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일본이다. 야신도, 로작두도, 그리고 22년 동안 야구를 봐온 나도 예상했던 결과라 놀랍지는 않다. 한국과 일본의 승자가 제 2회 WBC의 주인이 될 것이고, 이는 쿠바가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이상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상대로 오늘 일본은 미국을 꺾었다. 프로 선수가 주축이 된 미국 야구팀은 집중한 일본을 웬만해선 이길 수 없다. 좀 더 위험하게 말하자면 앞으로도 미국은 일본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단기전으로 한정 한다면 일본 야구는 미국 야구보다 강하다.
설령 라이언 하워드가 나오고, 조바 쳄벌레인이 나오고, 린스컴이 출전한다 해도, 그래서 가슴팍에 Dream이라는 글자를 크게 박아 넣는다고 해도, 그들이 야구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수행하는 사도처럼 행동한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게임에서 미국이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WBC 1회 때처럼 심판의 힘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심판의 힘에 기대기엔 그들의 양심이 허락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이번 승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꼈거나) 혹자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메이저 리그 단일팀을 주축으로 선수를 구성하면 어떻겠느냐 말하지만, 현재의 메이저 리그 단일 팀 중에 순수 미국인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가정으로 전락한다.
물론, 몇 명의 주축 멤버가 빠졌음에도 미국선수들의 능력이 일본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타격스킬, 파워, 심지어 수비 능력까지도 정상적인 상태의 미국 선수들은 일본 선수들에 비해 우월하다.
일본을 평정한 유격수였던 마쓰이 가즈오는 미국으로 건너오자 "2루 수비조차 의심스럽다" 는 평을 들어야 했고 무결점의 타자처럼 보였던 후쿠도메는 "F*ck U Do me"로 불려야 하는 자신의 이름을 저주해야만 했다. 마쓰이 히데키의 불완전한 성공을 차치하고 야수 중에 일본에서 성공한 거의 유일한 선수라 할 수 있는 이치로 스즈키는 어디까지나 '예외'의 영역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보다 강했고, 앞으로도 강할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열등*9가 우등*9보다 클 수 있다니? 경제학의 영역에선 쉽게 설명하기 힘든 일이지만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가 아는 한 세상 어떤 스포츠도 야구만큼 '조직화' '분업화' '팀워크' '전략'이 중요시되는 스포츠는 없다. 야구란 세포가 아닌 조직의 경기, 조직이 아닌 기관의 경기인 것이다.
이번 대회 미국이 선수를 선발한 방식을 살펴보자.
일단 "나는 야구보다 우리 가족이 중요해요" "나는 국가보다 우리 팀이 더 중요합니다" 라고 말하는 자를 제외하고, 서른 개의 구단에서 뛰는 선수들의 기록이 담긴 커다란 통계표를 뽑아든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선언으로 야구의 신을 능멸한다. "미국 대표팀의 선수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외야수 / 내야수 / 투수가 그들이죠"
나는 아담 던이 선발 우익수로 출전한 오늘의 라인업을 보고 순간 머리가 멍하다 못해 띵한 느낌을 받았다. 아담 던은 외야수 중 가장 수비 부담이 적은 좌익수 수비조차 버거워 하는 선수가 아니던가? 그런 선수에게 무려 우익수라니... 우리나라로 치면 이대호를 유격수 자리에 넣어 놓고 "자, 이제 일본을 이길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라고 선언하는 꼴이다.
만일 오늘 경기에서 미국이 일본에 승리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었다면, 지터 대신 롤린스가 선발 유격수로, 아담 던을 지명타자로, 우익수 자리에는 빅토리노를 기용했어야 했다.
만일 지터가 "저는 캡틴입니다. 게다가 스칼렛 요한슨, 제시카 알바도 찼던 남자고요. 왜 내가 대타 따위를 해야 하는 겁니까?" 라고 대든다면 마크 데로사 자리에 아담 던을 놓고, 지터를 지명 타자로 돌렸어야 했다. (물론 오늘의 오스왈트라면 어떤 수를 썼어도 미국은 일본에게 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국의 감독 데이비 존슨의 담대함은 가히 성스러웠다.
