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의 문제

유형원2008.12.17
조회105
동양철학의 문제

 

 

1.

 

  우리는 ‘동양철학’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실재(實在)가 ‘동양철학’이라고 명명되는가? 그것은 철학의 문제 이전에 ‘동양’이라는 인문지리적 환경 자체가 가진 단위설정의 문제로부터 고민해야 한다. ‘동양’은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환상이며, 서양에 의해 무화(無化: neantisation)된 나머지 개념에 불과하다. 동양과 서양의 일대일 대응은 불공평하며,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시아와 유럽의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유럽과 아시아는 자연스럽게 유적 공통성을 지닌 하나의 종차로서 파악되지만, 기실 490만 평방킬로미터의 유럽과 그 열배에 달하는 아시아가 동일한 범주적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 아시아는 유럽적 의미의 개체에 비교하면 한 단계 상위개념이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이미 잘못된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특정한 지적 전통과 역사를 지칭하는 용어의 자격을 획득한 ‘동양철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가진 기형적 태생의 한계가 어떻게 극복되어 우리 삶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살아있는 철학’으로 치환될 수 있는가? 사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시점에서 이미 현대의 동양철학은 진지한 의미에서 ‘철학적 작업 자체를 수행하고 있는 철학’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현대의 동양철학은 많은 부분에서 사실상 문헌학에 더 가까우며, 그것은 동양철학을 본격적으로 전개시킬 도구, 혹은 언어에 해당하는 ‘철학적 개념’들이 대개의 경우 제대로 정리되어있지 않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오래 사용된 개념들이 가진 중의성 위에, 서양철학으로부터 유입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개념들의 처리 문제가 덧씌워지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제 ‘동양철학자’들은 예전과는 달리 자신들의 작업을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혹은 여타의 서양 철학적 범주 중 하나에 위치시켜야 하리라는 부담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을 잘못으로 파악하고 근본적으로 극복하려 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최소한 ‘서양철학으로부터 이해받고 그들과 소통해야한다’는 부담이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서양철학은 내적인 담론구조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만, 동양철학은 부득이 외부로부터 그것을 빌려와야 한다. 그것이 현대 동양철학이 가진 필연적 한계이다. 

 


   따라서 동양철학은 ‘정의(定議)’될 수 없다. 애당초 철학은 개념을 ‘정의’의 방법을 통해 다루는 학(學)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에 더하여 정의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기에는 동양철학 자신이 서양철학에 비해 선결과제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심지어 동양철학자들 자신도 ‘동양철학’을 하나의 내적 동일성을 가진 원자적 개체로 상정하고, 그것이 가진 가상적 ‘공통속성’을 동양철학의 전체에 부여한 뒤 서양철학의 특정 사조와 비교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동양철학은 분석철학일 수 없고, 유교철학은 생철학과 유사하며, 불교철학은 아시아의 실존주의에 해당한다는 식의 명제가 거기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단언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동양철학’이라는 이름 하에 묶인 키메라적 혼합물의 사태 자체로부터 기인하며, 우리가 지칭하는 동양철학이 앞에서 말해왔던 의미에서의 '부조리한' 실재를 의미하는 한에서는 앞으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2.

 

