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파이언스-왜 인류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가.

민희웅200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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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일이 가능해?’라고 질문이 들 정도의 드라마틱한 삶들이 있다. 약간의 각색을 거쳤다고 해서 영화화되고 소설화되기는 하지만 원작, 즉 현실이 만들어낸 어이없고 믿을 수 없는 현실들에 대하여 종종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한다. 당시의 고통을 겪었던 이들에게는 할말이 없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런 역경의 삶은, 소재거리를 찾아 헤매는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저녁식사전 말하는 그날의 감사거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을 살육을 피해 마치 우리나라의 빨치산을 연상케 하는 듯한 유대인들의 약 4년여간의 산속생활은 어떻게 이제야 이런 일이 이제야 영화화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적이며, 또 교훈적이다.

‘쉰들러 리스트’의 대박 이후 이와 유사한 작품이 나올 때 우리는 ‘쉰들러보다 많이 구했데?’라는 비교급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일부 측정한다. 아프리카의 내전의 참상을 그렸던 ‘호텔 르완다’ 그리고 정확히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2차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한 조계지에서 무수한 이를 구했던 역사적 인물을 다뤘던 영화 관련 소개에서도 다른 것은 머릿속에서 사라졌지만 그러나 그가 몇 명을 구했냐는 식의 홍보성 기사는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그러한 인간의 심리를 꽤 뚫어 본 오늘의 홍보성 기사에서도 1000명이 넘는 투비아가 구한 사람의 수와 그리고 가로열고 이는 쉰들러가 구한 사람보다도 많다라는 친절한 설명을 잊지 않는다.

주인공 투비아는 그의 부모를 살해한 경찰 간부를 복수한 이후에 찾아온 살인에 대한 자책감으로 총과 폭력을 살아남기위한 최소한의 도구로 취급한다. ‘디파이언스(defiance)’의 뜻에 저항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무시’라는 뜻이 공존하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투비아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이야기는 브레이브 하트식의 압제자에 대한 적극적인 항쟁이라기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저항이라는 ‘서바이벌’식의 설법이다. 그런데 영화 속 화면은 살아남는 것이 ‘단지’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간단한 일이 아님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때마침 서울을 강타한 혹한기 대비훈련 코스프레 같은 극장 밖 추위는 단지 차가운 겨울 만으로도 유대인들이 애지중지하는 선민사상이 흔들리는 화면 속 풍경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없는 사람에겐 겨울만큼 잔인한 계절이 없다라는 우리 어머니의 말씀은 현실에 바탕을 둔,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실이다.

뻔하디 뻔한 결말에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마지막으로 나오는 실존인물들의 사진과 근황은 왜 그토록 살아있으라고 우리의 제임스 본드가 주장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강인한 외모와 탁월한 마초이즘의 상징과 같은 백마 탄 그의 리더쉽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어딘지 모르는 그늘진 모습은 옆에서 같이 보던 이의 말처럼 ‘아픈 모습마저 멋져’라고 할만큼 잘나보이진 않았지만 그러나 그에게 007의 후광 따위가 없어도 자체발광의 능력이 충분하다 것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건 이 시대의 표현대로 그에겐 분명 이 무서운 시대를 살아가는데 중요한 경쟁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얘기’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불편한 것에 대하여 “그래. 또 홀로코스트 얘기다.”라고 지적한다면 그건 일부 맞는 얘기다. 미국의 멈출 수 없는 유대인에 대한 애정공세 결핍증은 헐리우드에도 그대로 이어져 벤허이래로 무수히 많은 유대인과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를 만들어냈다. 마구잡이로 양산했다고 몰아세울 만큼의 수량은 아니지만 그러나 결코 중단되지 않고 말 그대로 잊을만하면 나타나곤 하여 세대가 지나도 시간이 지나도 우리로 하여금 유대인은 희생자라는 메시지를 각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 대한 불편함의 본질적인 이유는 적절치 못한 개봉시점에 있다.
감동적인 이야기와 또 007에서 숲 속의 위대한 지도자로 탈바꿈한 다니엘 크레이그의 좋은 연기가 있었음에도 배급사 입장에선 속이 터질 정도로 요즘의 이스라엘은 전혀 약자로 비쳐지지 않는다. 혈맹이란 말로는 부족할 만큼 ‘베프’인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은 ‘전쟁’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학살을 타민족에게 자행하고 있다.
역사상 어느 도발국의 변명과 동일하게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목을 그들 역시 사용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을 제외한 지구촌 식구들은 도저히 그들이 말하는 하마스의 테러와, 그들이 저지르는 국가적 폭력과 살인에 대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죽어있는 아이의 시체앞에서, 장차 원수가 될 아이니 싹을 잘라버렸다고 차라리 말을 해버린다면 그나마 솔직하다고 평가는 받으련만, 그들은 400대 12의 사망자가 낳은 이 전쟁을 여전히 ‘정의’라고 주장한다. 평화를 위협하는 의미에서 ‘악의 축’이라는 용어가 생겼다면 이스라엘은 자타가 공인하는 중동의 ‘악’인 셈이다.

 

 

 

영화가 결코 후지거나 졸작은 아니지만 그러나 감독이 워낙 잘난 탓에 이 영화가 그만의 역작으로 기억될지는 의문이다. CG나 특수효과 보다는 워낙 자연 그 자체의 풍경을 즐기기를 즐겨 하시는 감독이시다 보니 (가을의 전설, 라스트 사무라이 등을 만드셨던 그분이지) 이 영화에서도 대부분의 배경은 벨로루시의 숲(실제로는 발틱의 리투아니아 숲이다.)으로 한정이 되었다. 젊은 관객들의 구미를 끌고자 몇 몇 전투씬을 삽입했지만 ‘게릴라’라고 말하기에는 비전투원의 압도적인 수가 그랬고, ‘유격대’라는 단어보다는 ‘자경대’라는 표현이 적절해 보였다. (실제로 그들의 ‘전투’에 대하여는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감독은 생존과 또 그 안에서의 갈등을 통하여 단순하게 강자와 약자로 나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나고자 갈등을 묘사했지만 그러나 몇몇의 갈등과 그저 아름다운 자연풍경으로 나에게서 한 번도 시계를 보지 않을 정도의 집중도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만약 감독의 명성을 쫓는다면,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하루빨리 ‘디파이언스 2’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그러한 이야기가 또 있겠냐라는 의구심이 있다면 걱정마라. 지금 가자지구에선 헐리우드에서 영화소재 떨어지지 않게 이스라엘군이 지속적인 소재개발이 한창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