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는 없다.! '도를 믿습니까' 끝까지 들어보았다.

정민영2009.03.11
조회240

(090311) 논리는 없다.! 밖에서 만난 '도를 믿습니까' 류의 사람들.  끝까지 들어보았다.

 

  대순진리교 사람을 만났다.  마치 '도를 아십니까' 라는 류의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식복이 많으시네..?", 입 가 부근에 점이 나있는 사람은 식복이 있는 거란다. 역시 긍정적인 얘기다.  사람 얼굴의 모든 부분이 관상학상 좋은 것만은 아닐텐데, 긍정적인 얘기를 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끈다.  마치 서론에서 속담이나 우화를 인용해서 사람을 끌어들이듯, 사람을 유인하기 위한 전형적인 목소리다.  '논리가 없는 말이나 설득'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는 않다는 나의 말에 돌아온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하겠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동했다.  종교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라.  가능한 것일까. 한번 들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전형적이고 상투적이었다.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그들의 이야기는 '신'이라는 대전제하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된 꾸며낸 팩션(Faction)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당신 종교의 당위성을 설명하려 했다.  여타 종교, (특히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의 교리를 '일부' 인용하여 당신 종교의 탄생과 당위를 불어 넣는다.  석가모니의 불교, 예수의 기독교, 공자의 유교 경전이나 교리등에 일부분을 인용하면서 '대순진리교'가 현재 꼭 필요한 종교이고,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려 하는 듯 하다.  대순진리교는 선, 불, 도가 통합된 완성된 종교이란다.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은 대우주의 시기상 '경쟁'의 논리에 입각했던 교이기 때문에, 우주의 가을에 해당하는 현재, '추수(생산)'를 하기 위해서는 대순진리교의 교의를 따라야 한단다.  어느새 다른 종교의 핵심사상은 해체 되고, 여타 문맥과 정황도 함께 사라진다.  그저 당신 종교에 유리한 문구만 '글자 그대로' 남아서 종교 메커니즘에 기여한다.  인용된 문구엔 문맥이 없다.  의미가 없다.  영혼이 없다.  문자만 남은 채 '아전인수' 격으로 활용될 뿐이다.  문맥이, 영혼이 없는 인용은 슬프다.

 


  세상을 관통하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세상을 관통하는 법칙, 즉 자신들의 '신', '절대자'가 존재하며, 이들은 전지전능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대전제로 깐다.  사실 이는 모든 종교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종교는 연역적이다.  종교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가끔 눈 앞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곤 하는데, 이는 종교인들에게는 불변하는 진리, 즉 '신'이라는 대전제가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혹은 '불가지론자'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이 논리를 풀어가는 근본이 사라지기 때문에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모든 주제와 소재는 결국 '신'으로 귀결된다.  대순진리교 또한 논리를 장황하게 엮고 있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결국 '절대자의, 절대자를 위한, 절대자에 의한' 이라는 명제를 정당화 시키기 위한 일명 'Faction'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음과 양, 天과 地, 神과 人 등 대순진리교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세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세상, 소우주, 대우주에는 음과 양이 있으며, 그 변화에는 '천지개벽'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그들에게 있어 음과 양의 구별과 그 이행은 세상이 변화하는데 중요한 법칙인 것이다.  그러나 '음과 양', '너와 나', '내 것, 네 것'을 구별짓는 이분법은 정치, 사회적으로 구성된 산물이 아닐까. 