   우리는 현대사회의 구성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종교집단, 정치집단, 이익집단 등이 복선적으로 의미연관을 맺고 있는 복잡성의 장(場)이며, 때로는 중간적 성격의 집단이 등장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집단이 절묘하게 결합하기도 한다. 단일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내에는 역사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 가톨릭, 정교회, 단성론 등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며 각각의 하위분파 역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외부시각에 의해 정치적 급진노선으로 단색화 되기 쉬운 정치집단, 예를 들어 한국사회의 민주노동당 같은 정치집단도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NL과 PD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대결과 긴장이 존재하며 사실상 그것이 신당 창당의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창당 이전의 민주노동당은 상충하는 이념적 노선의 동거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회집단이 어떤 해상도에 따라 그것을 관찰하느냐에 따라 무한대의 복잡성을 보이며 서로 어우러져있다. 이것은 비단 현대사회만의 현상이 아니며, 모든 인간의 생활방식 및 사유양식의 기본적 속성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유독 동양철학에 대해서만큼은 그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안팎에서 모두 그것을 하나의 색깔로 칠하고 싶어 한다. 자기완결성을 지닌 철학 체계가 한 사회에 하나만 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모든 인간적 현실이 대결과 갈등 자체이거나 혹은 거기에 기반 하는 것이라면, 시간의 어느 단면 속에서 동양철학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화해할 수 없는 대결과 논쟁의 국면이 발견될 것이다. 그 대결과 논쟁을 거세하고 하나의 이념을 표준화하여 일괄적으로 적용시키려는 노력이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표면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의 사유방식을 단일화하는 일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이상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자학 일색의 사회라고 부르는 조선사회에 주자학만 있었을 리는 만무하며, 개별적 사례를 넘어서 하나의 이념이 사회적 표준으로 공인받은 모든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3.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동양철학자들은 위의 문제의식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관한 서술에서, 유술선(劉述先)은 동양철학자들이 동양철학을 다루는 일반적인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술선은 현대가 자신을 ‘전통의 극복결과’로 간주하는 자기이해 방식이 도덕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기본적으로 오류이며, 도덕의 문제를 교육에 의해 계발된 인간의 내적 자각에 즉(卽)하여 판단, 해결하려는 유학(儒學)의 견해가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한다. 또한 그것이 콜버그(L. Kbolberg)의 발달심리학적 구상과 갖는 공통인자에 주목하여 서양의 지적전통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그와 동시에 서양의 도덕적 정초기반인 자연법이나 박애에 비해 유학의 인(仁)은 내재적 가치라는 점을 언급하며 양자 사이의 차별성을 선언한다. 또한 유술선은 이처럼 내적 자각에 근거해 도덕을 보편적으로 정초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대적 다양성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학의 이일분수(理一分殊) 개념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유술선의 발상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위의 논의들에 의해 이미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술선은 현대사회의 당면과제에 유학(儒學)을 처방하여 동양철학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나, 이것은 오히려 빈사상태의 유학을 난도질하여 그 잔해물을 서양철학의 담론구조 속에서 하나의 질료 정도로 유용하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위의 유술선의 견해에 따르면 유학적 사고방식은 도덕의 정초기반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내면세계에 즉하여 설명하려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모조리 콜버그의 발달심리학적 구상 속으로 용해될 수 있다. 또한 기실 도덕의 출처를 인간의 내적 의식에서 찾는 것조차 동양철학의 특이점이라기보다는 모든 철학의 전통적 발상에 가깝다. 사실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 가진 독창성 혹은 가치는 그것이 주장하는 내용이나 제기하는 질문 자체로부터 기인한다기보다는, 기존의 철학이 다루어왔던 문제를 어떤 방식을 통해 새로이 공식화하고 각각의 개념들을 네트워킹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보는 쪽이 더 옳다. 현대철학이라고 해서 고대철학과 완전히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으며, 그 기본구상 면에서는 오히려 대부분이 일치하고 있는 점을 통해 위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술선의 경우, 그의 서술 어디에서도 유학이 가진 주장의 제기방식, 담론구조의 독특성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이미 유술선은 동양철학의 가치를 선전한 것이 아니라 동양철학을 서양철학의 제물이자 박물관의 유물로 철학사에 바친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콜버그의 발달심리학적 구상에 대한 대응 항으로서 유학을 단일화시켰다는 점이다. 이일분수(理一分殊)는 유학 전체의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주자학자들의 주장이고, 기(철)학이나 양명학의 옹호자들은 ‘이일분수’적 발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주제적으로 그것을 탐구하거나 주장하거나 옹호하지는 않는다. 특히 기(철)학의 경우, 결코 정확한 일치를 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실 내용으로 보았을 때 주자학 같은 본질형이상학적 철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유물론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유술선의 주장은 서양철학과의 소통 문제 이전에 이미 유학 내부에서 합의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사태가 그렇다면 유술선이 콜버그의 발달심리학에 대한 대응 항으로 채택한 동양의 지적 전통은 보다 작은 갈래에서 선택되었어야만 했다. 이것은 철학적 거대담론을 일개 분파(sect)에 맞대응시킨 치명적 실수이다.

 

(* 물론 유물론적 의미에서의 ‘물질’은 근대 경험 과학적 물리학의 의미에서의 물질이며, 따라서 유물론이 물질을 취급하는 태도는 기철학이 기(氣)를 다루는 태도와 결코 같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양자 모두 플라톤적 의미의 이데아, 절대적 형이상자(形而上者)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자학과는 근본적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점만큼은 유물론과 기(철)학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을 것이다. )

 

 

4.   

 

   그러면 어떻게 동양철학을 해야 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 ‘동양철학 함’은 이미 그 표현 속에 ‘서양철학 함’이라는 서술을 내포하고 있다. 즉 어떻게 동양철학을 전개시킬 것이며, 그것이 서양 철학적 담론구조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하는 사태를 막을 것인가? 

