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존재와 무』에서의 무화작용, 무

유형원200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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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존재와 무』에서의 무화작용, 무

1. 

    이 글에서는 사르트르의 전기 저서 『존재와 무』에 나타난 무화작용(neantisation)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와의 관계 속에서 무(neant)의 개념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사르트르 실존주의의 전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이것을 자유의 개념과도 연관 지어야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능력과 여건을 벗어나므로 자유의 개념은 무화작용 및 무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한에서만 부분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글에 오해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한 한 최대한 정확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를 위해 구체적으로는 주변개념과의 연관, 유사개념-사르트르 자신의 것 또는 다른 학자의 것-과의 비교, 구체적 사실에의 적용, 가능한 사례에의 적용 등의 방법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무화작용이나 무를 정의(定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흔히 하나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 개념을 정의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쓰이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정의의 방식을 통해 해명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렇지 않은 영역이 있다. 대부분의 철학적 개념은, 그것이 그 자체로 다양한 층위에서 주변과의 의미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를 통해 해명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무화작용과 무가 그에 해당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개념들이 의식 내에서 정해진 주소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백일하에 자신의 전체성을 드러낸다고 믿는 것은 단지 범주적 사유의 착각에 불과하다. 무와 무화작용은 입체적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 입체성을 얼마만큼 포착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글에서 시도 하는 것도 바로 그 입체성의 포착이다.



2. 


     다음의 피에르 찾는 이야기는 무화작용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시해준다.


내가 피에르를 찾기 위해 이 까페에 들어섰을 때, 까페의 모든 물체들은, 그 앞에 피에르가 나타나야만 될 배경으로 종합 구성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모든 형상들의 첫 번째 무화라고 부른다. 즉 무화작용이란 일차적으로 대상을 정립적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으로서’ 응시하는 것이다. 즉 거기에 대해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내 의식의 화면에 띄우는 것이다.  의식이 직접적으로 문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의식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의식에 제기된 것,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의식이 직접 문제시하고자 하는(관심을 가진) 형상이 드러나는 바탕이 되는 것. 그것이 ‘배경’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내가 지금 사전에서 apple이라는 단어를 찾으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a-항으로 바로 넘어간 다음, ap-항을 찾기 위해  책을 펼쳤는데 ao-항이 나왔다면 책장을 더 넘겨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Aonia, aoristic 등의 단어와 마주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내가 apple을 찾기 위해서는 이것로부터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는 점에 있어서만 유의미하다. 즉 그것들은 apple로부터 독립적인 상태로는 전혀 내 의식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Aonia는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있어서 ‘Aonia’가 아니라 ‘apple이 아닌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되었을 시점에 Aonia는 내가 정확히 철자를 확인해보지 않은 주변의 무수한 단어들 속으로 다시 내동댕이쳐진다. 바로 그것을 무화작용이라고 한다. 즉 ‘배경’이 되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앞서 말한 대로 이 모든 것이 ‘내게 있어서’ 그렇다는 점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때 그 상황의 내게 있어서’ 그렇다는 점이다. 아틀라스를 살펴보다가 그리스 지명 Aonia가 궁금해져서 사전을 찾은 사람에게 있어서라면 Anoia는 의식이 정립적으로 응시하는 주 형상이지, 결코 배경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되어서 사전을 찾는다 해도 위 서술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배경’과 ‘정립적 대상’, 즉 형상과의 구분은 결코 정적(靜的)일 수 없으며,  그것은 의식의 관심에 따라 얼마든지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직전까지 노에마였던 것을 무화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기존까지 무화되어서 배경에 처박혀 있던 어떤 감각소여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의식의 대상으로 떠올려서 의식 자신과 마주보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면 ‘배경의식’이라는 의식의 한 형태에 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상학-사르트르 자신이 실존주의의 학문적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의 기본이념은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고, 의식의 화면에 나타난 모든 것은 의식과 대상 사이의 지향적 관계에 의해 수립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곧 세계, 혹은 그 세계에 속한 대상에 대한 의식의 ‘관심’이라는 것. 그러므로 의식이 문제시하지 않는 것으로서의 배경이란 애당초 형용모순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의식에 떠오를 수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실제로 지향성 개념에 관해서도 많은 해명이 필요하다. ‘지향성(Intentionality)’은 브렌타노에 의해 사용되다가 후설에 의해 본격적인 현상학의 근본개념으로 사용되게 되었는데, 그 개념은 사용하는 학자들마다, 그리고 각 학자의 연구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향성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고, 다만 사례를 통해 보기로 한다.

