다.
지금 그 친구들은 비록 희망을 버리진 않았지만 공사장을 다니며 생활하고 있다. 대기업 연구원인 나는 어떻게 보면 그들로부터 이탈되어 그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전에 점쳤던 그들의 장미빛 인생이 이젠 시들어가는 풀꽃처럼 보이곤 한다. 그래도 변함없이 우린 친구들이다. 그러나 내가 회사에서 겪는 고충들과 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금전적인 고민들을 그 친구들에게 털어 놓을 때, 그 친구들은 배부른 소리 하지마라는 둥, 은근히 자랑한다는 둥의 농담반 진담반의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전전긍긍하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친구들이 안쓰러워 '리어카 한대 사서 길거리 장사라도 해보라'고 권할 때면 그 친구들은 또 나를 세상물정 모르고 포시랍게 살아가는 연구원으로 치부해 왔다. 나 역시 뭐라도 성실히 해 내지않고 뭔가를 했다하면 작심삼일이고 인생의 무게를 벗어보기위해 과감한 시도를 못하는 그 친구들을 볼 때 느끼는 답답함을 이루 말로 할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이해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난 이젠 내가 가진 내 생의 고민들을 그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예전이라면 재미있게 털어놓고 함께 웃었을 법한 자신들의 농땡이 이야기들을 이젠 나에게 잘 털어놓지 않는다. 우리는 어릴 때 부터 서로의 실수와 사고친 일상을 털어놓으며 서로 박장대소하는 습성이 가지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 그 두 친구와 나는 함께 웃을만한 어떤 공통된 이야기꺼리를 잘 잡아내지 못한다. 음식을 먹으며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 아이가 잘 큰다는 이야기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잘 벗어나지 못한다. 돈벌이 이야기나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서로는 민감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답답한 그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 또한 세상물정 모르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내일은 다른 어떤 친구가 결혼하는 날이다. 그래서 내일은 몇달만에 그 두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내일은 그 두친구를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려한다. 그러면서도 서로 이격된 격차가 내 스스로 부담스러워지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서로의 경제적, 사회적 입장이야 어떠하든 우리는 평생을 친구로 지낼 것이다. 그러나 생활고에 눌려 전전긍긍하는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은 빨리 좀 벗어 던질 수 있었으면 한다. 예전처럼 허울없는 사이가 되어 할말 못할말을 가리지 않아도 서로 속내상할일 없는 그런 친구로 남고싶다. 내 친구 두놈들이 부디 꿈을 이루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친구
우리는 참 농땡이였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안가고 당구장에서 살다시피해서 학사경고를 연속 2회를 먹는가하면 어딜가건 사고를 치기 일쑤였었다. 동네 건달들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못해서 퇴학을 눈앞에 둔 자식을 보는 부모님의 걱정은 건달아들 대하는 것 못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였었다. 세상이 우릴 보는 눈이 어지어울 뿐 우리는 10년 쯤 후에는 모두가 멋진 사람들이 되어 있을 거라는 미래의 행운을 점쳐보곤 했었다.
각자에겐 뭔가 관심 분야가 하나씩 있었다. 한 친구는 노동해방과 민주 등 사회운동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또 한 친구에겐 음악이 있었고 또 나에겐 컴퓨터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각자의 관심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할말도 많았고 당해낼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가 자랑스러웠고 누구 하나가 잘 풀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뿌듯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친구 자랑을 늘어놓기를 즐겨했었다.
시간을 흘러 친구들과 나는 바야흐로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나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던 친구는 글을 참 잘 썼다. 시를 써서 어느 시인을 찾아가 평을 받았는데 괜찮은 이야기를 들었다며 즐거워했고, 때로는 잡지에 기고를 해서 원고가 채택되기도 했었다. 그 친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도울 것이라 하여 캐나다 유학 후 신학 대학원을 준비하게 되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는 일류 가수들의 노래를 녹음하고 편집해주는 레코딩 엔지니어가 되었다. 가수 제이, 젝스키스, 핑클 등의 노래를 녹음해 줄 때 난 그 친구가 그렇게 자랑스러웠었다. 그리고 나는 대기업 연구소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그 때 까지는 우리 모두의 인생은 장미빛이었고 풍운의 꿈을 안고 세상을 바라보는 두 눈매에 두려움이란 없었다.
