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띠

이현주200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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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띠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언제 샀던 것인지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은 얇은 머리띠를 하고 지내던 며칠 간 이마를 가리던 앞머리카락들을 의식하지 않게 되어 편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머리띠를 하고 보니 제법 길어져 치렁치렁한 머리를 묶지 않아도 될 정도의 편안함을 알게 된다. 이마가 받아마셔야할 햇빛 혹은 활력소들을 가리지 않는다면 이마에 뾰루지 같은 것들이 생길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이마가 누리기 시작한 자유로운 바람의 기운이 온몸에 전달되는듯 바람을 막기 위해 걸친 옷들의 무게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마.. 사촌언니는 나와 동갑이다. 단지 생일이 나보다 좀 빠르다. 나는 11월에 태어났고 언니는 7월에 태어났으니 불과 몇 달 차이이다. 하지만 나는 언니라는 호칭으로 그녀를 부르는데 조금도 어색하거나 억울하지 않았다. 언니는 큰엄마의 딸이고 나는 작은엄마의 딸이라는 서열 때문이기도 했고, 언니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의 무용과를 준비하며 모델일을 할만큼 174센티라는 여자로서는 큰 키를 갖고 있어 나보다 많이 높아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니는 나와 같은 여고를 다니고 있었다.

 나는 여덟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언니는 일곱살에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그녀는 분명 선배이고 언니였다. 얌전한 나에 비해 언니의 활발한 성격과 큰 키는 선후배 사이가 철저한 여고내에서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곤 했다. 그렇다고 언니의 보호를 받아야할만큼 내가 말썽쟁이 여학생이었던 건 아니지만 복도를 지나다닐 때 혹시 언니와 마주치게 되면 언니를 둘러싼 선배들에게 언니는 늘 나를 자랑스러운 후배처럼 떠벌려주곤 했다. 그 사실이 나를 즐겁게 했다.

 공부, 오직 공부만이 전부였던 학교 내에서 선후배, 친구, 혹은 선생님과의 관계는 기분과 감정을 좌우하는 유일한 무엇이었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군인 동시에 적군은  '성적'뿐이었고, 눈에 보이는 아군이자 적군은 '학생, 선생님'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아침 일곱시에 등교해서 밤 열한시반에 하교하고 토요일에도 오전 아홉시쯤 등교해서 저녁 일곱시쯤 하교하는 일정 속에서 학교는 나와 친구들의 전부였다.

 한 친구와 친하게 지내다가 다른 친구와도 친하게 되어 팔짱을 끼고 교내를 걸어다닐라치면 처음 친구에게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너네 나 보라고 일부러 팔짱 끼고 다니는 거니? 반복되는 거센 질투와 공격들을 받고 나면 그 친구와는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한다. 공부외의 스트레스는 가능한한 줄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존재는 '공부' 다음으로 고등학교 시절의 전부였다.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함께 공부하고, 함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밤을 새고, 각종 영어교과서의 지문들이 한꺼번에 다 나오는 모의고사등을 치를때면 각자 다른 출판사들의 참고서를 구입해서 복사하여 돌려보면서 선의의 경쟁과 우정을 쌓아가던 그 때. 그 때의 아름다움이 숨막히게 되살아 돌아와 나의 세포하나하나에 침을 꽂는 듯 하다. 간수들의 횡포를 피해 단합하던 죄수들의 절박한 우정처럼 우리들의 우정은 남녀간의 사랑을 능가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원하던 대학을 향해 뿔뿔이 흩어지고, 모임이 드문드문해지고, 친구의 팔짱 대신 연인의 팔짱을 끼기 시작하고, 자신의 구역에 또아리를 틀고 주저앉으면서...  학교는 머리띠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짧은 앞머리들처럼 보이지 않게 구겨져 들어가고 있었다. 머리띠 밖으로 길게 뻗어있는 뒷머리만으로도 충분히 풍성해 보인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넌 이마가 참 이쁘네. 왜 앞머리로 가리고 다녀, 앞머리 싹 올리고 이마 내놓고 다녀. 언니의 익살스런 충고는 충분히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충고를 들었을 때의 나는 여고생이었다. 응, 하고 말해놓고는 언니는 헛소리 중인 거 알지? 쑥스럽게 어떻게 이마를 훤히 내놓고 다녀, 하고 중얼거린다. 여고시절의 언니의 목소리가 지금의 내 얇은 머리띠 사이로 굴러다니며 편하다, 시원하다, 고 까불거린다.

 

 하루 일과를 마친 늦은 밤. 새벽까지 여는 마트를 향한다.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온통 하트모양의 쿠션, 베개, 초콜렛, 인형등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문득 가슴 한 구석에 바람이 쓸려 들어온다. 또각또각 신발 소리에 힘을 싣는다. 라면을 끓이기 편한 작은 냄비에 눈이 간다. 주워 담는다. 돈까스 소스가 붙어있는 스파게티 소스 병이 특별할인이라고 으스대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돈가쓰와 스파게티를 둘 다 소화할 수 있다니 필요한 물품임에 틀림없다. 9천9백원이라고 엄청나게 크게 써있는 작은 상을 발견한다.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올려 놓고 일하기에 좋을듯 해 보인다. 저렴한 탓에 조금 힘을 주어 누르면  상다리가 동강나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힘약한 내가 상다리를 세게 누를 일이 뭐 있겠나 하는 낙관이 이겨낸다. 허쉬 초콜렛 한 조각을 입 속으로 녹여낼 때의 낭만을 무시하지 못하고 아몬드 초콜렛을 집어 든다.

 

 냉장고에 넣을 것들을 정리하고 나니 씻기 위해 의지를 발동해야할 정도로 시간이 늦고 피곤하다.  모자를 벗고 얇은 머리띠로 앞머리를 완전히 감추어 올린다. 거울을 들여다 본다. 이마가 훤하다. 아마도 내 얼굴 중에 가장 깨끗하고 보기 좋은 부분이 아닐까 싶다. 좀 더 넓고 예쁜 머리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 머리띠를 사오지 않았다. 순간 얼굴이, 너의 뇌는 기억력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느냐고 늘 그러던 것처럼 다시 추궁하고 나무란다.

 내일은 머리띠를 하나 사와야지,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