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 오긍(吳兢)이 지은 저서로, 당나라 이후 중국의 역대 왕실에서 모든 제왕들이 통치 철학으로 삼아 왔다.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송(宋)·금(金)·원(元)·명(明)·청(淸) 등 중국 역대 왕실이 비장(秘藏)해왔던 동양 제왕학의 압권이다.
고려(高麗)를 중흥시킨 광종(光宗)도 등극하여 항상 '정관정요'를 옆에 놓고 상독(尙讀)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은 이 책에서 일본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통치술을 터득했다.
이것은 단순한 봉건 시대의 제왕학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진정한 민의(民意)를 수렴할 줄 아는 지도자상의 조건을 일깨워 줄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물론 각종 단체, 회사, 조직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지침서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란 어떤 책인가?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시행한 정치의 언행을 기록한 것 중에서, 태종이 죽은 지 약 50년이 지난 후에 오긍(吳兢)이란 역사가가 후세에 규범이 될 만한 내용을 엮어서 10권 40편으로 편찬한 책이다.
당나라 태종은 중국사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손꼽을 만한 대정치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서양사가 암흑 시대였던 서기 600년에, 중국 대륙에서 한(漢)나라 이래 5백여 년에 걸친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3백여 년의 기초를 쌓은 인물이다. 당나라가 번성했을 때는
중국 고유의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웅대한 세계적 대제국으로서 널리 외래 문화를 섭취하고 동화시켜 국제적인 종합 문화를 형성했다. 그래서 동양 제국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우리 나라에는 찬란한 신라 문화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며, 일본의 경우는 나라〔奈良〕와 헤이안〔平安〕 문화의 개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정관(貞觀)이란 태종의 연호(年號)로 역사적으로는 서기 627 649년에 해당한다. 이후 후세 사가들은 태종의 치세 기간을 '정관의 치〔貞觀之治〕'라는 술어로써 찬미하고 있다. 당태종은 24년간 제위(帝位)에 있었는데, 이 때가 바로 당나라의 기틀을 잡은 시기로, 그는 총명신무(聰明神武)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훌륭한 군주로 기록되고 있다.
수(隋)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 군웅할거하던 틈바구니에서 이를 평정한 군사적 전략의 뛰어남은 물론, 제위에 있은 동안 행한 뛰어난 관리 제도의 확립과 인재 등용 정책으로 이름이 높다.
특히,*간의대부에 위징(魏徵)을 임명하여
역사상 많은 공적을 세운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諫議大夫:황제의 과오를 지적하고 정치의 득실을 따지는 직책)
위징에게 기탄없는 간언을 듣고 서슴없이 이를 수렴한 일은 당시 군주제의 절대주의 사회에서 보기 드문 지배자의 현명함이라 평가할 만하다.
태종은 신선 따위에 대한 이론이나 주장에 대해서는 부질없는 일이라 여겨 배격했다. 따라서 진시황(秦始皇)이나 한무제(漢武帝)가 이를 신봉했던 사실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철저히 유학의 통치이념에 입각해서
치국의 방침을 굳히고,
학문적 소양이 높고 정치의 본질을 아는 자가 국사를 맡도록 했다. 이런 태종의 면모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는 즉위 초기에 수나라의 신하로서 시역(弑逆)에 가담했던 신하를 죄인으로 다스린 일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 싸웠던 상대편 나라의 임금에게 반기를 든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대해 주어야 한다고 볼 수 있으나, 태종은 군신의 길을 보다 튼튼히 다진다는 뜻에서 그를 벌하였다.
당태종은 초기에 학자들에게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제정하게 하여 학교의 교과서로 삼게 했다. 당시는 유학의 경전이었던
'오경'까지 필사본으로 나돌았기 때문에 오자나 탈자가 많아 이를 바로잡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궁녀 *3천을 방귀(放歸)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백성에게 벌 주는 일을 극력 금했다.
* 역사서에 흔히 3천이란 숫자가 나오는데
이는 많다는 뜻이지 반드시 3천이란 수를 뜻하지 않는다 *
물론 태종이라고 해서 실수가 없지는 않다. 우리 나라와는 특히 고구려 정벌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만나게 되는데,
당시 그는 이 정벌의 실패로 깊은 회오에 빠지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렇게도 깊이 신뢰했던 위징을 불신해서, 이미 죽은 위징의 묘비를 철거했다가 다시 세워 주었다고 전한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는 당태종의 모습은 절대 군주로서의 절대권만 휘두르는 천자의 상이 아니라 스스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면 언제든 고칠 줄 아는 민주적인 지도자상으로 나타난다.