  그들은 이분법에서 파생되어 사회 문제 시 된 여러 갈래를 알고 있을까.  남과 여, 자연과 인간, 적군과 아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이러한 이분법들이 '너와 나'라는 대상을 설정하고 서로를 서로에게 대상화, 주변화 시킨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너'와 '나', '내 것', '네 것' 처럼 서로를 구별지음으로써, 여러 갈래의 블록과 그룹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구별'은 동일한 집단내의 유대성(Solidarity)을 강화하는데 대표적인 수단이지만, 때로는 집단 밖에 있는 대상과의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정당을 만들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노력하거나, 때로는 세계적으로 민족 전쟁, 경제 전쟁, 금융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너'와 '나'의 이분법적 구별은 '유대'라기보다는 '갈등'의 모습을 더 강하게 띠어왔다.  결국 그들이 전제하는 이분법적인 운동 법칙은 사회 현상의 일부분이며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법칙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들 종교의 핵심 메커니즘의 또다른 하나는 '기' 혹은 '신'이라는 비가시적인 요소로서 현상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그들의 논리를 조금 단순화 시켜보면, 사람들 각 개인마다 고유하게 존재하는 氣가 사람들의 성격을 결정하고 이는 '분위기'라는 형태로 대외적으로 드러나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사람들의 운과 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 氣가 자신의 전생의 업과 연관되어 있으며 나아가 직계, 외계에 이르는 조상의 업(業)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 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제시하는 '道'를 수행 하는 방법, 즉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또한 간단하다.  근본이 氣이고 氣가 자신의 전생과 조상의 업에 좌우된다는 조약한 논리를 들여다 보면, 조상과 자신의 과거의 업을 풀고 (解怨) 조상을 정성으로 받들어 모시며 (致盛) 상생(相生)함으로써 현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수행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보았을 때, 해원상생(解怨相生), 치성(致盛)은 대순진리교의 핵심 교의이기도 하다.

 


  '氣 결정론' 이랄까.  이처럼 사람을 氣로 환원시켜 설명하고 이에 입각하여 해결책과 수행 방식을 제시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것은 아닐까.  사람의 생애를 이처럼 쉽게 기(氣)라는 대상으로 환원 시킬 수 있는 것일까. 

  가장 손쉬운 예로 그들이 '기'의 발현된 형태라고 언급했던 '분위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분위기'를 구성하는 요소는 이들이 주장한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  즉, 단순히 '기'라는 구성물 하나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복, 표정, 당시의 주위 상황, 혹은 분위기를 예단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 등 많은 요소들이 사람들의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기능하고 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의 분위기를 감추거나 속일 수도 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이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람들은 사회라는 무대에 서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들이 보여 주고 있는 일반적인 모습 (무대의 전면)과 사적인 영역에서 보여주는 모습(무대의 이면)은 상이하다.  사람들은 '근대성'이라는 사회 구조에 적응하고 '모나지' 않기 위해, 그들의 모습과 행동 또한 그에 맞게 적응하고 의도적으로 보여준다.

  전철은 현대 사회의 사람들의 가면을 손쉽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살을 부대끼며 전철의 의자에 앉아 있지만, 서로를 의도적으로 모르는 채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내가 옆에 앉아 있는 상대방에게 말을 건넸다고 생각해보자.  혹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눈인사를 했다고 해보자.  관심을 받은 상대방은 어색해 하거나, 때로는 불쾌해 할 수도 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자.  시골에서 갓 서울로 올라온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께서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갑자기 말을 건다면,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 그 상황 자체를 어색해 하지 하는 것은 물론, 어르신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도시 사회에 서로를 '무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가치'(이를 나는 '공손한 무시' 라고 표현하고 싶다)가 공유되어 있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공유된 가치가 침해 당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러한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생활하고 있지만, 자신이 사회적으로 조성된 가면을 쓰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분위기 혹은 모습을 '기(氣)'라는 단순한 요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교에 논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어리석은 일일 지도 모른다.  또한 1시간 정도의 '이야기' 정도로 대순진리교의 교의나 사상을 모두 이해 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 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의 교리를 무차별적으로 강요하고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때로는 타 종교 등을 배타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배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나....... 이야기 도중 그들에게 위와 같은 생각들을 이야기해보았지만, 결국 돌아온 답은 가장 큰 대전제, 곧 '신은 존재한다, 신은 전지전능하다'의 명제의 동어반복일 뿐이었다.  대전제에서 도출된 자신의 종교를 미화하거나 정당화시키려는 여러 스토리들은 논리가 아니라 수사(Rhetoric)이였다.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그 속에 기대했던 논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