그는 경기가 시작되자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놔두는 게 상책입니다" 라고 말하고 벤치로 돌아가 팔짱을 끼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눈을 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익숙한 주문을 외는 것뿐이었다. 물론 과장이 섞인 얘기지만 충격적인 것은 실제도 이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미국팀 감독을 맡아 두 번이나 세계 야구팬에게 "과연 미국의 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인가?" 라는 회의를 던져준, 데이비 존슨이 결코 바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는 훌륭한 야구 선수였고, 또 제법 알아주는 감독이었다. 최소한 야구에 있어서라면 일개 야구팬에 불과한 나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는 아담 던이 외야수, 그것도 우익수를 맡기에는 신비로울 만큼 느리고 어깨가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고, 경기 시작 전 마크 데로사의 TPX 1루 미트가 지나치게 새 것이라는 사실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담 던을 우익수로, 마크 데로사를 1루수로 기용했다. 나는 이 설명하기 힘든 결정이 미국 야구가 일본 야구를 이길 수 없는 이유를 함축한다고 믿는다.
미국의 야구는 기본적으로 자율야구, 경제학의 영역으로 치면 '보이지 않는 손'을 맹신하는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우월한 개인으로 구성된 미국 팀은 선수들이 최선만 다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믿음은 오늘처럼 스타 플레이어가 출전한 경기에서 훨씬 더 확고해 진다. 최소한 미국 대표팀에서 감독의 역할이란 배팅 오더를 짜고, 선발 투수를 결정하는 정도의 역할만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한해 162경기를 치르는 메이저 리그 단일팀의 감독이라면 좀 더 세세한 간섭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역 리그 감독도 아닌 데이비 존슨이 "지터 이리오고, 던 저리 가!" "오스왈트 내려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 뿐더러, 결과적으로 합리적이지도 못한 가정이다.
만일 데이비 존슨이 적극적으로 게임에 간섭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경기 결과는 더 나빠졌을 것이다. 애초에 경유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고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미국 선수들의 야구관은 확고해서, 괴짜 감독 하나가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꾸려고 들다가는 도리어 역효과만 낳을 뿐이다.
나는 적어도 올림픽이나 WBC처럼 생소한 팀과의 단기전이라면 감독은 게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함을 믿는다. 어떤 스포츠보다 복잡한 야구를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해체하기보다 그 복잡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개인보다 팀이 중요함을 믿어야 하고, 때론 열등한 개인이 팀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때로는 팀을 위해 개인이 희생될 수 있어야 하며, 희생된 개인은 그것을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미국 야구가 일본 야구와의 단기전에 승리하려면 미국의 야구관을 수정해서 경기에 임하든가, 지금의 야구관을 견지한 대가로 수많은 연습 경기를 치르고, 단체 훈련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특별한 간섭이나 개입이 없더라도 팀이 구성원의 자율적인 조정으로 굴러갈 수 있는 상태로 팀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고, 결과는 우리가 본 그대로다. (그런 면에서 오늘 패배로 데이비 존슨이 공식 바보로 임명된 것은 그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단기전에 승리할 준비를 거의 마친 팀처럼 보인다. 그들을 경제학파로 비유하자면 케인즈 학파에 가깝다. 게임을 풀리지 않을 때 감독의 사인은 분주해진다. 투수코치는 장내의 핫도그장수 만큼이나 부산하게 마운드를 드나든다. 이치로가 경기에 임하는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한국에겐 악몽과도 같은) 니시오카의 대표 팀승선을 막은 것이나, 한 팀의 에이스 급 투수가 원 포인트 릴리프의 임무를 마치고 기뻐하며 덕 아웃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왜 일본이 강한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세계 최강이라 여겨지는 미국과 쿠바 야구를 차례로 침몰시킨 일본 야구. 이쯤이면 일본을 이길 팀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천적은 있었으니 바로 한국이다.
