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출간돼 꾸준히 인기를 얻어온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가 드디어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던 매혹적인 향기와 거리의 악취가 서로 뒤엉켜 스크린 위에서 끈끈하게 흘러내린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은 언제나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방황한다. 첫째, 한 손에 책을 들고 두 눈을 부릅뜬 원작 팬들을 만족시키는 것. 둘째, 아는 것이라곤 영화의 제목뿐인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것. 대개의 영화들은 두 번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원작은 소재 난을 해결해주지만, 제작이 시작되면 결국 주변의 다른 경쟁작들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작이라는 뿌리에 지나치게 자주 물을 준 영화치고 마지막까지 잘 자라난 영화는 지금껏 드물었다.
그러나 그 원작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라면?' 1985년 출간된 이래 독일에서만 4백만, 세계적으로 1천 5백만 부 이상 팔려나갔고 지금까지도 새로운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는 그 '라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적당히 화면에 어울리게 각색하고 영화적 흥미 거리를 첨가한 뒤 엔딩 크레딧에 슬그머니 ‘원작 : ’라고 올리는 것으로 넘어가기에는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군침을 흘릴 만한 제작자는 넘치겠지만, 수많은 독자들을 미소 짓게 할 강심장의 소유자는 많지 않을 터, 독일의 '베른트 아이힝어'는 그 많고도 드문 영화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인기라면 못지않은 소설 중 하나인 '움베르토 에코'의 을 1986년 영화화했던 제작자가 바로 그다. 비록 비평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었지만, '장 자크 아노'를 감독으로 앉혀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켜내고 '숀 코너리'와 '크리스천 슬레이터'를 등장시켜 상업적인 흥행도 이끌어냈다. '쥐스킨트'의 동의만 있었다면 도 비슷한 시기에 영화로 나올 수 있었다. '아이힝어'는 사실 가 처음 출간되자마자 판권을 구입하려 했다. 그는 독특하고 강렬한 이야기에 순식간에 매료당했고, 게다가 '쥐스킨트'와는 친분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쥐스킨트'가 누구인가. 좀머 씨의 입을 통해 “날 좀 내버려 두시오”라고 외치는 은둔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계약서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1년 뒤 소설 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여러 제작자들이 판권을 사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모두 포기했다. 그러나 '아이힝어'의 요청은 15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졌다. 결국 2000년이 돼서야 평소와는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판권 구입은 시작일 뿐이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소설과영화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는 일은 언제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는 대사보다는 주인공의 내면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는 소설이기 때문에 영화로 풀어나가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아이힝어'는 때 각본을 담당했던 '앤드류 버킨'을 영입했다. 감독으로는 , 등을 연출함으로써 “혁신적이지만 대중적인 접근을 한다”는 평가를 얻은 '톰 티크베어'로 결정됐다. 3명은 함께 각색 작업에 나섰다.
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출생과 함께 시작된다. 1738년, 악취가 가득한 생선시장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에게도 버림받는다. 가이아르라는 유모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던 그르누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후각이 굉장히 예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3세가 되던 해 그는 10프랑에 무두질 공장에 팔려간다. 지옥 같은 환경의 공장에서 서서히 적응하던 어느 날 그는 알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에 이끌려 어떤 여인을 쫓아가게 되고 결국 그녀를 죽이게 된다. 그르누이는 미친 듯이 그녀의 향기를 쓸어 담는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된다. 그는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몰락한 향수제조업자 발디니를 비롯, 프랑스 여기저기를 떠돌게 된다. 이후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기 위한 '그르누이'의 살인행각은 그가 머무는 도시 전체를 공포에 빠뜨리게 된다.
문학계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는 여느 고전적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의미’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 이처럼 지독하게 후각이란 감각에 집중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공감각이 난무하는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후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냄새’를 다른 감각을 이용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해내야 한다는 점은 소설과 영화 모두에게 고민거리다. '쥐스킨트'는 집요할 정도로 다양한 단어의 나열을 묘사에 이용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감귤이나 실측백나무, 사향냄새와는 달랐으며 재스민이나 수선화, 모과나무나 붓꽃의 향기 등과도 다른 것이었다. 또 이 향기는 붙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혼합돼 있었다. 그것도 그냥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면서 말이다. 가볍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하고 지속적이었다. 얇지만 오색영롱하게 반짝이는 비단처럼….”