 


   사실 이 문제의 제기 자체가 수사적 차원을 넘어서 본격적 의미에서의 동양철학적 문제이기 때문에 완전히 반박 불가능한 해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 나서 동양철학의 제 문제들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 자체가 다른 문제들과 병행해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의의 차원을 최저화 하여 말하자면, 일단 동양철학이 가진 특수성, 동양철학의 전체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서양 현대철학과 만나고 싶은 철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 논의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사이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철학자와 철학자 사이’에 대한 탐구에서 진행하여야 한다. 즉 논의 자체가 미시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양철학자들에게는 다양한 서양철학의 철학적 논의가 전개되는 담론구조 자체가 결여하고 있는 맹점을 제기하고 싶은 욕망, 즉 동양철학의 전체성 차원에서 학적 탐구를 전개하고 싶은 욕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결코 의식의 장이나 논의의 장의 어느 특정 위치에서 자신의 전체적 국면을 평면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양철학의 담론구조 자체로부터 벗어나있는 동양철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는 애초에 포기되어야 하며, 그 목표의 실현이 가능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유지한다고 해서 동양철학이 보존되고, 유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의 식민지로 추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입장에서는 서양철학과 더불어 서양철학의 언어구조 속에서 논의하는 것은 동양철학 자체의 차별성을 근원적으로 탈각시켜버리며, 따라서 동양철학적 논의의 장을 수호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동양철학의 내부적 논의를 완전히 취소하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서양철학에 대(對)한 학적 연구가 전개될 때에 있어서는 동양철학을 부당하게 ‘단일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한편에서는 동양철학이 각 개념의 세목을 규정하지 않고 비 규정적, 선술어적 상태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지니기 때문에 동양철학의 전체성 희생과 독창성 보존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도 있다. 즉 동양철학의 속성 자체가 서술적 언어태도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동양철학의 문제는 철학의 문제이기보다는 문학의 문제로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철학에 대한 최소한의 규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서술적인 학문이다. 개념의 세목을 정하지 않는데서 동양철학의 매력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문학적 관심이지 철학적 관심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양 철학적 의미에서의 ‘언어의 정밀성’이 철학의 유일하게 타당한 판단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동양철학은 단지 열등한 철학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철학의 문제제기를 20세기 철학이 더 정교한 형태로 재현한다고 해서, 혹은 플라톤 철학의 근본적 난점이 현대철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서양 고대철학의 사망으로 진단하는 사람이 서양에 있는가? 반면 동양철학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수정조차 파괴나 멸망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디에서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패배의식의 소산이며, 동양철학을 지나치게 명사(名詞)적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불과한 것이다. 동양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철학자이지 문헌학자가 아니며, 따라서 진정한 학자라면 동양철학이 가진 교조성으로부터 벗어나서 ‘동양철학이 정말로 철학적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차라리 폐기되어도 좋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에 덧붙여서, 마치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에 비해 비의적(秘義的)인 학문영역인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선입견 때문에 동양철학의 도(道)나 인(仁)같은 개념은 분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동양철학에 대한 오해에 불과하다. 동양철학에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일견 추상적이고 비의적인 것은 그 개념들이 다루고 있는 세계의 사태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만약 세계의 언표 불가능한 사태영역을 직시 하고도 모든 것을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언어로 표현하려는 철학이 있다면, 차라리 그 철학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비의적’이라는 수식을 받아 마땅하다. 반면 실제로 모호한 사태를 ‘그에 대응하는 개념’을 창안해서라도 언어로서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철학이 있다면, 오히려 그 쪽이야 말로 가장 서술적인 철학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모호성을 직시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로 창안한 개념들이 역시 모호하다고 해서 그 모호성이 계속 유지될 필요는 없다. 그것의 계속적 개조와 엄밀성의 추구는 그 자체로 철학의 발전이며, 필요한 일이다. 또한 예전에 세목이 규정되지 않은 채 사용되었던 동양철학의 개념들은 이미 흘러간 시간 속에서 즉자화(卽者化)된 채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따라서 차후에 우리가 전개시킬 철학적 작업이 어떤 양상을 띠건 간에 고전(古典) 속의 개념들은 여전히 그 생생함을 간직할 것이다. 따라서 동양철학의 개념정리나 세목규정이 동양철학의 정체성을 빼앗을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

 


5.

 

   이상의 논의를 통해 동양철학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 및 기형적 상황이 앞으로 어떤 노력을 통해 개선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학문의 영역에서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바로 ‘손에 쥔 것을 과감하게 놓는 자세야 말로 모든 소유를 갱신시키는 가장 정직한 씨앗’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