최근 눈에 드러나는 일본에 대한 한국 야구의 우위를 보고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어떤 때는 한국의 야구팬들조차 신기해하며 들떠 묻는다.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답변은 정신력의 문제, 더 파고들자면 역사적 과거사로 인한 양국 선수들이 받는 심리적인 영향을 이유로 드는 것이다. 흡사 야구의 역사주의적 관점이라 설명해도 좋을 이 가설은 별 볼일 없는 폴란드가 독일 축구만 만나면 강해지는 것이나, 1998년 월드컵에서 16강에 탈락한 이란이 미국을 꺾자 줄리메 컵을 들어올리기라도 한 듯 행동한 것만 봐도 그럴듯해 보인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한 수 아래인 대만 야구에 고전하는 것도 이런 가설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일본을 꺾었던 모든 한국 감독들의 멘트 "개개인의 기량은 일본이 더 낫지만..." 을 생각하더라도,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를 만났을 때 조금 더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처럼 보인다. 반대로 일본 야구가 한국 야구를 만났을 때 조금은 약해진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사실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그 속에는 '야구 기량 외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그러니까 엄청난 분석을 통해 김광현의 미소를 앗아간 일본 야구를 생각할 때, "모든 것은 정신력의 문제랍니다" 하고 말하는 건 촌스러워 보인다. 그것도 한 두 번도 아닌 수차례의 반복된 승리를 두고 "하하, 이번에도 정신력이지요" 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신력의 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과연 그것이 모든 승리의 공을 돌릴 만큼 대단한 것인가? 내 대답은 '아니오'다. 제 아무리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해도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 팀이 일본의 최정예 팀을 꺾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왜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만 만나면 강해지는가?" 내 답은 간단하다. "한국 야구 대표 팀이 일본 야구 대표 팀보다 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질문에 어폐가 있다. 왜 한국은 일본만 만나면 강해지는가?는 "왜 한국 대표 팀은 강한가?"로 바뀌어야 하며,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의 천적이라는 표현도,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에 강하다 정도로 수정돼야 옳다. 한국 야구는 원래 강한 탓에, 일본이라는 특정 상대를 만나서도 언제나처럼 더 많이 승리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어느 팀에게도 승리할 수 있는 팀을 두고 어떤 팀의 '천적'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이 간명한 결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개 거품을 물고 늘어질지도 모른다. 다소 폭력적인 사람이라면 "미친 소리네요. 일본 선수 연봉이 얼마인 줄 아세요? 메이저리거는 몇 명 인줄 아시나요?" 라고 침을 튀길 것이고, 그보다 예의 바른 사람이라면 "김인식 감독님도 일본의 능력이 낫다고 인정했습니다만..." 하고 의아한 듯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론 모두 한국 야구 대표 팀의 강함을 부정하는 논거로 쓰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생각을 처음으로 돌려보자. 나는 미국 야구선수의 개인적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단기전에서 일본 야구는 결코 미국 야구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두고 최소한 단기전에서 일본 야구는 미국 야구보다 강하다고 했다. 만일 이 의견에 동조한다면 똑같은 논리로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보다 강하다고 해서 문제될 이유가 있는가? 연봉이 낮고 (시장이 작을 뿐이다), 메이저리거 숫자가 적고 (진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야구 환경이 열악하다 해서 (그저 슬프다)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보다 강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우리의 승리 앞에 습관처럼 "실제로는 일본이 더 강합니다만..." 식의 불필요한 겸손구를 덧 붙여야 하는가? 왜 일본이 미국을 꺾을 것을 확신했던 사람들조차 한국이 승리하기 위해선 야구 외의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자기비하다. 그것도 지나칠 정도의.
재차 말하지만 한국 야구 대표 팀이 선전하는 것은 그들이 강한 팀이기 때문이다. 흡사 그들은 아담 스미스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에게서 우성형질만을 받고 태어난 자식처럼 플레이 한다.
한국 야구는 미국 야구만큼 강력하고, 일본 야구만큼 정교하다. 염세주의자는 이 말을 비틀어 "한국 야구는 미국 야구보다는 약하고, 일본 야구보다는 투박하다"고 말하겠지만, 그 역시도 최근의 한국 대표 팀의 플레이를 봐 왔다면 이런 비아냥거림이 의미 없는 트집에 불과함을 자인할 것이다.
한국 야구는 역사적으로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유전적으로 한국인의 체형은 일본과 다르다. 선천적으로 일본 야구 선수보다 파워가 좋은 한국 선수는 좀 더 멀리 타구를 날릴 수 있고, 좀 더 묵직한 공을 던질 수 있다. 빅 볼과 스몰 볼의 장점을 조화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것이 한국 야구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의 기술 편차 역시 줄어든 상태다. 아니, 이제는 거의 없다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른다. 기술은 공개되어 있고, 후발 주자라 해도 노력하면 습득할 수 있다. 다행히 기술이란 놈은 무한으로 성장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지는데,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일본의 기술은 정체했고, 한국의 기술은 발전했다.
