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성탄절, 까만 제헌절

김성호200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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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신은 롯데 자이언츠가 팀의 레전드인 최동원 대신 선동렬의 배번을 영구결번 시키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가. 국보급 투수로서 선동렬이 해당 스포츠 전반에 끼친 막대한 긍정적 영향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의 소속팀이 아니었던 롯데 자이언츠에서 고유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에 우선하여 그에게 예우를 갖추는 장면은 그야말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합리적인 사고능력을 갖춘 야구팬, 특히 롯데팬들로서는 상상하기 싫은 일이겠지만, 어디까지나 글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롯데 자이언츠가 선동렬의 배번인 18번을 영구결번 시켰다고 가정해보자. 수 십년 간 해마다 롯데의 팬들이 모여 선동렬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고 그의 현역시절 활약과 야구사적 의미를 되새겨 왔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물론 해태와 롯데를 제외한 다른 팀들은 그를 따로 기념하지 않지만 롯데 팬들은 수 십년 동안 선동렬을 기념해 왔다. 그리고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이제는 명실공히 선동렬을 기념하는 행사가 롯데와 해태를 동시에 좋아하는 소수 팬들의 참여를 넘어 롯데팬 전반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를 창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보자. 자, 그렇다면 이 행사는 과연 바람직한가.

 

확신할 수 없다면, 이쯤에서 새로운 변수를 투입해 보자. 구단의 수뇌부들로부터 롯데가 기념하는 레전드의 수와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이 너무 많다는 이유를 들어 기념행사를 축소하라는 압박을 한 것이다. 수뇌부의 이같은 결정에 따라 롯데구단은 임의로 행사가 창출하는 이윤이 적은 최동원의 기념행사를 폐지하였다.

 

이러한 구단의 조처에 일부 롯데팬들은 롯데에서 활약한 최동원을 기념하지 않고 팀에서 단 1년도 뛴 적이 없는 선동렬을 기념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선동렬의 기념행사는 그의 소속팀인 해태에 의해서 치루어져야 마땅하며 구단차원을 넘어 기념하고자 한다면 롯데가 아닌 협회차원에서 기념행사를 치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다른 팬들은 선동렬은 분명 해태 타이거즈의 영웅을 넘어 한국 프로야구 전체의 영웅인 대선수였고 그를 기념하는 행사를 즐기는 롯데팬들이 이미 상당히 많은데다 기념행사를 통해 롯데와 해태의 우정이 깊어졌는데 지금에 와서 이 행사를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롯데가 구단차원에서 해태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이 행사의 호응이 커져서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기념행사를 능가하는 참여를 이끌어낸다고 한다면 이 행사는 그것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2.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매년, 그것도 일 년에 두 번씩이나 경험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다는 법치국가 대한민국이 한글날과 제헌절에 앞서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을 국가적으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크리스마스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임기에 법정공휴일로 처음 제정되었고 석가탄신일은 기독교 기념일만을 법정공휴일로 제정하는 것이 워낙 민망한 일인 탓에 어부지리로 법정공휴일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원체 국내에 기독교, 불교 세력의 입심이 강하기도 하거니와 특별히 크리스마스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소비주의문화와 결합하면서 종교차원의 행사에서 벗어나 연인과 가족의 휴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어 그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공휴일이 너무 많아 국가경쟁력에 해가 된다는 경영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헌절과 한글날을 법정공휴일에서 제외하는 와중에도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이 확고부동하게 지위를 보전하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이를 당연스럽게 여기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이 날들이 대중들의 삶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이 한글날과 제헌절보다 앞서 기념되는 것이 옳은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국가차원에서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을 기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에 맞춰져야 마땅하다.

 

우리나라가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기념일을 기념하는 것이 롯데가 해태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기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기념해야 할 프로야구 전체의 영웅이라면 일개 팀이 아니라 협회의 차원에서 기념되어야 마땅하고 굳이 한 팀이 나서 기념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와 비슷한 급의 다른 선수들도 공평하게 기념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는 대한민국이 국가차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기념일을, 그것도 제헌절과 한글날 같은 국가적으로 의미있는 날에 우선하여 기념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법치국가로서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의 지향을 훼손하는 일일 뿐더러 사회 구성원들의 사상의 발달을 알게 모르게 왜곡할 수 있는 일이다.

 

세계인의 정신적 성장에 기여한 인간이 어디 석가와 예수 뿐이던가.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기타 등등의 위인들이 넘쳐나지 않던가. 예수와 석가가 이들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것이 무엇이기에 대한민국이 앞장서 이들을 기념하는 것인지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매일이 팍팍한 상당수 노동자들에게 휴일이란 그 의미여하를 막론하고 절실하게 요구되는 '쉬는 날'이다. 그러나 민주국가의 시민으로서 법정공휴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단순한 권리를 넘어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부는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을 국가차원에서 기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를 살피고 옳지 않다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흔히 크리스마스를 법정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을 옹호하는 무리들은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으므로 단순히 기독교의 축제를 넘어 세계평화와 공영같은 가치지향적 휴일로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이야기 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이보다 교활하고 한심한 주장이 있을까.

 

사실관계를 따져보더라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미국을 비롯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있는 나라들, 혹은 친미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중동과 남미의 일부 나라들에 한정된다. 아시아만 보아도 12월 25일이 제헌절인 인도네시아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와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만이 크리스마스를 법정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특정 종교의 기념일을 세계평화와 공영의 날로 치환하여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역시 사랑과 평화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불평등한 처사다. 굳이 국가차원에서 이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기념하고자 한다면 이를 기념하는 새로운 국가기념일을 지정하는 것이 국가정체성면에서나 기독교나 불교의 신자가 아닌 이들을 위해서나 보다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유국가이기에 종교기념일은 법정공휴일이 아니더라도 참여를 원하는 이들이 얼마든지 따로 모여 기념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이나 부활절 행사가 법정공휴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된 적이 있던가.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국민의 평등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유국가라면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을 법정공휴일에서 제외하여야 한다. 그것이 이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