독자 개인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 있는 소설에 비해 영화는 도움 받을 곳이 그리 많지 않다. 화면에 보이는 것이 즉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톰 티크베어'는 화면의 질감과 빠른 편집을 이용해 두 장르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영화 는 마치 유화물감을 거칠게 덧칠한 듯 찐득한 질감의 색깔을 뿜어낸다. 초반의 생선시장 장면, 흘러나오는 내레이션대로 영화는 “프랑스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그곳”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낸다. 피로 뒤범벅돼 엉켜진 생선들이 철퍼덕 하고 가판대에 뿌려지면 어지간히 비위가 좋은 관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개를 돌리거나 인상을 잔뜩 찌푸릴 것이다. 생선내장이 널브러진 바닥에서 태어난 '그르누이'가 깨어나는 순간, 화면은 빠르게 시장 주변의 풍경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며 훑어나간다. 토막 난 생선의 지느러미나 아가미, 떨어진 조각을 주워 먹는 지저분한 개, 버려진 생선들 사이를 기어 다니는 구더기와 쥐 등.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고 빠르게 릴을 감듯 넘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시각을 넘어서는 강한 자극을 준다. 그 자극은 우리 뇌의 어딘가에 기억돼 있는 ‘진짜 생선냄새’까지 끌어낸다.
이후에도 냄새를 표현할 때는 같은 편집방식이 자주 사용된다. 바르셀로나에서 촬영된 생선시장 장면은 아날로그적 작업의 산물이다. 감독인 '톰 티크베어'는 “2.5톤의 생선을 바르셀로나의 중심부 ‘바리 고틱(Barri Gotic)’에 뿌렸고 그 냄새는 몇 마을 떨어진 곳에서도 날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촬영현장에는 60여 명의 스탭들이 양동이와 호스를 이용해 여러 가지 더러운 것들을 뿌리고 다녔고 촬영이 끝나면 다시 깨끗하게 청소하는 작업이 반복됐다. 확실히 그런 노력들은 영화가 원작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에너지를 갖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소설의 부제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처럼 이야기는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르누이의 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르누이는 도덕과 윤리의 테두리나 한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랑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이나 품위도 없는 상태로 행동한다. 보통 99%의 영화에서는 이런 인물을 볼 수 없다”고 아이힝어는 말한다. 그르누이에게 처음으로 향수제조법을 가르치는 인물인 발디니 역은 쉽게 구해졌다. 원작 소설의 팬인 '더스틴 호프먼'은 평소 안면이 있던 '톰 티크베어' 감독에게 출연의사를 전했고 제작진은 만장일치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인공 '그르누이' 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톰 티크베어'는 어느 날 런던의 ‘올드 빅(Old Vic)극장’에서 을 공연하고 있는 젊은 배우 '벤 위쇼'를 발견했다. '벤 위쇼'는 “영화에서 그르누이가 무명에서 유명으로 변하듯이, 배우도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좋겠다”는 티크베어의 생각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쥐스킨트'는 소설에서 '그르누이'를 등이 굽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외모로 설정했다. 심지어 ‘악마’ ‘진드기’ ‘괴물’ ‘독사’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는 '그르누이'를 동정하지 않는다.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가며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르누이를 연기하는 '벤 위쇼'는 전혀 못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렁그렁한 슬픈 눈으로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한다. 이것은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다. 소설에서는 '그르누이'의 내면과 생각들을 쥐스킨트의 설명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내레이션만으로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벤 위쇼'의 표정과 눈빛, 행동으로 '그르누이'의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르누이'가 향수 만들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받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갈망과 자신에게 냄새가 없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벤 위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르누이'를 잘 표현해낸다. “문제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한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관객이 그의 집착에 매혹될 수 있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만들어야 했다”고 아이힝어는 말한다. 그의 말대로 영화의 그르누이는 집착의 ‘동기’라는 부분에서 관객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쉬운 캐릭터로 변했다.
소설 의 또 다른 주인공은 '18세기의 파리'다. 소설이 허무맹랑한 연쇄살인자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데는 시대에 대한 '쥐스킨트'의 이해와 풍성한 묘사가 큰 역할을 한다. 당시의 악취문제와 향수의 발전, 초창기의 향수제조방법, 산업혁명 전, 부를 축적해나가는 시민계급과 평민들의 모습 등은 그의 오랜 자료수집과 취재로 복원된 풍경들이다. 실제로 를 쓰던 시절, '쥐스킨트'의 다락방에는 18세기 파리의 대형 지도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다시 모든 것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관객들이 스토리와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잘 만들어진 배경이 필수다.
