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나가 오후에 Tea party에 가겠냐고 했다. 할 일이 많아 약간 머뭇거렸더니 자기는 꼭 가고 싶은데 혼자 못 가겠다, 딱 한 시간만 같이 있다가 오자고 했다. 그래서 결국 같이 출발했는데 장소 입구에 다 와서 그녀가 사실은 Oxford LGB Society라고 해서 내가 실실 웃었다. 처음부터 모임의 성격을 말했으면 망설임 없이 참석했을 텐데 말이다.
호주에서 온 레즈비언 커플과 캐나다 출신 두 명, 남아프리카 출신 한 명, 그리고 나와 앤나까지 여자였고 미국에서 온 남자 한 명이 우리 테이블에 같이 앉았다. 그 중엔 이미 졸업한 의사와 변호사도 한 명씩 있었다. 서양에서는 애인을 보통 partner라고 칭한다. 결혼여부, 동거여부, 게이 레즈비언 여부를 알리지 않으면서도 not available인 것을 말할 때 참 편하다. 우리말로도 그런 개념/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대화 도중에 내가 사실 딸이 하나 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갑자기 내가 인기 만점이 되었다. 모두들 사진이 있냐, 몇 살이냐, 이름이 뭐냐 하면서 눈을 초롱초롱 뜨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한 명이, “애를 누가 낳을 것인가 결정하는데 다툼 같은 것은 없었니?”해서 비로소 내가 그들 사이에 왜 갑자기 인기 만점이 되었는지 알게 됐다. 이들은 내가 당연히 동성애자인 줄 알았고 그래서 온갖 역경을 딛고 딸을 가진 것에 대단히 감복하고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요 시점에서 내가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하나 했다. 대략 3초간 나는, 나의 성 정체성을 밝힐 때 이들이 나를 오해하고 차별하고 미워하지 않을까, 그냥 레즈비언이라고 둘러댈까, 나보고 당장 나가라고 하지 않을까 등등 내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두렵다는 느낌을 가진 것이다. 이 소중한 찰나 동안 많은 동성애자들이 살면서 겪을 매 순간마다의 갈등에 대해서 빠르게 필름이 돌아가듯 그것을 몸소 느꼈던 것 같다.
“Oh, I have a husband. So fortunately the choice was pretty obvious. But I wish we could take turns, hahaha..”라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마치 내가 이성애자인 것이 큰 비밀이었고 잘못인 것 마냥. 내 대답에 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난 보통 내 머리 속이 복잡할 때 상대가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튼, 자연스러운 척 하려고 무진장 애썼던 기억이 있다.
이어서 한 친구가 자기 오빠에게 9개월 된 딸아이 하나가 있다고 했다. 오빠와 그의 남자 파트너는 한 여성에게서 난자를 기증 받았고, 이들 중 한 명의 정자로 수정을 했고, 또 다른 대리모를 통해 마침내 딸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남자 둘이 신생아 때부터 함께 이 딸아이를 키우고 있단다. 그 대리모는 이 게이 커플의 둘째 아이도 임신해주기로 계획되어 있단다. 이런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무척 흥분해서 주책 맞게 질문을 계속 해대는데 법적 관계, 대리모와의 관계, 딸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등등 쏟아지는 내 질문에 상당히 인내력을 발휘하며 모두 친절히 설명해주더라. 그리고 그 호주에서 온 레즈비언 커플도 역시 아이를 무척 갖고 싶어해 둘 중에 누가 낳을지, 누가 일하고 누가 애를 키울지, 어디서 어떻게 정자를 구할지, 일단 반반한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등등 고민이 많더라.
여기서 찰나의 값진 경험을 또 하나 했는데, 이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그러니깐 보통 이성애자들이 갖고 있는 그 흔한 소망들, 가족을 갖고(물론 가족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을 주고 받고, 키우고 싶은 아이를 갖거나, 안정된 직업을 갖는 등 이들은 이성애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들을 원하는 것이다. 그저 소박하고 평범한 소망들을 소망하겠다는데 사회에 이렇게나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양성애자들에게 무작정 우호적인 나도 두 가지의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이들은 잘못된 사람들인가, 즉 악한 존재, 말살 될 존재, 비정상적 존재, 사회악 같은 존재냐 하는 물음이다. 두 번째는 이들은 비정상이고 잘못된 것이다, 그래,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회에서 인정하고 포용하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질문을 정리하고 나니, 답은 상당히 쉽게 도출되었다.