태종의 모습은
위엄 있고 엄숙하며 신하에게 두려움을 주는 동시에,
항상 따뜻한 인상을 담고 있어
누구나 기탄없이 진언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고 전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군주나 지도자들처럼 당태종 역시 그 자신도 걸출했지만, 그를 보다 훌륭하게 평가하도록 만든 것은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훌륭하고 명철하더라도 교만하고 의심이 많으며
독선적이라서 신하를 골라 등용하지 않거나 훌륭한 신하의 말을 수렴하지 못한 경우는 도리어 폭군이 되버린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직간을 수렴하는 군주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이런 풍토는 요즘처럼 평등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크게는 국가 전체, 작게는 사회적인 지도급 인사나 작은 회사 및 조직에 이르기까지 이런 직간 기피 현상은 만연하기 쉽다.
위인이란 이런 직간 기피증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닌가 할 만큼 남의 훌륭한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 '정관정요'는 바로 이런 당태종의 장점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명저다.
우리는 이 '정관정요'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십 수 세기가 지나고 이미 가치관과 정치 체제와 경제 구조가 바뀐 오늘날, 봉건주의 시대의 왕정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인간은 함께 살아가게 되어 있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는 필수 불가결하게 서로 협동하고 조화를 이루는 일이 필요하다.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도 편달이 뒤따르게 된다.
어떤 이상 사회를 상정하더라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최고 극치라는 오늘의 서구 선진 사회에서도 리더쉽은 항상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 인간의 리더쉽이란 교묘하게도 봉건 사회 때의 원리와 그 근본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인간에게 행복과 자유와 사는 보람을 제공해 주는 것이 유사 이래 정치가 지닌 지고의 사명임은 봉건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나 다를 바 없다. 물론 논자에 따라서는 봉건 사회에서 무슨 자유가 필요했으며, 어떻게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봉건 사회 나름대로의 제한된 자유와 인권은 역시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관정요'는 당태종이 단순히 현명한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릇된 신하들을 바로잡아 주었으며 이를 고쳐 국가에 유용한 인재가 되도록 만들었는가도 함께 보여 준다.
당태종의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을 보면 인간은 역시 불평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법률 앞에서는 물론 평등하며, 또 그래야 하지만 인간의 능력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능력 자체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자유와 평등이 요구되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지도자가 나오게 되고, 지도자는 자연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게 된다. 인류사에서 뛰어난 정신적 혹은 정치적 지도자상은
이래서 나타나며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관정요'의 위대성은 당시 민의를 골고루 수렴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인재 등용의 비결과 등용한 인재들의 의견을 어떻게 수용하여 집행했으며, 또한 그릇된 신하들을 어떻게 올바로 잡아 나갔느냐는 지도자적 자질을 함양시키는 기능까지 겸하고 있기에 역사적인 명저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 책을 편찬한 오긍(吳兢)은 당나라 중종(中宗) 현종(玄宗) 시대의 사관(史官)으로 현종 천보(天寶) 8년(749년) 80여 세로 죽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책을 편찬한 시기는 당태종 시대와는 40 50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당나라 '사통(史通)'의 저자인 유지기(劉知幾)와 함께 당시 일류 사가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무후실록(武后實錄)'을 편찬할 때는 곡필아세하지 않은 자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재상이 된 장열(張說)이 '무후실록'에서 자신의 행위를
고치라고 압력을 가했는데 거절하여
후세 사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오긍의 사가로서 갖추고 있던 면모는, 이 책에서 당태종의 장점만 아니라 단점까지 적나라하게 밝힌 점으로도 능히 알 수 있다.
그가 왜 '정관정요'를 썼는가에 대한 추측은, 당시 당나라의 국가적 위기와 이를 극복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자 하는 충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영휘(永徽) 6년(655년)에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왕이 만년에 중풍으로 눕게 되자 모든 정치를 결재하다가 고종이 죽자 어린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번갈아 천자로 삼으며 전횡했다.
