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구림마을’] 왕인·한석봉이 뛰어놀던 골목길
기사입력 2009-03-19 18:00
필름을 되감듯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듯 구림마을 토담 위로 구름이 흐른다. 왕건의 책사 최지몽이 월출산 별을 보고 고려의 운명을 점친다. 구름이 더욱 빠른 속도로 월출산을 향한다. 한 처녀가 몰래 낳은 사내아이를 서호정 바위에 버린다. 드디어 구름이 죽림정 팽나무 가지에 걸린다. 논어와 천자문을 품은 왕인이 돌정고개를 넘는다. 그리고 상대포에서 떼배를 타고 일본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구림마을'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역사책을 펼친다.
첫 페이지에 백제의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아쉬운 마음에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가 나온다. 왕인이 태어나 자랐다는 월출산 주지봉 기슭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1600여 년 전 32세 젊은 학자였던 왕인이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품고 넘던 고갯길이다.
하지만 돌정고개는 더 이상 고갯길이 아니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드넓은 갯벌이 일제강점기 때 농토로 간척되면서 돌정고개와 키를 맞췄기 때문이다. 왕인이 도공 등 기술자 45명과 함께 흙먼지 날리며 걷던 고갯길도 몇 해 전 붉은색 아스팔트로 포장됐고, 왕인이 떼배를 탔던 상대포도 손바닥만한 저수지로 전락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이리라.
돌정고개가 끝나기 직전. 보호각에 둘러싸인 구릉의 가마터가 창살 틈새로 보인다. 20년 전에 발굴된 '영암 구림리 도기요지'로 통일신라시대에 도기를 제작하던 가마터다. 1200년 세월이 흘렀건만 가마의 원형은 너무나 생생하다. 상대포 옆 영암도기문화센터에는 이 가마터를 비롯해 인근 10여개의 가마터에서 발견된 옹관과 도기 파편 등이 전시돼 구림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증언한다.
청동기시대의 옹관묘가 발견되고 조선시대의 토담이 보존된 전남 영암 군서면의 구림마을은 헤아릴 수 있는 역사만 2200년에 이른다. 일본에 문물을 전한 백제의 왕인, 풍수지리의 시조인 신라 도선국사, 왕건의 책사였던 고려 최지몽, 가야금산조 창시자인 조선의 김창조 등이 모두 월출산 자락에 둥지를 튼 구림마을에서 태어났다.
토담 안의 매화꽃이 멋스런 구림마을 가가호호는 역사와 스토리 없는 집이 없다. 한석봉과 어머니가 글 쓰기와 떡 썰기 시합을 했다는 곳도 이 마을이다. 한석봉은 스승인 신희남을 따라 영암으로 내려와 죽림정사에 머물며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떡 장사를 한 곳은 낙지골목으로 유명한 인근의 독천시장. 실제로 구림마을 육우당의 현판은 한석봉이 쓴 글씨다.
노송에 둘러싸인 회사정은 조선시대 구림마을 역사의 주역이자 산증인. 회사정은 향약의 기본정신인 덕업상권 예속상교 과실상규 환난상휼을 실천할 목적으로 444년 전에 조직된 구림대동계의 집회장소로 영암 3·1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꼴로 찾아와 마루에 앉자 꼿꼿한 성격의 계원들이 마루판자를 뜯어버렸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지금도 맥을 이어오는 구림대동계는 새 계원을 받아들일 때 만장일치제로 결정한다. 추천받은 후보에게 찬성하면 하얀 바둑알, 반대하면 검은 바둑알을 던진다. 철저한 비밀투표로 검은 바둑알이 하나라도 나오면 새 계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회사정 앞 대동계사는 대동계의 규약 등 고문서들이 보관된 문서창고.
뜻밖에도 구림천을 마주한 고죽관 앞뜰 시비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홍랑의 시조를 만난다.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 그녀의 시가 왜 여기 새겨졌을까. 조선 중엽 함경도 경성의 명기 홍랑은 북평도사로 온 고죽 최경창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한다. 6개월 후 한양으로 떠나는 최경창에게 이별의 아픔을 송별시로 지어 버들가지와 함께 보냈다고 한다. 고죽관은 이 마을에서 살았던 최경창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지난 2000년에 시조의 원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수령 300년의 아름드리 팽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죽림정은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 송시열, 김창집이 쓴 현판과 편액 등이 보존된 유서 깊은 정자. 정자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서신 사본도 붙어 있다. 이순신은 당시 이 집의 주인인 현건과 서신왕래를 할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 이순신이 전사하기 9개월 전에 보낸 서신에는 영암의 서호강과 월출산을 그리워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전해오는 바위는 최지몽을 기리는 국암사 뒤편에 있다. 처녀였던 도선국사의 어머니는 빨래하다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아이를 낳아 이 바위에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 비둘기들이 아이를 감싸고 보호해 다시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구림'이라는 마을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구림마을 골목길을 걷다 맞닥뜨리는 고갯길과 바위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흔적이 오롯이 묻어난다. 그곳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구림마을 출신 인물들의 체취도 진하게 스며 있다. 그래서 영암 구림마을을 시공을 넘나드는 한 권의 역사책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국민일보] 영암 구림마을-1
필름을 되감듯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듯 구림마을 토담 위로 구름이 흐른다. 왕건의 책사 최지몽이 월출산 별을 보고 고려의 운명을 점친다. 구름이 더욱 빠른 속도로 월출산을 향한다. 한 처녀가 몰래 낳은 사내아이를 서호정 바위에 버린다. 드디어 구름이 죽림정 팽나무 가지에 걸린다. 논어와 천자문을 품은 왕인이 돌정고개를 넘는다. 그리고 상대포에서 떼배를 타고 일본으로 뱃머리를 돌린다.
