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골성지(김대건 신부님의 피난처)

김민희200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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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골

김대건 신부가 골배마실에 정착하기 전, 잠시 거주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 한덕골은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사적지이다.

                                 (성 김대건 신부님에 동상)

성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의 옥중 순교(1814년) 후에 포졸과관리들의 수탈과괴롭힘과 위협으로 가세는 날로 기울고 피폐해졌다.언제 또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불안해하던 조부 김택현은 김 신부가 7살되던 1827년 지방박해인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처 경기도 용인, 한덕골로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기거할 집이 없어 마을 근처 성애골(현재는 매몰되었음) 골짜기에 들어가 산(生) 나무와 산나무에 칡으로 얽어매고 억새풀을 덮고서 살었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 최양업신부님에 동상)

원래 한덕골은, 윗마을 광파리골과 아랫마을 한덕골을 합쳐서 부르던 이름이며,그중 교우촌은 윗마을 광파리골이다.

 

 

족보에 의하면 성 김대건 신부님의 조부 김태현(1766~1830)과 숙부 김제철(1803~1835)의 묘가 한덕동에 있다 기록되어 있어,성 김대건 신부 가족들의 한덕골 피난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피신한지 3년이 지나 할아버지 김택현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1830년).김제철 작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1835년),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주 하였다.

 

 

                                 (한덕골 입구에 모습~)

 

 

한덕골 성지를 관리하는 성당입니다~

 

-설명-

*정해박해-

할아버지(김택현)는 애초부터 당고모의 내왕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터였고 어서어서 긴말 말고 자리를 뜨기를 바랐다.

“전라도에 천주학을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도자기를 구워팔면서 사는 동네가 있답니다.곡성이라구여.밭농사나 담배농사보다도 도자기 장사가 훨씬 잘되어 가마도 늘리고 기분이 좋아서 동네에 술판이 벌어졌답니다.술꾼들 중에 한 젊은이가 술이 과했던 모양이에요.그 마을에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술집 주인 부부를 마구 두드려 패고 술상을 뒤집어엎어 술상다리가 부러지고 그릇이 작살이 난 거에요.까닭없이 두드려 맞은 술집 주인이 같은 천주학쟁이 이기는 했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교리책들을 관헌에게 바쳤답니다.그리고는 ‘우리 마을에 이런 책을 보는 천주학쟁이 아무개와 아무개가 있습니다’하고 두세 사람의 이름을 대며 밀고를 했답니다.”

제복이 할아버지는 큰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떳다.김제준은 사촌 누이동생의 말을 중동무이시켰다.

“그 소문은 아버님도 나도 진즉부터 들어 잘 알고있다네.지난 해 일본에서 조선에 편지를 보내왔어.천주학쟁이 몇 명이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하였으니.그들을 잡아 돌려보네 달라고 말이야.그래서 관가의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 판국에 그런 밀고가 들어갔으니 불씨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겠지.”

(소설 김대건-한상윤의 장편소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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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눈이 온후 떠나, 만난 한덕골 성지~

마침 그곳에서 열심히 기도를 올리시는

분들을 만나고,서로 정답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에게 은총을 빌었습니다~

산에 둘러 싸여 있는 성지는

포근하게 오는이를 맞이하는듯 했습니다.

근처에 둘러 볼곳이 한곳 더 있었으나~

그곳은 미처 챙기지 못하고 돌아 왔습니다~

다른 분들은 꼭 챙겨 보시도록 하십시요^^

 

" 이윤일(李尹一) 요한(1823-1867)묘터"

 

즐거운 하루들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