그것도 모자라 결국 모든 집권 지향적인 인간상이 그렇듯이, 사성(嗣聖) 7년(690년)에 측천무후 스스로 제위를 계승하여 나라 이름을 주(周)로 고치기에 이른다.
당나라 종실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그에게 저항 세력이 잇달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무씨 일족에 의한 전제 정치가 극성을 떨치기에 이르렀고, 당나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희대의 이 여성 전제자 측천무후도 노후의 병약함은 어쩌지 못했다. 이 틈을 이용해서 재상 장간지(張柬之)가 중종을 복위시켜 당나라의 왕조를 회복시키기에 이르렀고, 사학자 오긍은 이를 다행으로 여겨 이 책을 편찬하게 되었다.
오긍은 일찍부터 사관(史館)에 들어갔기 때문에 태종이 국가의 기초와 백년의 근본을 쌓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으며,
인재 등용과 민심 수렴, 탁월한 지도자적 풍모 등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긍은 당나라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
그런 정치 철학이 절실하다고 믿었다.
복위한 중종을 위해 당나라의 재건과 중흥을 위한 정치 철학과 비결을 알려 주고자 만들어진 셈이다.
역사란 이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훌륭한 저술로
중종에게 당나라 재건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려 했던 오긍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지도자적 역량을 구비하지 못한 왕으로서 황후 위씨(韋氏)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고, 급기야 위씨 일족의 전횡을 가져 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훌륭한 이론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나야 빛을 발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감지할 수 있다. 한 사학자의 간절한 꿈을 저버린 중종은 그 범용함 때문에 결국 황후 일족에게 시해당하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고, 이런 훌륭한 이론이 다시 빛을 보기 위해서는 보다 뛰어난 지도자를 기다려야만 했다.
현종(玄宗) 때에 이르러 원건요(源乾曜)와 장가정(張嘉貞) 두 관료에 의해 이 책은 재평가 받았고 다시 개편되어 왕에게 바쳐졌다. 이래서 '정관정요'는 처음 중종에게 바쳐진 초진본(初進本)과 현종에게 올려진 재진본(再進本)의 2가지가 있다는
추론이 나오게 된다.
'정관정요'는 중국 대륙이 낳은 문화의 축적을 바탕삼아 당나라 초기의 정치 철학을 중핵으로 한, 동양 문화의 한 정점인 동시에 세계적인 정치 전략의 명저다. 역사적인 사료로서의 가치만 아니라 지도자의 인간 형성에 필수 불가결한 교양서이기도 하다.
동양에서 정치적인 이상 세계를 그린 '서경(書經)'이나 '대학(大學)'을 비롯한 유학 사상을 대표하는 많은 경전들은 대개 너무 간략하고 교훈 위주로 기술되 있어 일반인이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이에 비하면 '정관정요'는 정치학 이론서라기보다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흥미와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정치적 실천의 지침서이기도 한 이 책은 당나라 때만 해도 헌종(憲宗)과 문종(文宗)이 애독했으며, 선종(宣宗) 때는 병풍에 써서 읽었다.
이후
송(宋)나라 인종(仁宗)과 요(遼)나라 흥종(興宗) 등이 애독했으며, 금(金)나라 세종(世宗)은 각본으로 펴내 권장했고,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애독했고, 명(明)나라 헌종(憲宗)이 또 간각(刊刻)했으며, 신종(神宗)도 애독했고, 청(淸)나라 고종(高宗) 역시 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이 책은
편찬 이후 역대 중국 왕조에서 꾸준히 애독되고 간행되어 온 유명한 통치술의 비결집이라 하겠다.
이 책은 비단 중국 역대 왕조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유학자들은 물론이고 덕천가강(德川家康) 같은 인물이
애독하면서 정치행사나 난제가 있을 때마다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민 문학에까지도 침투한 이 책은 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덕천가강이다.
그는 1593년 이 책으로 강의를 시켰는가 하면 1,600년엔 이 책을 개방해서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일본은 통일이 이루어진 시대로 덕천가강은 이런 역사적인 시점에서 학문의 보급, 그 중 특히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치세의 연구가
시급함을 느껴 그렇게 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어느 명저나 마찬가지로 '정관정요'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는 물론 있다. 아니 이 책에 대해서라기보다
당태종에 대한 비난이라 할 수 있는데, 예컨대 그가 수(隋)나라 말기에 아버지 이연(李淵)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나, 형제를 죽인 일 등이
비난의 대상으로 지적된다. 당태종이 인륜을 거슬린 지도자란 비난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온 결과이다.