2005년 7월 12일에 시작한 촬영은 1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그동안 촬영팀은 여러 나라들을 오가며 18세기에 어울리는 공간들을 찾아다녔다. 영화는 대부분 '그르누이'의 시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상류층의 공간보다는 18세기 중반의 중하위층 사람들의 현실을 그려야 했다. 발디니의 향수가게 장면은 뮌헨에서 찍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고딕 콰터(Gothic Quarter)’에서는 전깃줄과 현대적인 창문틀 등을 대형 라텍스로 덮어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의상은 ‘냄새’를 표현하는 데 가장 신경 쓴 소품이다. 3개월 동안 1,400개가 넘는 의상을 루마니아를 오가며 준비했고 더럽고 땀에 젖은 옷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작업을 병행했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배우들은 그 의상들을 입고 한동안 생활했다.
영화의 백미인 마지막 사형 집행장 장면은 '그르누이'의 스타디움 공연과 같은 분위기로 촬영됐다. 13명의 여인들을 죽이고 만든 궁극의 향수를 뿌린 뒤, 모든 사람들이 옷을 벗으며 사랑을 나누는 충격적인 명장면은 유럽의 유명한 무용단 ‘라 푸라 델 바우스’에서 150명의 무용수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600명의 엑스트라와 40명의 분상사, 35명의 의상조교가 함께했다. 그들은 마치 향수의 향이 시간에 따라 변해가듯 동정, 애정, 동경, 욕망을 차례로 표현해낸다. 마치 원작을 뛰어넘어 ‘이것이 영화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톰 티크베어'는 자신감을 얻은 듯 이 장면에서 자신만의 낙인을 찍는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유작 각본으로 을 찍었던 전력이 있던 그는, 애정을 나누는 군중들 속에서 고독함을 느끼는 그르누이에게 '키에슬롭스키'의 의 마지막 장면을 선물한다. '그르누이'가 과거 처음 죽였던 여인이 자신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상상을 하는 장면은 원작 소설에 찾아볼 수 없는, 영화만의 재산이다. 영화 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고 평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서 성실하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드문 사례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향수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 2006)
영국, 독일, 스페인, 프랑스 / 드라마, 스릴러 / 146분
감독: 톰 튀크베어
(★★★★☆)
2007년 제20회 유럽영화상
유러피안 촬영상, 유럽영화아카데미 예술공헌상
20여 년 전 출간돼 꾸준히 인기를 얻어온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가 드디어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던 매혹적인 향기와 거리의 악취가 서로 뒤엉켜 스크린 위에서 끈끈하게 흘러내린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은 언제나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방황한다. 첫째, 한 손에 책을 들고 두 눈을 부릅뜬 원작 팬들을 만족시키는 것. 둘째, 아는 것이라곤 영화의 제목뿐인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것. 대개의 영화들은 두 번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원작은 소재 난을 해결해주지만, 제작이 시작되면 결국 주변의 다른 경쟁작들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작이라는 뿌리에 지나치게 자주 물을 준 영화치고 마지막까지 잘 자라난 영화는 지금껏 드물었다.
그러나 그 원작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라면?' 1985년 출간된 이래 독일에서만 4백만, 세계적으로 1천 5백만 부 이상 팔려나갔고 지금까지도 새로운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는 그 '라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적당히 화면에 어울리게 각색하고 영화적 흥미 거리를 첨가한 뒤 엔딩 크레딧에 슬그머니 ‘원작 : ’라고 올리는 것으로 넘어가기에는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군침을 흘릴 만한 제작자는 넘치겠지만, 수많은 독자들을 미소 짓게 할 강심장의 소유자는 많지 않을 터, 독일의 '베른트 아이힝어'는 그 많고도 드문 영화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인기라면 못지않은 소설 중 하나인 '움베르토 에코'의 을 1986년 영화화했던 제작자가 바로 그다. 비록 비평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었지만, '장 자크 아노'를 감독으로 앉혀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켜내고 '숀 코너리'와 '크리스천 슬레이터'를 등장시켜 상업적인 흥행도 이끌어냈다. '쥐스킨트'의 동의만 있었다면 도 비슷한 시기에 영화로 나올 수 있었다. '아이힝어'는 사실 가 처음 출간되자마자 판권을 구입하려 했다. 그는 독특하고 강렬한 이야기에 순식간에 매료당했고, 게다가 '쥐스킨트'와는 친분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쥐스킨트'가 누구인가. 좀머 씨의 입을 통해 “날 좀 내버려 두시오”라고 외치는 은둔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계약서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1년 뒤 소설 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여러 제작자들이 판권을 사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모두 포기했다. 그러나 '아이힝어'의 요청은 15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졌다. 결국 2000년이 돼서야 평소와는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판권 구입은 시작일 뿐이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소설과영화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는 일은 언제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는 대사보다는 주인공의 내면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는 소설이기 때문에 영화로 풀어나가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아이힝어'는 때 각본을 담당했던 '앤드류 버킨'을 영입했다. 감독으로는 , 등을 연출함으로써 “혁신적이지만 대중적인 접근을 한다”는 평가를 얻은 '톰 티크베어'로 결정됐다. 3명은 함께 각색 작업에 나섰다.
