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브라이언 드 팔마'라는 이름에 비하면 조금 실망스럽다. '드 팔마'는 직관적인 예술가보다 재능 있는 이야기꾼에 가깝다. 그는 역사적 원본을 만들어낸다기보다 흥미로운 모작 혹은 원본보다 논쟁적인 복제를 만들어낸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드 팔마의 이 작업이 숭배와 존경 이상의 스타일에 정박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것을 재해석해낸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는 현대판 누아르로 손색이 없다. 스튜디오 촬영의 질감, 1인칭 시점, 매력적인 팜므 파탈, 강렬한 콘트라스트, 끈적한 음모의 분위기까지. '드 팔마'는 자신이 누아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애착하는지 잘 보여준다. 불만은 영화에 누아르 스타일 이상의 직관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영화에 삽입된 훌륭한 장치들은 누아르의 서사가 주는 상실감, 무력감을 관통하지만 또 그것과 다른 어떤 지점을 향해 간다. 엄밀히 말해 는 누아르풍이지만 누아르 서사를 배신한다. 이를테면, 강렬한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는 시각적 즐거움에 멈추고, 팜므 파탈로 등장하는 여성은 가학적 관음증의 대상으로 무너진다. 는 훨씬 더 복잡한 정치 드라마이며 이미지의 매혹에 사로잡힌 자들의 외상을 다룬 심리극이다. 이런 점이 이 영화에 대한 기대와 배반 가운데 놓여 있다.
는 '누아르'라기보다 '관음증'에 대한 보고서에 가깝다. 관음증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문제시된다. 첫 번째는 무참히 훼손된 사체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것은 도착적 호기심에 침윤돼 있다. 두 번째는 사건을 장악하려는 경관들의 '관음증'이다. 그들은 사건 해결에 대한 당위성과 의무감, 사체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충돌한다. 그런데 사건 해결의 필요상 접근하게 되는 자료들은 사건 자체에 대한 논리적 연관성이 아닌 다른 감정들을 자꾸 건드린다. 마치 그들에게 말을 걸듯 영화에 기록된 피해자의 이미지는 시선을 던진다. 그녀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는 관음자 앞에 전시되는 것이다. 짐작하다시피 마지막 관음증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시선이다. 관객들은 누아르 문법에 맞는 어떤 지점들, 사체와 관련된 참혹한 이미지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를 연기하는 '블랙 달리아'의 몸짓에 매료된다.
'관음증'이란 대상의 실체가 아닌 이미지에 도착된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의 내부 혹은 그 진실이 아닌 드러난 이미지에 고착된다. 그녀, '엘리자베스 쇼트'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왜 죽었는지보다 어떻게 죽었는가에 몰두했다. '드 팔마'가 이 사건을 "포르노그래피”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의 이야기는 크게 네 가지 줄기 위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불과 얼음으로 불리는 '벅키'와 '리'의 이야기다. 가난했던 '벅키'는 정식 수사대원이 되기 위해 '리'와 거래하고 이후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가 된다. 이 두 사람 가운데에 '케이'가 끼어 있고, 애매한 삼각관계가 지속된다. 두 번째는 '블랙 달리아'라고 불리는 살인사건 이야기다.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검은 머리의 여배우이기에 '블랙 달리아'라 불렸던 조연 배우 '엘리자베스 쇼트'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그런데 그 변사체가 전대미문의 끔찍한 몰골이다. 입술은 양쪽 귀까지 찢겨 있고 허리가 잘린 채 내장은 적출돼 있다. 리와 버키가 사건 전담반에 소속되면서 사체는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 세 번째 이야기는 '리'와 '케이', 그리고 '케이'의 옛 애인 '바비 드윗'의 관계다. '리'는 '바비 드윗'으로부터 '케이'를 빼앗았는데 그가 10년 만에 출소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버키'와 '메디', 그리고 '케이'의 관계 위에서 진행된다. '블랙 달리아' 사건 조사 중 '버키'는 '메디'와 만나게 되고 그녀의 유혹에 굴복하게 된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사연들은 등장인물의 수만큼 경우의 수로 확장되지만 과거와 현재, 필름에 남은 영상과 사체, 증언과 목격 가운데서 또 한 번 전복된다. 게다가 등장한 인물들은 서사상 구축한 자신의 이미지를 배반하기도 하고 이야기의 진실은 표면 아래 숨어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리'는 '버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아니라 이용한 것이며, '메디'는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가족사를 은폐하려 했다. 한 마디로 는 지독히 복잡한 이야기인 셈이다.