당태종의 일화 중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죄수들을 시찰하던 중 사형수들이 너무 가여워서
집으로 돌려보낸 후, 다음해 가을에 돌아와 사형 집행에 응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사형수에게 똑같은 처분을 내렸는데 당시 사형수는 총 3백 90명이었으며 이듬해 가을이 되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백거이(白居易)는
'칠덕무(七德舞)'란 글에서 이 일화를 찬미했는데, 반면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는 '종수론(縱囚論)'에서 비록 이는 미담이긴 하나 잘못된 처사라고 비난했다.
당태종이 아버지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든가 형제를 죽인 사실을 보다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입장도 가능하다.
수양제(隋煬帝)는
남북으로 분열된 중국 대륙을 통일시킨 공로는 위대하지만, 역사상 위업을 이룬 왕들의 말로와 비슷하게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과 누각을 짓고 이궁(離宮)과
별궁을 쌓으며 운하를 파는 대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키면서도 한편으론 정벌에 전념하여 민심이 날로 흉흉해졌다.
특히 3차에 걸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이를 기화로 각지에서 반란이 계속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반란 지도자들은 무려 1백 30여 명이나 되어 대륙 중국은 다시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이연의 둘째아들 세민(世民)은 18세 소년이었으나 아버지가 진양(晉陽)에서 거병하도록 돕고, 각지의 반란군들을 격파하여 중국 통일에 이바지했다.
뛰어난 용병술과 출중한 지략으로 이세민은 군웅할거하던 혼란을 수습하여 일약 영웅으로 부각, 감히 필적할 상대가 없었다.
이렇게 천하통일의 대공을 세웠기 때문에, 고조(高祖:李淵)가 장자 건성(建成)을
당연히 황태자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세민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으며
급기야 형제간의 불화로 비화되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그는 형과 아우를 죽이게 된다.
역사에서 가정은 필요 없지만
만약 이 때 이세민이 왕권을 잡지 못했다면 아마 중국 대륙은 다시 분열과 군웅할거의 대혼란 시대로 접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역사란 결과에 대한 가치 평가이기 때문에 당태종이 중국 대륙을 평정하고 민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바로잡아 나갔다는 사실은 그가 저지른 비인도적인 사실들을 옹호할 수 있게 해 준다.
만약 그가 집권 후 방탕과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 중국을 다시 혼란으로 몰고 갔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달라질 것이다.
역사와 정치란 실습장이 아니라 바로 냉엄한 현실 그 자차의 발전 형태이기 때문이다.
구양수의 비판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논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당태종이 사형수들을 잠시 풀어 준 것은 완전한 석방이 아니라 그 가련함 때문에 일시 인자한 마음으로 여유를 보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몇몇 다른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의 위대함과 그 행적을 기록한 '정관정요'의 교훈은 폄하되지 않는다.
청(淸)나라 고종 건륭제(高宗乾隆帝)는 총명하고 배우기 좋아하며 치세에 능했는데 항상 '정관정요'를 애독하며 당태종을 칭송했다고 전한다. '독정관정요(讀貞觀政要)'란 시를 지었는가 하면 '정관정요서(貞觀政要序)'란 글도 썼을 만큼 이 책을 아꼈다. '당태종론(唐太宗論)'까지 지어
당태종의 위대성을 이해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의 창업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광종(光宗제4대왕)이 등극 초부터 '정관정요'를 옆에 놓고 상독(常讀)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정관정요'는 비록 군주의 지도자적 품성을 다듬는 것을 목적으로 정리됐지만 오늘과 같은 민주 사회에서 지도자상의 수련이나 연마에도
직결되며, 민심의 소재 파악이나 위민 정책의 근본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인간 사회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각종 단체나 조직, 회사 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상 연마에도 도움이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관정요(貞觀政要)
개 요
당(唐)나라 오긍(吳兢)이 지은 저서로,
당나라 이후 중국의 역대 왕실에서 모든 제왕들이
통치 철학으로 삼아 왔다.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송(宋)·금(金)·원(元)·명(明)·청(淸) 등
중국 역대 왕실이 비장(秘藏)해왔던 동양 제왕학의 압권이다.