     의식의 존재규정을 지향성으로 두고 의식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면 자칫 ‘관심 없는 대상을 가진 의식’이라는 식의 형용모순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의식의 상태, 혹은 양상을 얼마든지 상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너무나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머지 옆에서 친구가 하는 말을 전혀 듣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할 때, 그 사람의 귀는 분명히 친구의 말소리에 의한 고막의 울림을 겪었을 것이고 따라서 청각정보도 뇌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에게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는 전혀 당사자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그는 자신이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자각하지 못한다. 만약 다시 그가 그 소리의 존재, 그리고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의 의식을 함께 자각하게 되고자 한다면 관심의 방향이 바뀌어야 하며, 예를 들자면 친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진다거나 하는 변화가 그러한 관심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의식의 시선’을 돌려 여태까지 응시하지 않던 의식에의 소여를 의식이 직접 응시함에 따라 의식과 세계의 지향적 관계는 새롭게 재편된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무화작용이란, 이렇게 의식과 세계의 지향적 관계가 재편되는, 혹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존에 의식에 문제시되었거나 혹은 새로이 의식의 화면에 떠오른 세계의 어떤 대상, 혹은 대상들이 더 이상 관심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친구의 말에 다시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가 골똘히 하고 있던 ‘생각’은 그 순간 무화된 것이다.



3. 


     위 글은 의식의 무화작용에 대한 서술이다. 그러나 무화작용 전체에 대한 서술은 아니다. 의식은 세계의 다양한 측면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으며, 또한 세계에 대면해있는 ‘의식 자신’과도 관계를  수립한다. 위의 ‘피에르 찾기’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 무화작용은 외적지각을 통한 의식 활동의 무화작용이라는 극히 작은 부분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 의식 활동의 전반을 총체적으로 문제 삼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화작용의 여러 국면을 보다 다양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적어도 의식이 의식 자신을 문제 삼는 경우에 있어서의 무화작용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무화작용은 의식의 작용이다. 즉 그것은 심리현상이며, 물리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무화작용은 즉자(卽自)의 작용일 수 없고 대자(對自)의 작용이다. 또한 그것은 대자, 즉 ‘인간적 현실’ 혹은 실존의 ‘존재규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작용으로서, 무화작용 없는 의식이란 생각할 수 없고 의식은 오로지 ‘무화작용을 하기 때문에만’ 의식이다. 따라서 무화작용을 아는 것은 결코 실존을 아는 것과 동떨어질 수 없으며, 둘은 사실상 동의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존은 ‘인간’이라는 실재가 그 존재규정 상 ‘의식임’을 말해주는 이름인데, 바로 그 의식의 본질이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지향성으로서의 의식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지향성은 의식과 세계 사이의 지향성이며, 그 지향적 구조가 바로 무화작용임을 사르트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화작용의 이해를 위한 시도는 곧바로 무화작용 하는 ‘의식’에 대한 이해를 향하여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글에서 주제화되는 의식 자신의 문제, 즉 ‘의식이 그 자신을 문제 삼는’ 문제는 무화작용과 관련해 어떤 특징을 지니는가? 말 그대로 의식은 자기 자신을 무화한다. 그것은 의식체의 의식 활동이, 즉 주어로서의 의식이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다는 사실, 즉 스스로를 목적어로 취급하는 재귀적 작용을 한다는 점으로 다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반성적 의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성하는 자아와 반성되는 자아는 이미 그 의식작용의 구조 속에서 일차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그간의 간극이 생긴다. 마치 피에르를 찾기 위해 ‘까페’라는 눈앞의 현전을 ‘배경’으로 무화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자신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잘못된 행동을 하고 나서 “아, 내가 왜 그랬지”라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무화된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어떠한 장래희망, 작고 큰 바람이나 욕구도 모두 지금과는 다른 어떤 상태-지금은 결여하고 있는 무언가를 획득하고 있거나, 그 반대이거나-에로 의식이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화작용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큰 의미’에서의 바람, 소망, 장래희망, 거시적 계획이나 목표, 도덕적 의미에서의 반성만이 무화작용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식의 관리, 혹은 응시 하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무화작용이다. 동일한 시간류 속의 한 지점에서 ‘서로 다른 상태’인 것으로 의식에 비추어진 자신의 대응 쌍은 ‘모두’ 무화작용이다. 즉 시간을 가진 존재에게 있어서는 그의 존재자체가 무화작용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오로지 ‘의식’만이 무화작용의 담지자이며 그 무화작용은 바로 의식의 내부에서 자신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간극은, 즉 자신과 자신 사이의 간극은 다분히 문법적 의미에서의 간극일 뿐 실제로는 모든 자아는 하나의 체험류 속에 통일된 존재로 나타난다. 즉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나’라는 식의 반복을 아무리 계속해도 각각의 나는 서로 독립적인 개별자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 속에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간극은 자아의 내부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때 무화작용에 의해 ‘취소’된 대상과 의식 사이의 간격을 사르트르는 ‘무(neant)’라고 부른다. 바로 이점 때문에 의식은 그 자체로 무를 지닌 존재, 즉 무-존재가 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있는 것으로서 아니 있고, 아니 있는 것으로서 있는바 바로 그것’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거의 불립문자적 표현에 가까운 이 말의 뜻이 여기 있는 것이다.

