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왕자 - 선화공주`미륵사 설화`깨지다

정오균200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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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자는 왕후인 사택적덕의 딸`문구
미륵사 석탑 해체 발굴과정서 나와
`무왕과 선화공주 사랑의 결정체`설화 흔들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백제 유물 발굴"

서동왕자 - 선화공주`미륵사 설화`깨지다

그동안 선화 공주가 지은 것으로 알려졌던 익산 미륵사가 사실 다른 왕후가 건립한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 서동 왕자와 신라 선화(善花) 공주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 시작됐다던 백제ㆍ신라 간 문화ㆍ기술 교류설도 흔들리게 됐다.

다만 미륵사가 설화 내용처럼 백제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년) 때 당시 왕후가 창건한 것은 확인됐다.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시대의 기해념(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나타났다.

창건 시기와 내력이 설화성 짙은 기록으로만 내려왔던 미륵사 비밀이 한꺼풀 벗겨진 셈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을 해체ㆍ보수하는 과정에서 지난 14일 석탑 1층 심주(心柱)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조성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19일 밝혔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舍利壺)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 관식(冠飾) 등 각종 유물 500여 점이 수습됐다.

◆ `좌평의 딸`이 건립 주체

= 당초 미륵사는 신라 진평왕 셋째 딸인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 왕자가 나중에 왕(제30대 무왕)이 된 뒤에 이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었다고 전해져 왔다.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그의 부인`이 용화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본 후 "여기에 큰 절을 지어 달라"는 부인 말에 따라 절 건축을 시작했다고 적혀 있다. 이 앞 부분에 무왕과 선화공주가 결혼하는 과정을 담은 `서동요` 설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부인`을 선화공주로 보는 의견이 일반적인 속설이었다.

그러나 이번 미륵사지 석탑 해제 과정에서 나온 유물은 다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석탑 사리공에서 나온 금제 사리봉안기는 미륵사 석탑 자체는 물론이고 미륵사라는 사찰 창건 내력을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유물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된 것. 이 구절을 통해 건립 주체였던 왕비가 신라 선화 공주가 아니라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의 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사택`은 당시 백제 8대 귀족가문 성(姓) 중 하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무왕과 선화 공주 이야기를 완전히 허구로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구절이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 또 김봉건 소장은 "당시 무왕이 왕후를 둘 이상 두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선화 공주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금제 사리봉안기 기록 때문에 `무왕과 선화 공주` 설화는 중대한 도전을 맞게 됐다.

서동왕자 - 선화공주`미륵사 설화`깨지다

미륵사지석탑 해체 모습 ◆ 미륵사 백제 독자적 기술

= 또 삼국유사에는 "신라 왕인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국경을 초월한 서동 왕자와 선화 공주 간 결합이 자연스럽게 양국 간 기술 교류로 이어졌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에 미륵사 건립 주체가 선화 공주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백제 최대 탑인 미륵사 석탑이 신라 측 도움을 받지 않고 백제 독자 기술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커졌다. 당시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 간에 전쟁이 빈번했을 정도로 양국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륵사 공사는 현재 남아 있는 절터 크기만 1338만4699㎡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절 안에 세워진 석탑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며 국보 1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문화재이기도 하다.

◆ 백제시대 최고 유물

= 이번 유물을 통해 백제 4급 관리인 `덕솔`이 왕이 주도하는 사리 공양에 참가했음이 밝혀졌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유물 사진 중 금제소형판을 분석한 결과 명문에 " `중부 덕솔이 금덩어리 1개를 바쳤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19일 밝혔다. 이 교수는 "공양 참가자 직위가 있는 기록은 지금까지 없었다"며 "이를 통해 관료 중에서 4급 인물이 사리 공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금제 사리호는 외함을 두 부분으로 나눠 제작해 내부에 소형 사리병을 안치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표면에서도 다양한 문양과 세공(細工) 기법이 드러나 당시 백제 금속공예가 절정에 달했음을 입증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에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각종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된 데다 가공수법 또한 정교하고 세련되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번 발견으로 백제 석탑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가 새롭게 드러나고 더불어 공양품으로 함께 묻힌 은제 관식을 비롯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확인되면서 다른 지역 축조 시점을 판정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연구소는 "이번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 발견은 무령왕릉 발굴과 부여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 고고학적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 `서동요`란

백제의 서동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민요 형식의 노래다.

서동은 백제 무왕의 어린시절 이름이다.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전한다. 즉 무왕이 어릴 때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신라 서울에 와서 마(薯)를 갖고 성 안의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며 이 노래를 지어 그들에게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

내용은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일부에선 당시 전쟁 중이었던 신라 백제 두 나라 관계를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는 설이 제기돼왔다.

[출처] 매일경제 200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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