고려(高麗)를 중흥시킨 광종(光宗)도 등극하여
항상 '정관정요'를 옆에 놓고 상독(尙讀)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은
이 책에서 일본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통치술을 터득했다.
이것은 단순한 봉건 시대의 제왕학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진정한 민의(民意)를 수렴할 줄 아는
지도자상의 조건을 일깨워 줄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물론 각종 단체, 회사, 조직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지침서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란 어떤 책인가?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시행한 정치의 언행을 기록한 것 중에서,
태종이 죽은 지 약 50년이 지난 후에
오긍(吳兢)이란 역사가가 후세에 규범이 될 만한 내용을 엮어서
10권 40편으로 편찬한 책이다.
당나라 태종은
중국사 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손꼽을 만한
대정치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서양사가 암흑 시대였던 서기 600년에,
중국 대륙에서 한(漢)나라 이래 5백여 년에 걸친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3백여 년의 기초를 쌓은 인물이다.
당나라가 번성했을 때는
중국 고유의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웅대한 세계적 대제국으로서 널리 외래 문화를 섭취하고 동화시켜
국제적인 종합 문화를 형성했다.
그래서 동양 제국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우리 나라에는 찬란한 신라 문화에 끼친 영향이 심대하며,
일본의 경우는 나라〔奈良〕와 헤이안〔平安〕 문화의 개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정관(貞觀)이란 태종의 연호(年號)로
역사적으로는 서기 627 649년에 해당한다.
이후 후세 사가들은 태종의 치세 기간을
'정관의 치〔貞觀之治〕'라는 술어로써 찬미하고 있다.
당태종은 24년간 제위(帝位)에 있었는데,
이 때가 바로 당나라의 기틀을 잡은 시기로,
그는 총명신무(聰明神武)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훌륭한 군주로 기록되고 있다.
수(隋)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 군웅할거하던 틈바구니에서
이를 평정한 군사적 전략의 뛰어남은 물론,
제위에 있은 동안 행한 뛰어난 관리 제도의 확립과
인재 등용 정책으로 이름이 높다.
특히,*간의대부에 위징(魏徵)을 임명하여
역사상 많은 공적을 세운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諫議大夫:황제의 과오를 지적하고 정치의 득실을 따지는 직책)
위징에게 기탄없는 간언을 듣고 서슴없이 이를 수렴한 일은
당시 군주제의 절대주의 사회에서 보기 드문
지배자의 현명함이라 평가할 만하다.
태종은 신선 따위에 대한 이론이나 주장에 대해서는
부질없는 일이라 여겨 배격했다.
따라서 진시황(秦始皇)이나 한무제(漢武帝)가
이를 신봉했던 사실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철저히 유학의 통치이념에 입각해서
치국의 방침을 굳히고,
학문적 소양이 높고 정치의 본질을 아는 자가 국사를 맡도록 했다.
이런 태종의 면모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는
즉위 초기에 수나라의 신하로서 시역(弑逆)에 가담했던 신하를
죄인으로 다스린 일을 들 수 있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 싸웠던 상대편 나라의 임금에게 반기를 든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대해 주어야 한다고 볼 수 있으나,
태종은 군신의 길을 보다 튼튼히 다진다는 뜻에서 그를 벌하였다.
당태종은 초기에 학자들에게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제정하게 하여 학교의 교과서로 삼게 했다.
당시는 유학의 경전이었던
'오경'까지 필사본으로 나돌았기 때문에
오자나 탈자가 많아 이를 바로잡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그는 또한 궁녀 *3천을 방귀(放歸)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백성에게 벌 주는 일을 극력 금했다.
* 역사서에 흔히 3천이란 숫자가 나오는데
이는 많다는 뜻이지 반드시 3천이란 수를 뜻하지 않는다 *
물론 태종이라고 해서 실수가 없지는 않다.