선과 악에 대한 논의는 먼저 악이 실질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가의 여부 혹은 종교적인 윤리 같은 것 등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겠다. 먼저 이들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회의 악 같은 존재들인가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는 증거들이 사실 너무 많다. 동성애자들이 사회질서를 위협했다면 망했을 나라는 이미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동시대적으로 봤을 때 말이다. 게다가 통계적으로 보면, 기발한 아이디어 갖고 사회를 진보 시킨 사람들을 봤을 때 동성애자들의 비율이 높다면, 사회를 망하게 한 리더들은 거의 전부가 이성애자들이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넘쳐났던 고대 아테네나 스파르타 시대도 동성애자들 때문에 그 사회가 망한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근거는 학문적으로도 많이 발달해 동성애자들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사회질서 위협을 근거로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교적으로 봤을 때, 맞다, 성경의 구약에 동성애를 금하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면 일요일에 생계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은 다 지옥 불에 떨어진단 말인가! 구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위험하다. 신약에서 예수의 행보와 철학을 봤을 때 그는 분명히 동성애자들을 끌어 안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는 그 사회의 바닥 중에서도 바닥에 있는 소수자들과 어울렸다. 그러니 선과 악의 논의로 이들을 단죄하는 것은 대단히 철학적이고 고도의 작업이 필요한 매우 힘든 것이다.
두 번째, 이들이 옳은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없지만 이들을 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히 YES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무슨 박멸 대상의 병균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어찌되었건 사람으로써 기본적인 행복은 영위할 수 있도록 그 사회가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 본래부터 정상적으로 동성애자이든, 사회가 변형되어 변태적인 유형으로 동성애자/양성애자가 생겨난 것인 들, 이들은 함께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엄연한 사회의 구성원인 것이다. 만약에 사회 때문에 변형된 유형의 비정상적 성이라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더더욱 사회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차별은 두려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다름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이익 상실에 대한 두려움, 다름을 인정했을 때 그 결과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그런데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확실성과 다름은 아름답기도 한 것이다. 반듯하게 정해진 규칙과 규율에 따라 모든 사람이 예정대로 똑.같.이 사는 것 보다는 풍부하게 넘쳐나는 다양성이 사회를, 문화를, 인류를 그리고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충분히 허용하는 여유가 새로운 차원의 유토피아를 위한 사실 가장 쉽고도 기초적인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동성/양성연애자들의 모임
사랑하는 두 여인. gustav climt.
1월 27일
앤나가 오후에 Tea party에 가겠냐고 했다. 할 일이 많아 약간 머뭇거렸더니 자기는 꼭 가고 싶은데 혼자 못 가겠다, 딱 한 시간만 같이 있다가 오자고 했다. 그래서 결국 같이 출발했는데 장소 입구에 다 와서 그녀가 사실은 Oxford LGB Society라고 해서 내가 실실 웃었다. 처음부터 모임의 성격을 말했으면 망설임 없이 참석했을 텐데 말이다.
호주에서 온 레즈비언 커플과 캐나다 출신 두 명, 남아프리카 출신 한 명, 그리고 나와 앤나까지 여자였고 미국에서 온 남자 한 명이 우리 테이블에 같이 앉았다. 그 중엔 이미 졸업한 의사와 변호사도 한 명씩 있었다. 서양에서는 애인을 보통 partner라고 칭한다. 결혼여부, 동거여부, 게이 레즈비언 여부를 알리지 않으면서도 not available인 것을 말할 때 참 편하다. 우리말로도 그런 개념/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대화 도중에 내가 사실 딸이 하나 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갑자기 내가 인기 만점이 되었다. 모두들 사진이 있냐, 몇 살이냐, 이름이 뭐냐 하면서 눈을 초롱초롱 뜨고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한 명이, “애를 누가 낳을 것인가 결정하는데 다툼 같은 것은 없었니?”해서 비로소 내가 그들 사이에 왜 갑자기 인기 만점이 되었는지 알게 됐다. 이들은 내가 당연히 동성애자인 줄 알았고 그래서 온갖 역경을 딛고 딸을 가진 것에 대단히 감복하고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요 시점에서 내가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하나 했다. 대략 3초간 나는, 나의 성 정체성을 밝힐 때 이들이 나를 오해하고 차별하고 미워하지 않을까, 그냥 레즈비언이라고 둘러댈까, 나보고 당장 나가라고 하지 않을까 등등 내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두렵다는 느낌을 가진 것이다. 이 소중한 찰나 동안 많은 동성애자들이 살면서 겪을 매 순간마다의 갈등에 대해서 빠르게 필름이 돌아가듯 그것을 몸소 느꼈던 것 같다.
