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인물 하나 보내다 - 최고의 배우 '박광정'

김종영2008.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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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한 판 잘 벌이고 간다...' 그런 느낌이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10년도 전에 "진짜 사나이"란 영화에서 "파랑"이란 이름으로 그를 만났다.

영화 "진짜 사나이"는 개봉 후 줄곧 혹평과 뭇매를 맞았는데, 나는 정말이지 그 영화가 좋았다. 주인공이었던 '강철처럼 단단하고 화산보다 더 뜨거운 - 권해효'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한국판 수퍼히어로의 신선한 느낌이었고, 영웅이 사랑한 여인 '서미경'은 영웅의 연인에 딱 맞는 절묘한 백치미와 색시함이 흐르는 환상적인 조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은 멍청하면서도 잔인하고 집요한 '망치 - 김학철'은  주인공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끈질긴 악당의 전형이다. 

그리고, 왜 이 대립구도 끼어 들어서 '쟤들은 왜 저래?' 하고 의문을 던지게 하는 이 들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빨!노!파!"

 

박헌수감독은 이 전, <결혼 이야기>의 시나리오 작가로 청룡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 <그여자 그남자>의 시나리오로 일약 흥행 작가로 인정받았다. 단 두 편의 시나리오로 조감독 경력 없이 <구미호>로 감독 데뷔, 두번째 영화로 <진짜 사나이>를 연출했다.  이후 공백기를 거쳐 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주노명 베이커리>를 연출했다.

 

이 영화를 보면 주인공과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잘나고 중심인듯 착각하며'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네 군상이며, 망치일당은 그러한 우리네가 만들어 낸 '나 이외의 타인을 경계하는' 마음속의 적들이며, '빨,노,파' 는 우리가 살면서, 이렇게 치열하게 멋있게 살아가는 나를 보이기 위해 또 필요로하는 주변인이자 관객들인 것이다. 이 영화를 아무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주인공에 몰입하여 희노애락을 절묘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다, 관조적인 자세로 바뀌며, 영화의 엔딩을 서글프게 바라보게 되는데, 그 허탈한 심정을 한방에 날려주는 이가 바로 "파랑! - 박광정" 이다.

 

나는 이 영화를 여러번 보았는데, 처음에는 '이게 무슨 영화지?' 싶어서 다시 한 번 보았고, 두번 째는 '서미경 진짜 이쁘다...'싶어서 보게 되었고, 그 이후 부터는 '빨,노,파 너무 매력적인 것 아냐?' 하면서 보게 되었다.

자꾸 보다보니, 거의 중독 현상마저 이르게 되었는데, "파랑"은 정말 예술이었다.

그것이 소위 한국판 우디알렌이라고 불리우는 '헐리웃배우 우디박'과의 처음 만남 이었다.

 

다음으로 그를 접하게 된 영화는, '김민종, 허준호, 권용운, 독고영재'등과 함께 출연했던, "마지막방위"였다.

 

이 영화 또한 하여튼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되는 영화였고, 혹평과 비판이 쏟아진 영화 였는데, 나는 친구들과 개봉관에서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지금 생각해서 웃음부터 나오는 내용이었고, 참 배쨌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내게 주는 의미는 따로 있다. 이 영화가 97년도 영화니까, 10년도 더 지난 셈인데, 그 동안 수없이 국내외 영화를 보아왔지만, 이 영화에서 박광정이 피웠던 담배만큼 맛있게 피우는 걸 연기해 낸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까지의 세계 영화사를 통틀더라도 '석양의 무법자'에서 연신 시거를 어금니로 씹어대던 '클린트이스트우드'만이 유일무이한 적수라고 생각이 들 정도니, 그 장면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고, '박광정 = 최고의 연기자'라는 각인을 심어준 것이었다. 그 후로 그는, 겉멋이 들어있는 '쇼'가 아닌, 그렇게 해 본 사람만이 아는 절묘하고 섬세한 묘사가 녹아있는 마치 눈앞에서 일어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그런 연기들을 마구마구 쏟아내었다.

그의 연기의 절정은 영화 '넘버3'에서 폭발하는 데, 바로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 역대 '10대 명품 케릭터'안에 당당히 들어갈 '랭보'의 탄생이다. 나에겐 그가 연기하는 랭보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 후로도 그는 드라마와 영화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다작출연으로 인하여, 의미없는 이런저런 단역을 통해 '권해효'가 그랬듯이, '박광정'도 누구나 걸었던 식상의 길을 접어드나 싶을때쯤, 그를 알게 된지 만으로 꼭 10년만에, 나는 한 영화를 보게 된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대한민국 명품 케릭터의 탄생이자, 그가 주연한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로 기억될 영화이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불륜을 소재로 했지만 흔한 작품은 아니다. 영화의 초점은 '불륜에 빠진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추적하며 질투하는 남자의 심리에 맞춰져 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박광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92년 영화 '명자 아끼꼬 소냐'로 데뷔한 이후 15년...

 그는 이제 비로소 주연을 맡아 나약한 도시 소시민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구축하고 있다.
박광정이 맡은 태한이라는 역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국영화에서 벌써 출현했어야 할 캐릭터다. 태한은 아내의 애인을 만나서 주먹 한 방 날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를 함정에 빠뜨려 살해하는 것도 아니다. 밉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특히 중식을 자신의 집인 강원도 낙산까지 유인한 뒤 그가 아내와 정사를 벌이는 현장을 급습하려는 태한의 계획은 전봇대에 올라 떨면서 자신의 안방을 지켜보는 것에 그친다. 박광정은 우리들 누구나 가슴속에 갖고 있는 소심함을 극대화해 소시민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해외 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본 많은 사람들이 박광정을 '우디 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뉴요커들의 일상을 그린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우디 앨런 감독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한국계 입양아 순이와 결혼한 우디 앨런도 자신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며 나약하면서 때로는 얄미운 소시민의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했다.그의 좌우명은 '가늘고 길게'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몸은 무척 가늘다. 방송할 때는 한여름에도 팔목이 드러나는 옷을 입지 않으려 했다. 그런 그가 이번 영화에서는 알몸 신(scene)을 무려 세 번이나 찍었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단순한 노출이 위한 장면이 아니라, 보는이로 하여금, 현대 소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 기능을 갖고 있다.

짧은 시간에 참 많이도 판때기를 벌였다. 어디 벌였다뿐이랴, 굿판에 떡이나 먹으러 온 인간들 까지 끌여들였으니, 진기가 다 고갈 될 만도 하지... 이제 편히 좀 쉬러 갔나보다.

좌우명 대로 "가늘고 길게" 살지 못한 채...

저녁에 조용히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나 한 번 더 봐야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