몇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시간이란 것은 인간의 가슴 속에 잊어야할 아픔을 치료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반대의 일도 한다. 신학 대학원을 준비하던 친구의 아버지께서 갑자기 암 진단을 받고 집에 1억 가까운 빚을 만들어 내고 결국 돌아가시게 되면서 친구는 당분간 대학원의 꿈을 접고 좌초된 배처럼 방향을 잃고 백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류 가수들의 노래를 녹음해 주던 친구는 고향에서 뭔가 사업을 해보려고 내려왔다가 아무 일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애기 분유값을 마련하는 것이 삶의 큰 고민거리가 되어 버렸다. 운 좋게도 나는 어떻게 잘 풀려 휴대폰을 만드는 국내 대기업 연구실에 채용되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친구들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언젠간 잘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시간은 또 그렇게 조금씩 흘렀다.
얼마전 나의 두 친구는 큰 결심을 했다며 나더러 당분간 자기들을 찾지마라고 했다. 알고보니 외항선을 타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그들은 떠났다. 그러나 며칠 후 그들은 계약을 어기고 도망나왔다. 원채 일을 겁내지 않는 친구들이라 도망칠 것이라 생각은 못했지만 20대 초반의 그 단단함은 어디론가 어디론가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동안 나는 한달에 3~4주씩 해외 출장을 다니며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친구들을 잘 만날 시간이 없었다. 뱃사람들에게 몰매맞을 것을 무릅쓰고 도망나온 그들을 언젠가 만났을 때는 예전의 그 멋진 모습들, 지방의 미스코리아를 상대하고 많은 미녀들 사이에서 젊음을 보내고 풍운의 꿈만이 빛나던 그 멋진 모습들을 거의 잃어버린채 약간의 궁핍함과 초췌함이 이마에 조금 양 볼에 조금씩 패여가고 있었다.
지금 그 친구들은 비록 희망을 버리진 않았지만 공사장을 다니며 생활하고 있다. 대기업 연구원인 나는 어떻게 보면 그들로부터 이탈되어 그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전에 점쳤던 그들의 장미빛 인생이 이젠 시들어가는 풀꽃처럼 보이곤 한다. 그래도 변함없이 우린 친구들이다. 그러나 내가 회사에서 겪는 고충들과 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금전적인 고민들을 그 친구들에게 털어 놓을 때, 그 친구들은 배부른 소리 하지마라는 둥, 은근히 자랑한다는 둥의 농담반 진담반의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전전긍긍하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친구들이 안쓰러워 '리어카 한대 사서 길거리 장사라도 해보라'고 권할 때면 그 친구들은 또 나를 세상물정 모르고 포시랍게 살아가는 연구원으로 치부해 왔다. 나 역시 뭐라도 성실히 해 내지않고 뭔가를 했다하면 작심삼일이고 인생의 무게를 벗어보기위해 과감한 시도를 못하는 그 친구들을 볼 때 느끼는 답답함을 이루 말로 할수 없다. 이렇게 우리의 이해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난 이젠 내가 가진 내 생의 고민들을 그 친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들 또한 예전이라면 재미있게 털어놓고 함께 웃었을 법한 자신들의 농땡이 이야기들을 이젠 나에게 잘 털어놓지 않는다. 우리는 어릴 때 부터 서로의 실수와 사고친 일상을 털어놓으며 서로 박장대소하는 습성이 가지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 그 두 친구와 나는 함께 웃을만한 어떤 공통된 이야기꺼리를 잘 잡아내지 못한다. 음식을 먹으며 음식이 맛있다는 이야기, 아이가 잘 큰다는 이야기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잘 벗어나지 못한다. 돈벌이 이야기나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서로는 민감해 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답답한 그들을 이해할 수 없고, 그들 또한 세상물정 모르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내일은 다른 어떤 친구가 결혼하는 날이다. 그래서 내일은 몇달만에 그 두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내일은 그 두친구를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려한다. 그러면서도 서로 이격된 격차가 내 스스로 부담스러워지는 것은 또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서로의 경제적, 사회적 입장이야 어떠하든 우리는 평생을 친구로 지낼 것이다. 그러나 생활고에 눌려 전전긍긍하는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은 빨리 좀 벗어 던질 수 있었으면 한다. 예전처럼 허울없는 사이가 되어 할말 못할말을 가리지 않아도 서로 속내상할일 없는 그런 친구로 남고싶다. 내 친구 두놈들이 부디 꿈을 이루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