우리 나라와는 특히 고구려 정벌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만나게 되는데,
당시 그는 이 정벌의 실패로 깊은 회오에 빠지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렇게도 깊이 신뢰했던 위징을 불신해서,
이미 죽은 위징의 묘비를 철거했다가 다시 세워 주었다고 전한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는 당태종의 모습은
절대 군주로서의 절대권만 휘두르는 천자의 상이 아니라
스스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면 언제든 고칠 줄 아는
민주적인 지도자상으로 나타난다.
태종의 모습은
위엄 있고 엄숙하며 신하에게 두려움을 주는 동시에,
항상 따뜻한 인상을 담고 있어
누구나 기탄없이 진언할 수 있도록
유인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고 전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한 군주나 지도자들처럼
당태종 역시 그 자신도 걸출했지만,
그를 보다 훌륭하게 평가하도록 만든 것은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훌륭하고 명철하더라도 교만하고 의심이 많으며
독선적이라서 신하를 골라 등용하지 않거나
훌륭한 신하의 말을 수렴하지 못한 경우는
도리어 폭군이 되버린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직간을 수렴하는 군주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이런 풍토는
요즘처럼 평등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크게는 국가 전체, 작게는 사회적인 지도급 인사나
작은 회사 및 조직에 이르기까지 이런 직간 기피 현상은
만연하기 쉽다.
위인이란 이런 직간 기피증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닌가 할 만큼 남의 훌륭한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 '정관정요'는 바로 이런 당태종의 장점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명저다.
우리는 이 '정관정요'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십 수 세기가
지나고 이미 가치관과 정치 체제와 경제 구조가 바뀐 오늘날,
봉건주의 시대의 왕정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인간은 함께 살아가게 되어 있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는
필수 불가결하게 서로 협동하고 조화를 이루는 일이 필요하다.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도 편달이 뒤따르게 된다.
어떤 이상 사회를 상정하더라도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최고 극치라는 오늘의 서구 선진 사회에서도
리더쉽은 항상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 인간의 리더쉽이란 교묘하게도 봉건 사회 때의 원리와
그 근본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인간에게 행복과 자유와 사는 보람을 제공해 주는 것이
유사 이래 정치가 지닌 지고의 사명임은 봉건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나 다를 바 없다.
물론 논자에 따라서는 봉건 사회에서 무슨 자유가 필요했으며,
어떻게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느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봉건 사회 나름대로의 제한된 자유와 인권은
역시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관정요'는 당태종이 단순히
현명한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릇된 신하들을 바로잡아 주었으며 이를 고쳐
국가에 유용한 인재가 되도록 만들었는가도 함께 보여 준다.
당태종의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을 보면
인간은 역시 불평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법률 앞에서는 물론 평등하며,
또 그래야 하지만 인간의 능력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능력 자체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자유와 평등이 요구되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지도자가 나오게 되고,
지도자는 자연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게 된다.
인류사에서 뛰어난 정신적 혹은 정치적 지도자상은
이래서 나타나며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정관정요'의 위대성은
당시 민의를 골고루 수렴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인재 등용의 비결과 등용한 인재들의 의견을
어떻게 수용하여 집행했으며,
또한 그릇된 신하들을 어떻게 올바로 잡아 나갔느냐는
지도자적 자질을 함양시키는 기능까지 겸하고 있기에
역사적인 명저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 책을 편찬한 오긍(吳兢)은
당나라 중종(中宗) 현종(玄宗) 시대의 사관(史官)으로
현종 천보(天寶) 8년(749년) 80여 세로 죽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책을 편찬한 시기는 당태종 시대와는
40 50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당나라 '사통(史通)'의 저자인 유지기(劉知幾)와 함께
당시 일류 사가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무후실록(武后實錄)'을 편찬할 때는
곡필아세하지 않은 자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재상이 된 장열(張說)이 '무후실록'에서 자신의 행위를
고치라고 압력을 가했는데 거절하여
후세 사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오긍의 사가로서 갖추고 있던 면모는,
이 책에서 당태종의 장점만 아니라 단점까지
적나라하게 밝힌 점으로도 능히 알 수 있다.
그가 왜 '정관정요'를 썼는가에 대한 추측은,
당시 당나라의 국가적 위기와 이를 극복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자 하는 충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영휘(永徽) 6년(655년)에 고종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왕이 만년에 중풍으로 눕게 되자 모든 정치를 결재하다가
고종이 죽자 어린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번갈아 천자로 삼으며 전횡했다.