그리고 2009년 즈음에 와선 기술의 미묘한 차이만으로는 승부가 갈리지 않을 정도가 됐다. 이제는 십 수 년전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선배들이 하수의 일본 사람들에게 물었던 질문 "포크볼이 대체 뭔가요?" "레벨 스윙은 뭐고 다운 스윙은 뭐죠?" 식의 굴욕적인 질문은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반대로 물으려 드는 것은 일본이다. "한국의 거포들은 왜 그렇게 덩치가 큽니까?" 오히려 극복하기 힘든 것은 이쪽의 질문이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그랬습니다만..." 이라는 답에 그들이 어떤 대책을 강구할 수 있겠는가?
일본이 한국의 야구보다 우월하다는 논거인 리그 수준의 차, 연봉의 차이야 말로 '야구 외적인 문제'다.
김태균이 무라타 보다 연봉이 적은 것이 김태균의 문제인가? 이승엽이 메이저리거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후쿠도메보다 못한 타자인가? 질 높은 용병이 한국 보다 일본 리그를 택하는 것이 한국 리그의 수준이 낮기 때문인가? 앞으로는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의 시합의 최종 스코어에 양국의 GDP나 고교 야구부 숫자를 계수화해 곱해야만 합당한가?
한국의 대부분의 야구팬들은 오늘 미국과 일본의 4강전에서 미국이 승리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일본은 질렸어요" 라든가 "미국 야구를 꺾어야 더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는 식의 이유를 들었지만 나는 그런 이유를 믿지 않는다.
그들이 미국의 승리를 간절히 원했던 까닭은 우리로서는 미국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본이 미국보다 나은 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마음 한 구석에선 아직도 일본 야구는 한국 야구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고개를 내 저으며, "미국에게 지는 건 용서가 되지만 일본에게 지는 것은 용서가 안 되니까 선수들의 부담이 가중될 거에요" 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승부에 대한 부담감이 강한 쪽은 우리보다 일본이다. 상식적으로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상대가 자신보다 강함을 알았을 때 누가 더 움츠려 들 것인가? "확실히 내 쪽이 우위입니다" 라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던 자가 실제로는 자신이 더 약함을 알았을 때 기분이 어떨 것인가?
요컨대 우리가 실력도 우위에 있는 데다 부담감마저 상대가 많다면 어느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가? (틀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해외 배팅 사이트를 제외한다면) 모든 정황증거가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음에도 한국의 많은 야구팬이 일본 야구에 대한 병적 불안에 사로잡힌 것을 보는 것만큼 신기한 일도 없어 보인다.
"한국이 일본보다 조금 강하니까 승리할 확률이 높아요. 혹시 진다면 그게 스포츠인 거고요"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우리 야구의 강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그토록 대단한 용기를 필요한 일인가?
지금의 한국 대표 팀은 일본보다 강하다고 당당하게 말하자. 수십 년의 야구 역사 차이를 뒤로 하고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멋지게 성장했는지를 뿌듯하게 지켜보자. 이와쿠마의 대단함을 칭송하기 전에 봉중근 역시 위대한 투수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게임을 즐기자.
이게 어려운 일인가? 내 생각에 이 정도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곤 통계를 보고 읽어 내려가는 것뿐인 미국 팀의 누군가도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인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뒤로하고 내일이면 우리 야구에 환희의 물결이 넘쳐날 것을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한국 야구를 신뢰할 수 있다고 당당히 인정하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을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언젠가 또 다른 중요한 한일전이 열리면 무더기의 불안이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것 역시 믿는다.
'한국 야구의 강함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야구팬은 한국의 야구팬이다'라는 아이러니는 대체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압도적인 전적을 기록해야 우리 야구의 강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까?
차분히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동안 우리 야구 대표 팀이 어떤 경기를 해 왔던가?
이번 WBC 즐거우신가요?
우리는 강하므로 승리할 것이다
왜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에 승리하는가?
또 일본이다. 야신도, 로작두도, 그리고 22년 동안 야구를 봐온 나도 예상했던 결과라 놀랍지는 않다. 한국과 일본의 승자가 제 2회 WBC의 주인이 될 것이고, 이는 쿠바가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이상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상대로 오늘 일본은 미국을 꺾었다. 프로 선수가 주축이 된 미국 야구팀은 집중한 일본을 웬만해선 이길 수 없다. 좀 더 위험하게 말하자면 앞으로도 미국은 일본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단기전으로 한정 한다면 일본 야구는 미국 야구보다 강하다.
