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남았다.

이승윤200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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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gall. woman and flowers. 

 

 

 

 

2월 15일

 

사랑하던 사람 혹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헤어졌다는 내용의 편지를 친구에게서 받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슬픈 그녀의 문자들이 또한 슬프다.

 

문뜩 이별에 대한 내 기억들의 파장이 가만히 일었다 가만히 가라 앉았다.

밤, 편지, 가로등, 눈물, 악수, 수많은 진실과 거짓들. 또 눈물. 그리고 떠밀려 하게 된 성장들. 부서진 파편조각 같은 기억들에 아마도 현실이란 축이 하나 더해져 재편되고 또 재편될 것이니 그때 그 시절 우리는 누구였고 어떤 사랑했던가-는 영영 미궁으로 빠질 것이다. 모두들 성장이란 타이틀로 갈 길을 떠나고, 남은 것은 그 자리 그 시간 속에 오도카니 머무른 외로운 사랑뿐.

 

 

Lovers lost but love remains.

-Dylan Thomas.

 

 

 

 

 

2월 17일

 

to m 

 

답이 조금 늦었지? 미안해. 어제까지 제출할 것이 있어 한숨도 못 잔 것 있지? 방금 수업 하나 듣고 다음 세미나 시간 사이 40분 정도가 비었는데,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처음부터 오늘 노트북을 들고 나왔었어.

 

잘 지내고 있어?

우리 조금 더 어렸을 때 말이야, 네가 남자친구 얘기를 할 때 내가 “에고. 걔가 내 친구라서 내가 지금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했던 것 기억나? 그때 네가 “언니, --오빠 친구인 승윤언니 말고 전적으로 제 편에서 그냥 얘기해주세요” 해서 내가 미안해했었는데. 그때 기억이 아련히 나면서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기도 하고, 이제는 네 말대로 우리가 훨씬 복잡해진 문제들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자란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책 알지? 예전에 그 책을 읽고 유토피아는 참 ‘단순한 세상’이라 것을 깨달은 적이 있어. 예를 들어 유토피아에선 법도 너무 쉽고 사람들 사이의 사건도 단순해서 변호사가 없는 곳이더라고. 그런데 어쩌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유토피아가 아니니깐. 고려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여기에 시간이란 또 하나의 축까지 추가 되어, 우리는 현재의 문제도 복잡한데 과거 또한 고려해야 하고 울트라 복잡하게 미래의 문제까지 ‘미리’ 고민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지금 이순간에도 흐르고 있는 ‘현실’말이야, 그리고 이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다가 올 미래 말이야, 이 두 가지가 바로 ‘과거’에 의해 이해되고, 재인식되고, 예견되고 재편되고 한다는 것, 이해할 수 있겠니? 이 ‘과거’라는 것은 비단 나의 혹은 너의 과거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타인의 과거들도 나의 미래를 인지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지. 음.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연인과의 현재의 관계를 보고 ‘자신’의 경험과 과거에 기반해 “당신들의 미래는, 혹은 당신의 미래는 이러저러 할 것입니다”라는 의견을 말하면 나는 그렇게 타인의 ‘과거’에 따라 나의 현실과 미래를 재편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야. 사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어. 우리는 누구나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고 그래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하니깐. 그 방법 중 가장 쉽고 편한 것이 ‘과거의 경험’일 테니깐.

 

그런데 또 말이야. 폴투르니에가 쓴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란 책이 있는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험심이라는 것이 있대. 오! 지쟈스- 이 모순이여- 그러니깐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험을 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동시에 있는 거야. 이건 사람들이 롤로코스터를 타는 심리와 비슷해. 죽을 까봐 두려우면서도 혹시 죽을지도 모르는 그 일말의 모험심이 때문에 타는 거야.

 

그럼, 다시 우리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난 지금의 네 선택을 존중해. 다만, 그 선택이 지나치게 너의 혹은 타인의 과거 의해 좌우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선택을 되돌리라는 것이 아니고, 선택 후의 또한 앞으로 하게 될 수많은 선택들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뿐이야. 너의 과거에 기반한 판단, 타인들의 과거에 기반한 판단 말고, 지금 바로 이 순간들의 네 안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려 보면 어떨까, 네가 조금 덜 힘들지 않을까 해.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것을, 어떤 삶을, 어떤 사람을, 그리고 어떤 사랑을 원하고 꿈꾸는가에 대해 온전히 네 안의 목소리들을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어. 어찌 보면 이렇게 힘든 순간에야 내 자신과 철저히 대면 할 수 있기도 하거든.

 

마지막으로, 현재에 의해 과거 역시 재편되는 것을 꼭 이야기하고 싶어. 누군가 헤어지면, 지금의 느낌과 상태와 판단에 대해 우리는 정당화를 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되면 과거는 아주 쉽게 재편되지. 나 역시 너무나도 쉽게 “그때 그건 사랑이 아니었지”라는 말을 했었으니깐. 그런데 말이야, 그때의 사랑, 사랑했던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던 나의 모습은 그대로 놔두면 어떨까. 연인들은 떠났지만 그 머무른 시간 속의 사랑은 그대로 남아있게 말이야. 사랑이란 것을 했던 너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안아주면 어떨까 싶어. 그러면 지금 네 마음이 덜 힘들지 않을까-

 

까오-수업 늦었다!

편지가 무척 길어졌네. --야. 중간 부분 생략하고 이 부분만 읽어도 돼.

자! 과거는 과거대로 우리 아름답게 놔두자, 감사하자, 그리고 이제 앞으로의 선택들을 위해서 나의 과거, 타인의 과거 말고, 지금 이순간 나의 목소리와 내가 바라는 것들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자, 솔직하게-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슬픔 역시 그냥 온 몸으로 느끼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물 밀려오듯 흘러오는 감정들을 거스르지 말고, 그 파도에 그대로 몸을 맡겨. 그러다 보면, 일렁거리는 그 물결이 네게 어떤 힘을 줄지도 몰라- :o)

 

괜찮아질 거야. 응원할게.

 

승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