그것도 모자라 결국 모든 집권 지향적인 인간상이 그렇듯이,
사성(嗣聖) 7년(690년)에 측천무후 스스로 제위를 계승하여
나라 이름을 주(周)로 고치기에 이른다.
당나라 종실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그에게 저항 세력이 잇달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무씨 일족에 의한 전제 정치가
극성을 떨치기에 이르렀고, 당나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희대의 이 여성 전제자 측천무후도 노후의 병약함은
어쩌지 못했다.
이 틈을 이용해서 재상 장간지(張柬之)가 중종을 복위시켜
당나라의 왕조를 회복시키기에 이르렀고,
사학자 오긍은 이를 다행으로 여겨 이 책을 편찬하게 되었다.
오긍은 일찍부터 사관(史館)에 들어갔기 때문에
태종이 국가의 기초와 백년의 근본을 쌓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으며,
인재 등용과 민심 수렴, 탁월한 지도자적 풍모 등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긍은 당나라의 부흥과 재건을 위해
그런 정치 철학이 절실하다고 믿었다.
복위한 중종을 위해 당나라의 재건과 중흥을 위한
정치 철학과 비결을 알려 주고자 만들어진 셈이다.
역사란 이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훌륭한 저술로
중종에게 당나라 재건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려 했던
오긍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지도자적 역량을 구비하지 못한 왕으로서
황후 위씨(韋氏)의 말에만 귀를 기울였고,
급기야 위씨 일족의 전횡을 가져 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훌륭한 이론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지도자를 만나야 빛을 발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감지할 수 있다.
한 사학자의 간절한 꿈을 저버린 중종은
그 범용함 때문에 결국 황후 일족에게 시해당하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고, 이런 훌륭한 이론이 다시 빛을 보기 위해서는
보다 뛰어난 지도자를 기다려야만 했다.
현종(玄宗) 때에 이르러
원건요(源乾曜)와 장가정(張嘉貞) 두 관료에 의해
이 책은 재평가 받았고 다시 개편되어 왕에게 바쳐졌다.
이래서 '정관정요'는 처음 중종에게 바쳐진 초진본(初進本)과
현종에게 올려진 재진본(再進本)의 2가지가 있다는
추론이 나오게 된다.
'정관정요'는 중국 대륙이 낳은 문화의 축적을 바탕삼아
당나라 초기의 정치 철학을 중핵으로 한,
동양 문화의 한 정점인 동시에 세계적인 정치 전략의 명저다.
역사적인 사료로서의 가치만 아니라
지도자의 인간 형성에 필수 불가결한 교양서이기도 하다.
동양에서 정치적인 이상 세계를 그린
'서경(書經)'이나 '대학(大學)'을 비롯한
유학 사상을 대표하는 많은 경전들은
대개 너무 간략하고 교훈 위주로 기술되 있어
일반인이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이에 비하면 '정관정요'는
정치학 이론서라기보다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흥미와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정치적 실천의 지침서이기도 한 이 책은
당나라 때만 해도 헌종(憲宗)과 문종(文宗)이 애독했으며,
선종(宣宗) 때는 병풍에 써서 읽었다.
이후
송(宋)나라 인종(仁宗)과 요(遼)나라 흥종(興宗) 등이 애독했으며,
금(金)나라 세종(世宗)은 각본으로 펴내 권장했고,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애독했고,
명(明)나라 헌종(憲宗)이 또 간각(刊刻)했으며,
신종(神宗)도 애독했고,
청(淸)나라 고종(高宗) 역시 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이 책은
편찬 이후 역대 중국 왕조에서 꾸준히 애독되고 간행되어
온 유명한 통치술의 비결집이라 하겠다.
이 책은 비단 중국 역대 왕조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유학자들은 물론이고 덕천가강(德川家康) 같은 인물이
애독하면서 정치행사나 난제가 있을 때마다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민 문학에까지도 침투한 이 책은
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은 덕천가강이다.
그는 1593년 이 책으로 강의를 시켰는가 하면
1,600년엔 이 책을 개방해서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일본은 통일이 이루어진 시대로
덕천가강은 이런 역사적인 시점에서 학문의 보급,
그 중 특히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치세의 연구가
시급함을 느껴 그렇게 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어느 명저나 마찬가지로
'정관정요'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는 물론 있다.
