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에서

송영선200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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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빌딩과 팔차선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이순신 장군을 뒤로 하고 경복궁을 끼고 돌아

고만고만한 건물들에 효자들만 살 것 같은 효자동을 지나 자하문고개를 넘으면  

부암동에 도착한다.

 

부암동은 북악산 자락에 있어 동네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긴하지만

마치 산에게 폭 감싸 안긴 것처럼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작은 동네였던 삼청동이 카페와 갤러리, 와인샵들로 넘쳐나는 '핫 플레이스'가 된 것처럼

부암동도 요즘들어 작은 카페들이 생겨나면서 제2의 삼청동으로 부상하고 있다.

 

물론 커피맛 좋다는 한적한 카페에 앉아 여유로운 오후를 맞고 싶은 생각이 우선이긴했지만

부암동을 찾은 것은 '백사실계곡'때문이었다.

서울 한복판에 강원도 산골 자락에나 있을 듯한 도롱뇽서식지이기도 한 계곡이 있다는 사실에

우선 놀랐고, 반갑고, 또 기뻤다.

 

백사실계곡에 가려면 '커피프린스1호점'에 나왔던 '산모퉁이'카페와 '아트포라이프'라는 카페의 이정표를

수십개는 지나쳐야 한다. 위로는 옛서울을 지켜주었을 성곽이 아래로는 현재 서울의 주택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다시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 당최 계곡이 있을 거라곤 상상이 가질 않는 부잣집 골목을 걷다보면 백사실계곡의 입구가 나타난다. 거기서 계단 몇 개만 내려가면 거짓말처럼 산중(山中)이다.

 

푹신한 낙엽길을 밟으며 천천히 내려서는데 저 멀리 하얀 실계곡이 보인다.

 

 

 

아 - !

 

탄성이 절로 나온다. 꼭 하얀 뱀처럼 길고 부드럽게 놓인 계곡의 자태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정말 이름값하는 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백사는 白蛇가 아니라 이항복 선생의 호인 白沙라고 한다.

계곡에 이항복 선생의 별장인 '백사동천'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물론 다녀온 후에 검색을 통해 알게된 사실이다. 내려가면서 '백사동천'이라 새겨진 바위를 봤고

한 아주머니가 빙글빙글 돌던 공터에 심상치 않은 돌들이 있었던 걸 보긴 했지만 무심히 지나쳤다.

내 여행은 늘 이렇다. 목적지만 정한다. 그래서 꼭 한 번은 헤매고 지금처럼 무식하게 여러 장소들을 지나친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기도 한다.

그냥 난 그렇다. 그냥 그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면 그걸로 만족.

 

그렇게 너무나 부러운 뒷산을 떠나 다시 부암동주민센터 앞으로 왔다가 좁은 골목길로 홀린듯 빨려 들어 갔다. 그 길 이름이 '무계정사1길'. 혹시 이 길로 가면 무계정사를 볼 수 있는 걸까?하는 기대도 조금. 그런데 정말 나타났다. 블로그에서 봤던 폐허뿐인 그곳.

 

 

 

사실 그 폐허는 소설가 현진건 선생의 집터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정자라고 하는데 사실 사진 속 한옥에 사람 사는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계정사 역시 터만 남은 것인지 이 한옥이 무계정사인지 확실치 않다. 이건 검색으로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백사실에 무계정사 그리고 김흥근의 별서이던 것을 대원군이 빼앗아 이름까지 자신의 호를 따 바꿔버렸다는 석파정까지 예부터 쉬기에 좋은 지세를 따라 많은 이들이 별장을 지었던 모양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사람이 따르는 것은 당연지사. 잠깐 머무른 나 역시 포근한 느낌이 들었으니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내 맘을 뒤흔든 것은 현진건 선생의 집터 앞에 세워진 비석. 그 안의 글귀였다.

 

현진건(1900-1943)은 근대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역사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 사는 게 어찌나 이렇게 공평치 못한지. 누군가는 별장에 와 쉬어가던 곳에서 누군가는 궁핍한 말년을 보냈을 생각을 하니 가슴 한쪽이 아렸다. '운수 좋은 날' 속 김첨지의 마지막 절규가 들리는 듯 하고, 골방에 앉아 끊어지지 않는 기침을 해대며 한자 한자 써내려가는 현진건 선생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쓸쓸한 마음으로 다시 큰 길로 내려왔다. 처음 도착했던 때보다 사람들이 늘었다. 한 손에 큰 카메라를 든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작은 카페들을 들여다보니 어느새 자리가 꽉 찼다. 공사를 하느라 분주한 곳도 보인다. 또 카페가 들어설 모양이다. 사람들은 호젓한 곳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무서운 건 그 곳을 절대 조용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거다.

 

버스를 타고 다시 시끄러운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명동에선 '명동예술극장'을 복구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제는 파괴한 것을 다시 복구하는 어리석인 짓을 반복하지 않도록 애초에 있던 그대로를 지키는 법을 배웠으면. 이미 다 사라져버렸을 것 같은 서울도 아직은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오늘.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