최종 기착지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긴장감을 제공한다. 그로테스크하게 과장된 인물들의 행보는 이 긴장감을 좀 더 강화시킨다. 매기는 백만장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 클럽 주변을 배회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상생활조차 연기처럼 과장하고, 어머니는 신경과민 직전의 약물중독자다. 그녀의 집안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도착적 이미지의 집결체처럼 보인다. 가 조준하고 있는 지점이 그들 가정 내부에 있으리라는 것은 일찌감치 짐작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가 추구하는 것이 배신과 전복으로 귀결될 반전구조의 의외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영화는 언제나 의외의 결과에 봉착하고 마는 관계 자체에 관심을 둔다. 이 영화가 누아르라기보다 누아르풍 심리 드라마로 받아들여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점은 앞서 말한 네 가지 이야기 구조가 공교롭게도 모두 삼각구도 위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드 팔마'는 관계의 공고성이 바로 삼각구도에 있다고 보는 듯싶다. "나는 삼각대를 지지하는 중심 다리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는 '버키'의 독백에도 이는 드러나 있다. '버키'는 '리'의 애인인 '케이'의 유혹을 거절하며 자신은 이 관계의 무게 중심이라고 읊조린다.
'버키'는 이 복잡다단한 관계의 중심 추, 언제나 삼각구도의 무게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반전이라고 부르는 놀라움 역시 이 삼각구도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사건에 빠져 이성을 잃었던 '리'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견고하던 삼각관계가 무너지자 '케이'와 '버키'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이에 연쇄적으로 다른 삼각구도 역시 무너지기 시작한다.
주목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사건 증거물이자 핵심인 '엘리자베스 쇼트'의 사체와 그녀가 생전에 찍었던 영화, 그리고 사건 담당자와의 관계다. '엘리자베스'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전전긍긍한다. 별다른 재주도 미모도 없는 그녀는 종종 자신의 몸을 빌미로 자투리 역할을 차지한다. 오디션 필름은 영화배우가 아닌 영화배우가 되고자 하는 '엘리자베스'의 초라한 실제를 보여준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장면들, 그러니까 배우 '엘리자베스'가 은닉하고 싶었던 사실을 바라보는 '리'와 '버키'의 시선이다. 그들은 연민과 동정을 가진 채 그녀의 오디션 장면을 바라보지만 실상 이는 외설적 시선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흑백 필름 너머로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처참히 훼손된 사체를 바라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한편에서는 연민을 다른 한 편에서는 참혹한 분노를 드러내지만 그녀가 이 격렬한 감정의 스펙트럼 한가운데, 외설적 시선 앞에 놓여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녀가 외설적 시선의 대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결국 그녀가 찍은 포르노영화를 통해 입증된다. '드 팔마'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우회적으로 즐겼던 관음증의 욕망을 포르노그래피라는 형식을 통해 발가벗긴다. 이에 당혹감을 느끼는 '버키'와 '리'의 시선은 곧 관객의 그것이다. 필름 속에서 관객을 직시하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은 우리의 관음증이 들켜버렸다는 낙인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버키'가 '케이'를 차지하는 것이 결론인 듯 막을 내린다. 엄청난 도착적 외설을 앓고 있는 '매기' 집안을 침범한 그는 자백을 받아내듯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두 파헤치자마자 '케이'의 품으로 간다. 흥미로운 것은 '케이'를 선택하기 직전 '버키'가 사체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환기한다는 것이다. 부패한 상류층 집안과 달리 건실해 보였던 '버키'의 행위는 사체의 이미지에 포획됐던 한 남자의 수사극으로 귀결된다. 수사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마지막 장면의 사체는 의 정서적 긴장을 사체의 이미지에 일축시킨다. 한 번도 제대로 전시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쇼트의 시체가 드디어 스크린 전면에 전폭적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눈시울을 적시던 그녀의 시선이 관객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는 범죄의 심리에 관객을 끌어들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관객의 윤리에 흠집을 낸다. 1940년대의 사회상, 비리, 상류층의 패덕과 같은 이성적 질문들은 실상 이 영화의 하위 서사이자 주제에 불과하다. 이미지에 사로잡힌 자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 관음증에 대한 끈질긴 질문과 심문, 그것이 바로 다.