'구림마을'이라는 제목의 두툼한 역사책을 펼친다.
첫 페이지에 백제의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아쉬운 마음에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는 돌정고개가 나온다. 왕인이 태어나 자랐다는 월출산 주지봉 기슭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1600여 년 전 32세 젊은 학자였던 왕인이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품고 넘던 고갯길이다.
하지만 돌정고개는 더 이상 고갯길이 아니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드넓은 갯벌이 일제강점기 때 농토로 간척되면서 돌정고개와 키를 맞췄기 때문이다. 왕인이 도공 등 기술자 45명과 함께 흙먼지 날리며 걷던 고갯길도 몇 해 전 붉은색 아스팔트로 포장됐고, 왕인이 떼배를 탔던 상대포도 손바닥만한 저수지로 전락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이리라.
돌정고개가 끝나기 직전. 보호각에 둘러싸인 구릉의 가마터가 창살 틈새로 보인다. 20년 전에 발굴된 '영암 구림리 도기요지'로 통일신라시대에 도기를 제작하던 가마터다. 1200년 세월이 흘렀건만 가마의 원형은 너무나 생생하다. 상대포 옆 영암도기문화센터에는 이 가마터를 비롯해 인근 10여개의 가마터에서 발견된 옹관과 도기 파편 등이 전시돼 구림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증언한다.
청동기시대의 옹관묘가 발견되고 조선시대의 토담이 보존된 전남 영암 군서면의 구림마을은 헤아릴 수 있는 역사만 2200년에 이른다. 일본에 문물을 전한 백제의 왕인, 풍수지리의 시조인 신라 도선국사, 왕건의 책사였던 고려 최지몽, 가야금산조 창시자인 조선의 김창조 등이 모두 월출산 자락에 둥지를 튼 구림마을에서 태어났다.
토담 안의 매화꽃이 멋스런 구림마을 가가호호는 역사와 스토리 없는 집이 없다. 한석봉과 어머니가 글 쓰기와 떡 썰기 시합을 했다는 곳도 이 마을이다. 한석봉은 스승인 신희남을 따라 영암으로 내려와 죽림정사에 머물며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떡 장사를 한 곳은 낙지골목으로 유명한 인근의 독천시장. 실제로 구림마을 육우당의 현판은 한석봉이 쓴 글씨다.
노송에 둘러싸인 회사정은 조선시대 구림마을 역사의 주역이자 산증인. 회사정은 향약의 기본정신인 덕업상권 예속상교 과실상규 환난상휼을 실천할 목적으로 444년 전에 조직된 구림대동계의 집회장소로 영암 3·1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꼴로 찾아와 마루에 앉자 꼿꼿한 성격의 계원들이 마루판자를 뜯어버렸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지금도 맥을 이어오는 구림대동계는 새 계원을 받아들일 때 만장일치제로 결정한다. 추천받은 후보에게 찬성하면 하얀 바둑알, 반대하면 검은 바둑알을 던진다. 철저한 비밀투표로 검은 바둑알이 하나라도 나오면 새 계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회사정 앞 대동계사는 대동계의 규약 등 고문서들이 보관된 문서창고.
'묏버들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 / 자시흅 窓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뜻밖에도 구림천을 마주한 고죽관 앞뜰 시비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홍랑의 시조를 만난다.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 그녀의 시가 왜 여기 새겨졌을까. 조선 중엽 함경도 경성의 명기 홍랑은 북평도사로 온 고죽 최경창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한다. 6개월 후 한양으로 떠나는 최경창에게 이별의 아픔을 송별시로 지어 버들가지와 함께 보냈다고 한다. 고죽관은 이 마을에서 살았던 최경창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지난 2000년에 시조의 원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수령 300년의 아름드리 팽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 죽림정은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 송시열, 김창집이 쓴 현판과 편액 등이 보존된 유서 깊은 정자. 정자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서신 사본도 붙어 있다. 이순신은 당시 이 집의 주인인 현건과 서신왕래를 할 정도로 가까웠던 사이. 이순신이 전사하기 9개월 전에 보낸 서신에는 영암의 서호강과 월출산을 그리워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전해오는 바위는 최지몽을 기리는 국암사 뒤편에 있다. 처녀였던 도선국사의 어머니는 빨래하다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아이를 낳아 이 바위에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후 비둘기들이 아이를 감싸고 보호해 다시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구림'이라는 마을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구림마을 골목길을 걷다 맞닥뜨리는 고갯길과 바위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흔적이 오롯이 묻어난다. 그곳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구림마을 출신 인물들의 체취도 진하게 스며 있다. 그래서 영암 구림마을을 시공을 넘나드는 한 권의 역사책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영암=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