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하지 않았다?★

배성중200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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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한 구국(救國)의 성웅(聖雄)(나라를 구한 성스러운 영웅이란 뜻임), 이순신 장군은 1572년 무인 선발 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합니다. 그는 32세 때에 식년 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뒤에 군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자리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바로 1년 전(1591)에  전라 좌도수궂널도사로 승진하고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이듬해 일본 놈들이 부산을 공격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같은해 이순신 장군과 휘화 장수들은 옥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무려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였다고 합니다. 이윽고. 그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이용하여 사천포 앞바다에서 왜선 13여 척을 격파하고, 당포 해전(적선 20척 격파)과 제 1차 당항포 해전(왜선 26척 격파) / 2차 당항포 해전(왜선 31척 격파)에서 왜놈들을 격파하였습니다. 또, 안골포와 부산포에서 왜선을 격파하여 왜놈들을 무찔렀습니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민생을 돌보았으며 산업을 장려하기에 힘을 씁니다.

1597년 이중간첩인 요시라가 '가토기요마사가 바다로 건너 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미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명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이는 곧 왜놈들의 계략임을 간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순신 장군은 파직당하고,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백의 종군을 하게 됩니다.

 

같은해 이순신 다음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위치에 오른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하여 함선 100여 척을 잃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12척의 병약한 함대로 333척의 함선을 가진 적군과 명량에서 대결을 펼치고, 결국 31척의 왜선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이승리로 다시 조선은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고, 1598년 11월에 명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왜군을 노량으로 유인하여 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명언을 남기면서 전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둘러싼 학설들이 등장하는데...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빠져 나와 숨어 살았다?

정사는 "1598년 11월 18일 새벽에 노량해전이 한창일 즈음에 이순신이 왜군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귀환해서 숨어 살았다'라는 은둔설도 고개를 내고 있습니다. 즉,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빠져 나와 숨어 살았다'라는 설이지요.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의 역사 연구가 남천우 씨는 <유물의 재발견>이라는 저서에서 이순신이 생전에 여러 번 '죽겠다'라고 말한 점과 노량 해전이 끝난 20일 후에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아산으로 옮겨지고, 노량해전 발발된지 80일 후에 장례를 치르고, 15년이 지나 묘소가 이장된 사실 등을 근거로 은둔설을 제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소 이순신의 충심을 의심했던 선조는 1598년 11월 23일에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장례 비용을 국가가 대어 주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장례 비용을 국가가 대주는 데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식이 노량해전이 발발된지 80여 일후에 있을 연유가 없습니다. 그로부터 15년 이후에  그의 묘소가 이장된 것도 여간 의심스럽습니다.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자살을 했다?

임진왜란이 종전된 이후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이순신의 '자살설'..1598년 11월 18일 새벽에 이순신 장군은 갑자기 갑옷을 벗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자살설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학설들은 기존의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라는 전사설을 부정하였는데, 대체 그 신빙성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