블랙 달리아 (The Black Dahlia, 2006)
미국, 독일 / 범죄, 드라마 / 120분 / 감독:브라이언 드팔마
(★★★★☆)
는 '브라이언 드 팔마'라는 이름에 비하면 조금 실망스럽다. '드 팔마'는 직관적인 예술가보다 재능 있는 이야기꾼에 가깝다. 그는 역사적 원본을 만들어낸다기보다 흥미로운 모작 혹은 원본보다 논쟁적인 복제를 만들어낸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드 팔마의 이 작업이 숭배와 존경 이상의 스타일에 정박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것을 재해석해낸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는 현대판 누아르로 손색이 없다. 스튜디오 촬영의 질감, 1인칭 시점, 매력적인 팜므 파탈, 강렬한 콘트라스트, 끈적한 음모의 분위기까지. '드 팔마'는 자신이 누아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애착하는지 잘 보여준다. 불만은 영화에 누아르 스타일 이상의 직관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영화에 삽입된 훌륭한 장치들은 누아르의 서사가 주는 상실감, 무력감을 관통하지만 또 그것과 다른 어떤 지점을 향해 간다. 엄밀히 말해 는 누아르풍이지만 누아르 서사를 배신한다. 이를테면, 강렬한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는 시각적 즐거움에 멈추고, 팜므 파탈로 등장하는 여성은 가학적 관음증의 대상으로 무너진다. 는 훨씬 더 복잡한 정치 드라마이며 이미지의 매혹에 사로잡힌 자들의 외상을 다룬 심리극이다. 이런 점이 이 영화에 대한 기대와 배반 가운데 놓여 있다.
는 '누아르'라기보다 '관음증'에 대한 보고서에 가깝다. 관음증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문제시된다. 첫 번째는 무참히 훼손된 사체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것은 도착적 호기심에 침윤돼 있다. 두 번째는 사건을 장악하려는 경관들의 '관음증'이다. 그들은 사건 해결에 대한 당위성과 의무감, 사체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충돌한다. 그런데 사건 해결의 필요상 접근하게 되는 자료들은 사건 자체에 대한 논리적 연관성이 아닌 다른 감정들을 자꾸 건드린다. 마치 그들에게 말을 걸듯 영화에 기록된 피해자의 이미지는 시선을 던진다. 그녀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는 관음자 앞에 전시되는 것이다. 짐작하다시피 마지막 관음증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시선이다. 관객들은 누아르 문법에 맞는 어떤 지점들, 사체와 관련된 참혹한 이미지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를 연기하는 '블랙 달리아'의 몸짓에 매료된다.
'관음증'이란 대상의 실체가 아닌 이미지에 도착된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의 내부 혹은 그 진실이 아닌 드러난 이미지에 고착된다. 그녀, '엘리자베스 쇼트'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왜 죽었는지보다 어떻게 죽었는가에 몰두했다. '드 팔마'가 이 사건을 "포르노그래피”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의 이야기는 크게 네 가지 줄기 위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불과 얼음으로 불리는 '벅키'와 '리'의 이야기다. 가난했던 '벅키'는 정식 수사대원이 되기 위해 '리'와 거래하고 이후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가 된다. 이 두 사람 가운데에 '케이'가 끼어 있고, 애매한 삼각관계가 지속된다. 두 번째는 '블랙 달리아'라고 불리는 살인사건 이야기다.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검은 머리의 여배우이기에 '블랙 달리아'라 불렸던 조연 배우 '엘리자베스 쇼트'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그런데 그 변사체가 전대미문의 끔찍한 몰골이다. 입술은 양쪽 귀까지 찢겨 있고 허리가 잘린 채 내장은 적출돼 있다. 리와 버키가 사건 전담반에 소속되면서 사체는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 세 번째 이야기는 '리'와 '케이', 그리고 '케이'의 옛 애인 '바비 드윗'의 관계다. '리'는 '바비 드윗'으로부터 '케이'를 빼앗았는데 그가 10년 만에 출소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버키'와 '메디', 그리고 '케이'의 관계 위에서 진행된다. '블랙 달리아' 사건 조사 중 '버키'는 '메디'와 만나게 되고 그녀의 유혹에 굴복하게 된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사연들은 등장인물의 수만큼 경우의 수로 확장되지만 과거와 현재, 필름에 남은 영상과 사체, 증언과 목격 가운데서 또 한 번 전복된다. 게다가 등장한 인물들은 서사상 구축한 자신의 이미지를 배반하기도 하고 이야기의 진실은 표면 아래 숨어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리'는 '버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아니라 이용한 것이며, '메디'는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가족사를 은폐하려 했다. 한 마디로 는 지독히 복잡한 이야기인 셈이다.