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출생과 함께 시작된다. 1738년, 악취가 가득한 생선시장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에게도 버림받는다. 가이아르라는 유모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던 그르누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후각이 굉장히 예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3세가 되던 해 그는 10프랑에 무두질 공장에 팔려간다. 지옥 같은 환경의 공장에서 서서히 적응하던 어느 날 그는 알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에 이끌려 어떤 여인을 쫓아가게 되고 결국 그녀를 죽이게 된다. 그르누이는 미친 듯이 그녀의 향기를 쓸어 담는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된다. 그는 향기를 영원히 보존하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몰락한 향수제조업자 발디니를 비롯, 프랑스 여기저기를 떠돌게 된다. 이후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기 위한 '그르누이'의 살인행각은 그가 머무는 도시 전체를 공포에 빠뜨리게 된다.
문학계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는 여느 고전적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의미’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 이처럼 지독하게 후각이란 감각에 집중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공감각이 난무하는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후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냄새’를 다른 감각을 이용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해내야 한다는 점은 소설과 영화 모두에게 고민거리다. '쥐스킨트'는 집요할 정도로 다양한 단어의 나열을 묘사에 이용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감귤이나 실측백나무, 사향냄새와는 달랐으며 재스민이나 수선화, 모과나무나 붓꽃의 향기 등과도 다른 것이었다. 또 이 향기는 붙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혼합돼 있었다. 그것도 그냥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면서 말이다. 가볍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하고 지속적이었다. 얇지만 오색영롱하게 반짝이는 비단처럼….”
독자 개인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 있는 소설에 비해 영화는 도움 받을 곳이 그리 많지 않다. 화면에 보이는 것이 즉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톰 티크베어'는 화면의 질감과 빠른 편집을 이용해 두 장르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영화 는 마치 유화물감을 거칠게 덧칠한 듯 찐득한 질감의 색깔을 뿜어낸다. 초반의 생선시장 장면, 흘러나오는 내레이션대로 영화는 “프랑스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그곳”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낸다. 피로 뒤범벅돼 엉켜진 생선들이 철퍼덕 하고 가판대에 뿌려지면 어지간히 비위가 좋은 관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고개를 돌리거나 인상을 잔뜩 찌푸릴 것이다. 생선내장이 널브러진 바닥에서 태어난 '그르누이'가 깨어나는 순간, 화면은 빠르게 시장 주변의 풍경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며 훑어나간다. 토막 난 생선의 지느러미나 아가미, 떨어진 조각을 주워 먹는 지저분한 개, 버려진 생선들 사이를 기어 다니는 구더기와 쥐 등.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고 빠르게 릴을 감듯 넘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시각을 넘어서는 강한 자극을 준다. 그 자극은 우리 뇌의 어딘가에 기억돼 있는 ‘진짜 생선냄새’까지 끌어낸다.
