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새해를 맞이하는 1월 1일… 특별히 해맞이를 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기 때문에 느즈막히 게으름을 피운 후, 보성 녹차밭 근처에 있는 해수탕에 가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벌교에 들러 제철을 맞은 꼬막 정식이나 먹고 돌아 오려고 한다. 보성.. 벌교..하면 ‘태백산맥’, ‘꼬막’,'주먹(?)등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벌교를 찾을 때면 항상 안치환이 부른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이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이 언젠가 지역민방 KBC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박기동의 다시 찾은 노래 부용산’이란 프로그램이었다. 딱 한번 들었는데도 남도의 한을 담은 듯한 애절한 멜로디와 가사에 담긴 슬픈 사연 때문이었을까? 단번에 노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부용산'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주무대였던 전남 보성군 벌교읍을 내려다 보는 해발 100여미터에 불과한 조그마한 산이다. 이노래는 작사가인 박기동선생은 1941년 벌교로 시집간 누이동생 박영애가 1947년 폐결핵으로 꽃다운 젊은나이에사망하자 시집식구들과 함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묻고 돌아 오면서 복받치는 슬픔을 옮겨 적은 시가 바로 ‘부용산’이라고 한다. 그후, 목포 항도여중 교사로 제직하던 박기동 선생은 1948년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김정희’라는 학생이 갑자기 요절하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당시 음악선생이었던 안성현 선생이 곡을 붙였으며 이노래를 학생들이 즐겨 불렀을 뿐만 아니라, 목포지역을 중심으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래가 작곡가인 안성현 선생이 6.25때 월북했었고, 당시 지리산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빨치산들이 고향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여 50여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며 점점 잊혀져 가게 되고 자칫, 영원히 잊혀질 뻔 했다. 그후, '부용산'은 50여년의 긴 잠을 자다 1997년에 이르러 이 노래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가수 안치환의 ‘다비치’라는 앨범에 수록되면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1999년에는 호주로 이민간 팔순의 박기동 선생이 2절 가사를 완성하였고 부용산과 목포여고(당시 항도여중)에 부용산 시비가 세워지면서 진정한 우리의 노래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작사가인 박기동 선생은 80평생 두번 밖에 울지 않았다는 그도 30분 동안 책상에 앉아 오열했다는 2절 가사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지는 슬픔과 인상무상에 대한 애절한 심경이 담겨있다. 한해를 보내며 희망찬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오늘........... 유난히도 애처로운 곡조의 이 노래가 더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 용 산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부용산 오리길(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붉은)장미는 시들어지고(시들었구나) 부용산 봉우리(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다시 찾은 노래 "부용산"
내일은 새해를 맞이하는 1월 1일…
특별히 해맞이를 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기 때문에 느즈막히 게으름을 피운 후, 보성 녹차밭 근처에 있는
해수탕에 가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벌교에 들러 제철을 맞은 꼬막 정식이나 먹고 돌아 오려고 한다.
보성.. 벌교..하면 ‘태백산맥’, ‘꼬막’,'주먹(?)등이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벌교를 찾을 때면
항상 안치환이 부른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이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이 언젠가 지역민방 KBC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박기동의 다시 찾은
노래 부용산’이란 프로그램이었다.
딱 한번 들었는데도 남도의 한을 담은 듯한 애절한 멜로디와 가사에 담긴 슬픈 사연 때문이었을까?
단번에 노래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부용산'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주무대였던 전남 보성군 벌교읍을 내려다 보는 해발 100여미터에
불과한 조그마한 산이다.
이노래는 작사가인 박기동선생은 1941년 벌교로 시집간 누이동생 박영애가 1947년 폐결핵으로 꽃다운
젊은나이에사망하자 시집식구들과 함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묻고 돌아 오면서 복받치는 슬픔을 옮겨
적은 시가 바로 ‘부용산’이라고 한다.
그후, 목포 항도여중 교사로 제직하던 박기동 선생은 1948년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났던 ‘김정희’라는
학생이 갑자기 요절하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당시 음악선생이었던 안성현 선생이 곡을 붙였으며
이노래를 학생들이 즐겨 불렀을 뿐만 아니라, 목포지역을 중심으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노래가 작곡가인 안성현 선생이 6.25때 월북했었고, 당시 지리산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빨치산들이 고향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여
50여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며 점점 잊혀져 가게 되고 자칫, 영원히 잊혀질
뻔 했다.
그후, '부용산'은 50여년의 긴 잠을 자다 1997년에 이르러 이 노래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가수 안치환의 ‘다비치’라는 앨범에 수록되면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1999년에는 호주로
이민간 팔순의 박기동 선생이 2절 가사를 완성하였고 부용산과 목포여고(당시 항도여중)에 부용산
시비가 세워지면서 진정한 우리의 노래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작사가인 박기동 선생은 80평생 두번 밖에 울지 않았다는 그도 30분 동안 책상에 앉아 오열했다는
2절 가사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지는 슬픔과 인상무상에 대한 애절한
심경이 담겨있다.
한해를 보내며 희망찬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오늘...........
유난히도 애처로운 곡조의 이 노래가 더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 용 산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부용산 오리길(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붉은)장미는 시들어지고(시들었구나)
부용산 봉우리(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