아니 이 책에 대해서라기보다
당태종에 대한 비난이라 할 수 있는데,
예컨대 그가 수(隋)나라 말기에 아버지 이연(李淵)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나, 형제를 죽인 일 등이
비난의 대상으로 지적된다.
당태종이 인륜을 거슬린 지도자란 비난은
바로 이런 데서 나온 결과이다.
당태종의 일화 중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죄수들을 시찰하던 중 사형수들이 너무 가여워서
집으로 돌려보낸 후,
다음해 가을에 돌아와 사형 집행에 응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사형수에게 똑같은 처분을 내렸는데
당시 사형수는 총 3백 90명이었으며 이듬해 가을이 되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백거이(白居易)는
'칠덕무(七德舞)'란 글에서 이 일화를 찬미했는데,
반면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는 '종수론(縱囚論)'에서
비록 이는 미담이긴 하나 잘못된 처사라고 비난했다.
당태종이 아버지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든가
형제를 죽인 사실을 보다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입장도 가능하다.
수양제(隋煬帝)는
남북으로 분열된 중국 대륙을 통일시킨 공로는 위대하지만,
역사상 위업을 이룬 왕들의 말로와 비슷하게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과 누각을 짓고 이궁(離宮)과
별궁을 쌓으며 운하를 파는 대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키면서도
한편으론 정벌에 전념하여 민심이 날로 흉흉해졌다.
특히 3차에 걸친 고구려 정벌은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이를 기화로 각지에서 반란이 계속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반란 지도자들은 무려 1백 30여 명이나 되어 대륙 중국은
다시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이연의 둘째아들 세민(世民)은 18세 소년이었으나
아버지가 진양(晉陽)에서 거병하도록 돕고,
각지의 반란군들을 격파하여 중국 통일에 이바지했다.
뛰어난 용병술과 출중한 지략으로
이세민은 군웅할거하던 혼란을 수습하여 일약 영웅으로 부각,
감히 필적할 상대가 없었다.
이렇게 천하통일의 대공을 세웠기 때문에,
고조(高祖:李淵)가 장자 건성(建成)을
당연히 황태자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세민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으며
급기야 형제간의 불화로 비화되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그는 형과 아우를 죽이게 된다.
역사에서 가정은 필요 없지만
만약 이 때 이세민이 왕권을 잡지 못했다면
아마 중국 대륙은 다시 분열과 군웅할거의 대혼란 시대로
접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역사란 결과에 대한 가치 평가이기 때문에
당태종이 중국 대륙을 평정하고 민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바로잡아 나갔다는 사실은
그가 저지른 비인도적인 사실들을 옹호할 수 있게 해 준다.
만약 그가 집권 후 방탕과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
중국을 다시 혼란으로 몰고 갔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달라질 것이다.
역사와 정치란 실습장이 아니라
바로 냉엄한 현실 그 자차의 발전 형태이기 때문이다.
구양수의 비판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논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당태종이 사형수들을 잠시 풀어 준 것은
완전한 석방이 아니라 그 가련함 때문에
일시 인자한 마음으로 여유를 보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몇몇 다른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의 위대함과 그 행적을 기록한
'정관정요'의 교훈은 폄하되지 않는다.
청(淸)나라 고종 건륭제(高宗乾隆帝)는
총명하고 배우기 좋아하며 치세에 능했는데
항상 '정관정요'를 애독하며 당태종을 칭송했다고 전한다.
'독정관정요(讀貞觀政要)'란 시를 지었는가 하면
'정관정요서(貞觀政要序)'란 글도 썼을 만큼 이 책을 아꼈다.
'당태종론(唐太宗論)'까지 지어
당태종의 위대성을 이해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의 창업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광종(光宗제4대왕)이 등극 초부터
'정관정요'를 옆에 놓고 상독(常讀)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정관정요'는
비록 군주의 지도자적 품성을 다듬는 것을 목적으로 정리됐지만
오늘과 같은 민주 사회에서 지도자상의 수련이나 연마에도
직결되며, 민심의 소재 파악이나 위민 정책의 근본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인간 사회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각종 단체나 조직, 회사 등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상 연마에도
도움이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출처] 2008년 읽어야 할 고전----정관정요(貞觀政要)|
작성자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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