이후에도 냄새를 표현할 때는 같은 편집방식이 자주 사용된다. 바르셀로나에서 촬영된 생선시장 장면은 아날로그적 작업의 산물이다. 감독인 '톰 티크베어'는 “2.5톤의 생선을 바르셀로나의 중심부 ‘바리 고틱(Barri Gotic)’에 뿌렸고 그 냄새는 몇 마을 떨어진 곳에서도 날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촬영현장에는 60여 명의 스탭들이 양동이와 호스를 이용해 여러 가지 더러운 것들을 뿌리고 다녔고 촬영이 끝나면 다시 깨끗하게 청소하는 작업이 반복됐다. 확실히 그런 노력들은 영화가 원작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에너지를 갖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소설의 부제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처럼 이야기는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르누이의 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르누이는 도덕과 윤리의 테두리나 한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랑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이나 품위도 없는 상태로 행동한다. 보통 99%의 영화에서는 이런 인물을 볼 수 없다”고 아이힝어는 말한다. 그르누이에게 처음으로 향수제조법을 가르치는 인물인 발디니 역은 쉽게 구해졌다. 원작 소설의 팬인 '더스틴 호프먼'은 평소 안면이 있던 '톰 티크베어' 감독에게 출연의사를 전했고 제작진은 만장일치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인공 '그르누이' 역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톰 티크베어'는 어느 날 런던의 ‘올드 빅(Old Vic)극장’에서 을 공연하고 있는 젊은 배우 '벤 위쇼'를 발견했다. '벤 위쇼'는 “영화에서 그르누이가 무명에서 유명으로 변하듯이, 배우도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 좋겠다”는 티크베어의 생각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쥐스킨트'는 소설에서 '그르누이'를 등이 굽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외모로 설정했다. 심지어 ‘악마’ ‘진드기’ ‘괴물’ ‘독사’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는 '그르누이'를 동정하지 않는다.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가며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르누이를 연기하는 '벤 위쇼'는 전혀 못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렁그렁한 슬픈 눈으로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한다. 이것은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다. 소설에서는 '그르누이'의 내면과 생각들을 쥐스킨트의 설명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내레이션만으로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벤 위쇼'의 표정과 눈빛, 행동으로 '그르누이'의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르누이'가 향수 만들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받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갈망과 자신에게 냄새가 없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벤 위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르누이'를 잘 표현해낸다. “문제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대한 동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관객이 그의 집착에 매혹될 수 있는 방향으로 캐릭터를 만들어야 했다”고 아이힝어는 말한다. 그의 말대로 영화의 그르누이는 집착의 ‘동기’라는 부분에서 관객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쉬운 캐릭터로 변했다.
소설 의 또 다른 주인공은 '18세기의 파리'다. 소설이 허무맹랑한 연쇄살인자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데는 시대에 대한 '쥐스킨트'의 이해와 풍성한 묘사가 큰 역할을 한다. 당시의 악취문제와 향수의 발전, 초창기의 향수제조방법, 산업혁명 전, 부를 축적해나가는 시민계급과 평민들의 모습 등은 그의 오랜 자료수집과 취재로 복원된 풍경들이다. 실제로 를 쓰던 시절, '쥐스킨트'의 다락방에는 18세기 파리의 대형 지도가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다시 모든 것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관객들이 스토리와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잘 만들어진 배경이 필수다.
2005년 7월 12일에 시작한 촬영은 1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그동안 촬영팀은 여러 나라들을 오가며 18세기에 어울리는 공간들을 찾아다녔다. 영화는 대부분 '그르누이'의 시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상류층의 공간보다는 18세기 중반의 중하위층 사람들의 현실을 그려야 했다. 발디니의 향수가게 장면은 뮌헨에서 찍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고딕 콰터(Gothic Quarter)’에서는 전깃줄과 현대적인 창문틀 등을 대형 라텍스로 덮어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의상은 ‘냄새’를 표현하는 데 가장 신경 쓴 소품이다. 3개월 동안 1,400개가 넘는 의상을 루마니아를 오가며 준비했고 더럽고 땀에 젖은 옷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작업을 병행했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배우들은 그 의상들을 입고 한동안 생활했다.
영화의 백미인 마지막 사형 집행장 장면은 '그르누이'의 스타디움 공연과 같은 분위기로 촬영됐다. 13명의 여인들을 죽이고 만든 궁극의 향수를 뿌린 뒤, 모든 사람들이 옷을 벗으며 사랑을 나누는 충격적인 명장면은 유럽의 유명한 무용단 ‘라 푸라 델 바우스’에서 150명의 무용수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600명의 엑스트라와 40명의 분상사, 35명의 의상조교가 함께했다. 그들은 마치 향수의 향이 시간에 따라 변해가듯 동정, 애정, 동경, 욕망을 차례로 표현해낸다. 마치 원작을 뛰어넘어 ‘이것이 영화다’라고 자신 있게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톰 티크베어'는 자신감을 얻은 듯 이 장면에서 자신만의 낙인을 찍는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유작 각본으로 을 찍었던 전력이 있던 그는, 애정을 나누는 군중들 속에서 고독함을 느끼는 그르누이에게 '키에슬롭스키'의 의 마지막 장면을 선물한다. '그르누이'가 과거 처음 죽였던 여인이 자신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상상을 하는 장면은 원작 소설에 찾아볼 수 없는, 영화만의 재산이다. 영화 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고 평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서 성실하게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드문 사례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