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대해 많은 것들이 떠도는 인터넷에서 소위 '연애 개념'을 난 신용하지 않거나 그에 대해 냉소적이다.
대개는 몇개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데 연애에 한정할 때 운명, 첫눈에 반한다는 것, 인연, 욕망을 배제한 애정, 헌신, 희생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 중에서 '인연' 이라는 개념에 대한 내 반발심은 꽤 크다.
'인연'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무시하는 무심하고 냉정한 단어다.
내가 그 사람을 가지기 위해 기울인 많은 시간과 노력, 소비해야 했던 심력의 의미가 사라진다.
우리 둘이 어차피 인연이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격지심에 괴로워 해야 했던 그 수많은 새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존심과 비굴함 사이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 뒹굴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패잔병과도 같이 귀환해야 했던 그 밤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해도 될까 어제도 했는데 사실은 그제도 했는데 왜 전화했어요 라는 질문이 너무 두려워 결국 환절기 감기 조심하라는 시덥잖은 문자만을 전송해야 했던 저녁은 무엇이며 오늘은 그 사람의 꿈을 꾸지 못 했다고 밥맛도 나질 않아 굶고 집을 나서야 했던 그 아침은 무엇이란 말인가?
혹자는 인연을 내 것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그 엄청난 노력과 시간, 심력을 기울여야 한다면 그것을 통해 간신히 이루어낸 관계를 왜 인연이라고 뭉뚱그려 간단히 설명해야 할까?
이건 무자비한 축약이다. 편의성 외에는 어떠한 장점도 없다.
만약 내 연인이 내게 '우리는 원래 인연이었나봐' 따위의 말을 건넨다면 그 말에서 엿볼 수 있는 애정에도 불구하고 난 주먹을 쥐고 무릎에 시선을 고정한채 부들부들 떨면서 속으로 외칠 것이다.
'내가 니 미니홈피에서 하얗게 새운 밤이 대체 며칠이나 되는지는 알고 있냐? 그 자식은 누구야?'
물론 인연이라는 말이 '천생연분'과 같이 축하하는데 사용된다면 화를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 말에는 선한 의도는 있어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위로할 때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에휴. 인연이 아니었던게지, 뭐', 물론 이 위로의 의도 역시 선하다. 하지만 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에 담겨있는 종결적인 분위기와 칼날처럼 숨어 있는 의미가 무섭고, 못마땅하다. 그 의미란 이런 것이다.
'너는 지금까지 파자마자 다시 메울 구덩이를 판거야.', 다르게 말하면, '삽질 그만해'.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건 내가 그 말을 핑계로 삼을까봐 겁이 난다는 것이다. 인연이 아니었던게지하고 중얼거리면 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내가 입힌 상처, 내가 배려하지 못했던 시간, 내가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 내가 모른 척 했던 감정들을 떠올리며 자책하는걸 그만둘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별의 책임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
물론 인생의 커다란 아픔과 상실 앞에서 기왕 입은 상처를 후벼파는 짓을 꺼려 하는 자들을 비난할 순 없다. 다만 무언가 이해하지 못할 모호한 제3의 개념에게 나의 이별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내 사랑과 내 이별에서 내 자신이 수동적인 입장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얼마나 편리하고 얼마나 추레한 것인가?
내 이별은 내 탓이었다. 나는 그래서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아파하며 마음껏 자책한다. 내 사랑과 이별의 방식 하에서 '사랑을 놓치다'라는 어느 영화 제목은 우습다.
너와 내가 인연이라니?
연애에 대해 많은 것들이 떠도는 인터넷에서 소위 '연애 개념'을 난 신용하지 않거나 그에 대해 냉소적이다.
대개는 몇개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데 연애에 한정할 때 운명, 첫눈에 반한다는 것, 인연, 욕망을 배제한 애정, 헌신, 희생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 중에서 '인연' 이라는 개념에 대한 내 반발심은 꽤 크다.
'인연'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무시하는 무심하고 냉정한 단어다.
내가 그 사람을 가지기 위해 기울인 많은 시간과 노력, 소비해야 했던 심력의 의미가 사라진다.
우리 둘이 어차피 인연이었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격지심에 괴로워 해야 했던 그 수많은 새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존심과 비굴함 사이에서 진흙투성이가 되어 뒹굴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패잔병과도 같이 귀환해야 했던 그 밤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해도 될까 어제도 했는데 사실은 그제도 했는데 왜 전화했어요 라는 질문이 너무 두려워 결국 환절기 감기 조심하라는 시덥잖은 문자만을 전송해야 했던 저녁은 무엇이며 오늘은 그 사람의 꿈을 꾸지 못 했다고 밥맛도 나질 않아 굶고 집을 나서야 했던 그 아침은 무엇이란 말인가?
혹자는 인연을 내 것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그런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그 엄청난 노력과 시간, 심력을 기울여야 한다면 그것을 통해 간신히 이루어낸 관계를 왜 인연이라고 뭉뚱그려 간단히 설명해야 할까?
이건 무자비한 축약이다. 편의성 외에는 어떠한 장점도 없다.
만약 내 연인이 내게 '우리는 원래 인연이었나봐' 따위의 말을 건넨다면 그 말에서 엿볼 수 있는 애정에도 불구하고 난 주먹을 쥐고 무릎에 시선을 고정한채 부들부들 떨면서 속으로 외칠 것이다.
'내가 니 미니홈피에서 하얗게 새운 밤이 대체 며칠이나 되는지는 알고 있냐? 그 자식은 누구야?'
물론 인연이라는 말이 '천생연분'과 같이 축하하는데 사용된다면 화를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 말에는 선한 의도는 있어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은 위로할 때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에휴. 인연이 아니었던게지, 뭐', 물론 이 위로의 의도 역시 선하다. 하지만 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에 담겨있는 종결적인 분위기와 칼날처럼 숨어 있는 의미가 무섭고, 못마땅하다. 그 의미란 이런 것이다.
'너는 지금까지 파자마자 다시 메울 구덩이를 판거야.', 다르게 말하면, '삽질 그만해'.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건 내가 그 말을 핑계로 삼을까봐 겁이 난다는 것이다. 인연이 아니었던게지하고 중얼거리면 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내가 입힌 상처, 내가 배려하지 못했던 시간, 내가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 내가 모른 척 했던 감정들을 떠올리며 자책하는걸 그만둘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별의 책임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
물론 인생의 커다란 아픔과 상실 앞에서 기왕 입은 상처를 후벼파는 짓을 꺼려 하는 자들을 비난할 순 없다. 다만 무언가 이해하지 못할 모호한 제3의 개념에게 나의 이별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내 사랑과 내 이별에서 내 자신이 수동적인 입장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얼마나 편리하고 얼마나 추레한 것인가?
내 이별은 내 탓이었다. 나는 그래서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아파하며 마음껏 자책한다. 내 사랑과 이별의 방식 하에서 '사랑을 놓치다'라는 어느 영화 제목은 우습다.
사랑을 놓친다는 것은 없다.
사랑을 놓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