     단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앞서서 “무화작용의 결과로 만들어진 의식과 무화된 대상간의 간극이 바로 무(neant)”라고 말했던 데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neant)의 의미는 '존재'의 반대말이 아니다. 즉 그것은 절대적 공허, 아무것도 없음의 무가 아니다. 만약 무가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무-존재라는 말은 정말로 자가당착적 표현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무는 ‘없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존재가 아님’이 아니라 ‘없음이라는 존재’를 표현한다고 해야 더 정확한 말이 된다. 이것을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사르트르에게서 문제시되는 무(neant)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즉자존재를 지금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대자존재와 비교하며 살펴보자.

     즉자존재는 의식이 아니다. 책상 위의 연필, 공책, 사전 등은 모두 즉자존재이다. 그것은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지향성이 아니다. 사전과 나는 지향적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사전과 사전은 지향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즉 그것은 의식처럼 세계에 대면해있지 않고 이 세계와 아무런 관련도 맺고 있지 않다. 물론 이 때의 ‘관계’란 물리(학)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지갑은 그 스스로, 그 자체로 ‘지갑’일 뿐이며, ‘돈’과 교섭하지 않는다. 오로지 지갑 및 돈과 지향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의식’인 나에 의해서만 양자가 지향적으로 관계 맺어진다.  즉 지갑은 자기 충족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즉자존재를 ‘존재로 충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무(neant)가 없다. 적어도 그 자체적으로는 그렇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이 아닌 즉자존재는 무화작용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대자존재는 다르다. 대자존재는 의식이며, 실존이다. 그것은 그것의 본질 상 세계를 필요로 한다. 비유하자면, 가위에는 양 날이 있는데 만약 그 둘을 떨어트려 놓으면 그 어느 쪽도 ‘가위 날’이 아닌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의식이자 실존인 대자존재는 즉자존재처럼 자기 완결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결핍이고, 존재의 부족이며, 그것을 사르트르는 무(neant)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실재를 ‘대자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존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적 응시’라는 요소가 필연적으로 첨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과의 마주 함의 관계에서 무가 나온다. 즉 무가 존재 안에 있다. 이것이 무화작용, 무, 무-존재라는 사르트르 철학의 기본적인 구도이다.


4.


     이것이 왜 중요한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대자존재는 그것이 대자존재인 한에서 결핍이며, 따라서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힘을 얻어 일어난다. 즉 변화는 의식의 자발적 선택에 따라 일어나며, 그것은 의식이 의식인 한은 늘 그렇다. 즉 의식이 의식으로서 무화작용을 하며 무를 자기 안에서, 밖에서 양산하는 한은 계속 그렇다. 즉 무엇인가가 인간인 이상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발적 선택에 의해 의식 자신과 그에 대면한 세계를 변화시키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이 자유에 따라 인간만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며, 또 유의미성의 총체성으로서의 세계를 ‘구성’한다. 이 점이 세계 내에서 인간에게 독특한 지위를 부여한다. 이 점에서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생철학이나 구조주의 같은 다른 철학과 내용 상 결별하며, 따라서 사르트르의 오리지날리티가 여기에서 보장된다. 그 때문에 무화작용, 무, 무-존재,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인간의 ‘자유’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이고도 기본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J. P. Sartre Being and Nothingness  translated by Hazel E. Barnes, METHUEN & CO LTD, 1957(영역본)

Robert Bernasconi How to Read Sartre, NORTON, 2006


박정자 著,『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영신문화사, 1991

변광배 著, 『존재와 무-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살림, 2005

이남인 著,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