최종 기착지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긴장감을 제공한다. 그로테스크하게 과장된 인물들의 행보는 이 긴장감을 좀 더 강화시킨다. 매기는 백만장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 클럽 주변을 배회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상생활조차 연기처럼 과장하고, 어머니는 신경과민 직전의 약물중독자다. 그녀의 집안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도착적 이미지의 집결체처럼 보인다. 가 조준하고 있는 지점이 그들 가정 내부에 있으리라는 것은 일찌감치 짐작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가 추구하는 것이 배신과 전복으로 귀결될 반전구조의 의외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영화는 언제나 의외의 결과에 봉착하고 마는 관계 자체에 관심을 둔다. 이 영화가 누아르라기보다 누아르풍 심리 드라마로 받아들여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점은 앞서 말한 네 가지 이야기 구조가 공교롭게도 모두 삼각구도 위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드 팔마'는 관계의 공고성이 바로 삼각구도에 있다고 보는 듯싶다. "나는 삼각대를 지지하는 중심 다리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는 '버키'의 독백에도 이는 드러나 있다. '버키'는 '리'의 애인인 '케이'의 유혹을 거절하며 자신은 이 관계의 무게 중심이라고 읊조린다.
'버키'는 이 복잡다단한 관계의 중심 추, 언제나 삼각구도의 무게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반전이라고 부르는 놀라움 역시 이 삼각구도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사건에 빠져 이성을 잃었던 '리'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견고하던 삼각관계가 무너지자 '케이'와 '버키'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이에 연쇄적으로 다른 삼각구도 역시 무너지기 시작한다.
주목을 끄는 것 중 하나는 사건 증거물이자 핵심인 '엘리자베스 쇼트'의 사체와 그녀가 생전에 찍었던 영화, 그리고 사건 담당자와의 관계다. '엘리자베스'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전전긍긍한다. 별다른 재주도 미모도 없는 그녀는 종종 자신의 몸을 빌미로 자투리 역할을 차지한다. 오디션 필름은 영화배우가 아닌 영화배우가 되고자 하는 '엘리자베스'의 초라한 실제를 보여준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장면들, 그러니까 배우 '엘리자베스'가 은닉하고 싶었던 사실을 바라보는 '리'와 '버키'의 시선이다. 그들은 연민과 동정을 가진 채 그녀의 오디션 장면을 바라보지만 실상 이는 외설적 시선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흑백 필름 너머로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처참히 훼손된 사체를 바라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한편에서는 연민을 다른 한 편에서는 참혹한 분노를 드러내지만 그녀가 이 격렬한 감정의 스펙트럼 한가운데, 외설적 시선 앞에 놓여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녀가 외설적 시선의 대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결국 그녀가 찍은 포르노영화를 통해 입증된다. '드 팔마'는 영화적 장치를 통해 우회적으로 즐겼던 관음증의 욕망을 포르노그래피라는 형식을 통해 발가벗긴다. 이에 당혹감을 느끼는 '버키'와 '리'의 시선은 곧 관객의 그것이다. 필름 속에서 관객을 직시하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은 우리의 관음증이 들켜버렸다는 낙인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버키'가 '케이'를 차지하는 것이 결론인 듯 막을 내린다. 엄청난 도착적 외설을 앓고 있는 '매기' 집안을 침범한 그는 자백을 받아내듯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두 파헤치자마자 '케이'의 품으로 간다. 흥미로운 것은 '케이'를 선택하기 직전 '버키'가 사체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환기한다는 것이다. 부패한 상류층 집안과 달리 건실해 보였던 '버키'의 행위는 사체의 이미지에 포획됐던 한 남자의 수사극으로 귀결된다. 수사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 마지막 장면의 사체는 의 정서적 긴장을 사체의 이미지에 일축시킨다. 한 번도 제대로 전시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쇼트의 시체가 드디어 스크린 전면에 전폭적으로 등장하는 셈이다.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눈시울을 적시던 그녀의 시선이 관객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는 범죄의 심리에 관객을 끌어들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관객의 윤리에 흠집을 낸다. 1940년대의 사회상, 비리, 상류층의 패덕과 같은 이성적 질문들은 실상 이 영화의 하위 서사이자 주제에 불과하다. 이미지에 사로잡힌 자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 관음증에 대한 끈질긴 질문과 심문, 그것이 바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