“Oh, I have a husband. So fortunately the choice was pretty obvious. But I wish we could take turns, hahaha..”라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마치 내가 이성애자인 것이 큰 비밀이었고 잘못인 것 마냥. 내 대답에 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난 보통 내 머리 속이 복잡할 때 상대가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튼, 자연스러운 척 하려고 무진장 애썼던 기억이 있다.
이어서 한 친구가 자기 오빠에게 9개월 된 딸아이 하나가 있다고 했다. 오빠와 그의 남자 파트너는 한 여성에게서 난자를 기증 받았고, 이들 중 한 명의 정자로 수정을 했고, 또 다른 대리모를 통해 마침내 딸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남자 둘이 신생아 때부터 함께 이 딸아이를 키우고 있단다. 그 대리모는 이 게이 커플의 둘째 아이도 임신해주기로 계획되어 있단다. 이런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무척 흥분해서 주책 맞게 질문을 계속 해대는데 법적 관계, 대리모와의 관계, 딸과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등등 쏟아지는 내 질문에 상당히 인내력을 발휘하며 모두 친절히 설명해주더라. 그리고 그 호주에서 온 레즈비언 커플도 역시 아이를 무척 갖고 싶어해 둘 중에 누가 낳을지, 누가 일하고 누가 애를 키울지, 어디서 어떻게 정자를 구할지, 일단 반반한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등등 고민이 많더라.
여기서 찰나의 값진 경험을 또 하나 했는데, 이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그러니깐 보통 이성애자들이 갖고 있는 그 흔한 소망들, 가족을 갖고(물론 가족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을 주고 받고, 키우고 싶은 아이를 갖거나, 안정된 직업을 갖는 등 이들은 이성애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들을 원하는 것이다. 그저 소박하고 평범한 소망들을 소망하겠다는데 사회에 이렇게나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양성애자들에게 무작정 우호적인 나도 두 가지의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이들은 잘못된 사람들인가, 즉 악한 존재, 말살 될 존재, 비정상적 존재, 사회악 같은 존재냐 하는 물음이다. 두 번째는 이들은 비정상이고 잘못된 것이다, 그래,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회에서 인정하고 포용하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질문을 정리하고 나니, 답은 상당히 쉽게 도출되었다.
선과 악에 대한 논의는 먼저 악이 실질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가의 여부 혹은 종교적인 윤리 같은 것 등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겠다. 먼저 이들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회의 악 같은 존재들인가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는 증거들이 사실 너무 많다. 동성애자들이 사회질서를 위협했다면 망했을 나라는 이미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동시대적으로 봤을 때 말이다. 게다가 통계적으로 보면, 기발한 아이디어 갖고 사회를 진보 시킨 사람들을 봤을 때 동성애자들의 비율이 높다면, 사회를 망하게 한 리더들은 거의 전부가 이성애자들이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넘쳐났던 고대 아테네나 스파르타 시대도 동성애자들 때문에 그 사회가 망한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근거는 학문적으로도 많이 발달해 동성애자들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사회질서 위협을 근거로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교적으로 봤을 때, 맞다, 성경의 구약에 동성애를 금하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면 일요일에 생계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은 다 지옥 불에 떨어진단 말인가! 구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위험하다. 신약에서 예수의 행보와 철학을 봤을 때 그는 분명히 동성애자들을 끌어 안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는 그 사회의 바닥 중에서도 바닥에 있는 소수자들과 어울렸다. 그러니 선과 악의 논의로 이들을 단죄하는 것은 대단히 철학적이고 고도의 작업이 필요한 매우 힘든 것이다.
두 번째, 이들이 옳은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없지만 이들을 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히 YES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무슨 박멸 대상의 병균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어찌되었건 사람으로써 기본적인 행복은 영위할 수 있도록 그 사회가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 본래부터 정상적으로 동성애자이든, 사회가 변형되어 변태적인 유형으로 동성애자/양성애자가 생겨난 것인 들, 이들은 함께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엄연한 사회의 구성원인 것이다. 만약에 사회 때문에 변형된 유형의 비정상적 성이라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더더욱 사회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차별은 두려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다름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이익 상실에 대한 두려움, 다름을 인정했을 때 그 결과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그런데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확실성과 다름은 아름답기도 한 것이다. 반듯하게 정해진 규칙과 규율에 따라 모든 사람이 예정대로 똑.같.이 사는 것 보다는 풍부하게 넘쳐나는 다양성이 사회를, 문화를, 인류를 그리고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충분히 허용하는 여유가 새로운 차원의 유토피아를 위한 사실 가장 쉽고도 기초적인 첫 걸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