설령 라이언 하워드가 나오고, 조바 쳄벌레인이 나오고, 린스컴이 출전한다 해도, 그래서 가슴팍에 Dream이라는 글자를 크게 박아 넣는다고 해도, 그들이 야구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수행하는 사도처럼 행동한다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게임에서 미국이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WBC 1회 때처럼 심판의 힘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심판의 힘에 기대기엔 그들의 양심이 허락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이번 승부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꼈거나) 혹자는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메이저 리그 단일팀을 주축으로 선수를 구성하면 어떻겠느냐 말하지만, 현재의 메이저 리그 단일 팀 중에 순수 미국인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가정으로 전락한다.
물론, 몇 명의 주축 멤버가 빠졌음에도 미국선수들의 능력이 일본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타격스킬, 파워, 심지어 수비 능력까지도 정상적인 상태의 미국 선수들은 일본 선수들에 비해 우월하다.
일본을 평정한 유격수였던 마쓰이 가즈오는 미국으로 건너오자 "2루 수비조차 의심스럽다" 는 평을 들어야 했고 무결점의 타자처럼 보였던 후쿠도메는 "F*ck U Do me"로 불려야 하는 자신의 이름을 저주해야만 했다. 마쓰이 히데키의 불완전한 성공을 차치하고 야수 중에 일본에서 성공한 거의 유일한 선수라 할 수 있는 이치로 스즈키는 어디까지나 '예외'의 영역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보다 강했고, 앞으로도 강할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열등*9가 우등*9보다 클 수 있다니? 경제학의 영역에선 쉽게 설명하기 힘든 일이지만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내가 아는 한 세상 어떤 스포츠도 야구만큼 '조직화' '분업화' '팀워크' '전략'이 중요시되는 스포츠는 없다. 야구란 세포가 아닌 조직의 경기, 조직이 아닌 기관의 경기인 것이다.
이번 대회 미국이 선수를 선발한 방식을 살펴보자.
일단 "나는 야구보다 우리 가족이 중요해요" "나는 국가보다 우리 팀이 더 중요합니다" 라고 말하는 자를 제외하고, 서른 개의 구단에서 뛰는 선수들의 기록이 담긴 커다란 통계표를 뽑아든다. 그리고 아주 단순한 선언으로 야구의 신을 능멸한다. "미국 대표팀의 선수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외야수 / 내야수 / 투수가 그들이죠"
나는 아담 던이 선발 우익수로 출전한 오늘의 라인업을 보고 순간 머리가 멍하다 못해 띵한 느낌을 받았다. 아담 던은 외야수 중 가장 수비 부담이 적은 좌익수 수비조차 버거워 하는 선수가 아니던가? 그런 선수에게 무려 우익수라니... 우리나라로 치면 이대호를 유격수 자리에 넣어 놓고 "자, 이제 일본을 이길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라고 선언하는 꼴이다.
만일 오늘 경기에서 미국이 일본에 승리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었다면, 지터 대신 롤린스가 선발 유격수로, 아담 던을 지명타자로, 우익수 자리에는 빅토리노를 기용했어야 했다.
만일 지터가 "저는 캡틴입니다. 게다가 스칼렛 요한슨, 제시카 알바도 찼던 남자고요. 왜 내가 대타 따위를 해야 하는 겁니까?" 라고 대든다면 마크 데로사 자리에 아담 던을 놓고, 지터를 지명 타자로 돌렸어야 했다. (물론 오늘의 오스왈트라면 어떤 수를 썼어도 미국은 일본에게 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국의 감독 데이비 존슨의 담대함은 가히 성스러웠다.
그는 경기가 시작되자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놔두는 게 상책입니다" 라고 말하고 벤치로 돌아가 팔짱을 끼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눈을 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익숙한 주문을 외는 것뿐이었다. 물론 과장이 섞인 얘기지만 충격적인 것은 실제도 이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미국팀 감독을 맡아 두 번이나 세계 야구팬에게 "과연 미국의 리그가 세계 최고의 리그인가?" 라는 회의를 던져준, 데이비 존슨이 결코 바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는 훌륭한 야구 선수였고, 또 제법 알아주는 감독이었다. 최소한 야구에 있어서라면 일개 야구팬에 불과한 나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는 아담 던이 외야수, 그것도 우익수를 맡기에는 신비로울 만큼 느리고 어깨가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고, 경기 시작 전 마크 데로사의 TPX 1루 미트가 지나치게 새 것이라는 사실도 간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담 던을 우익수로, 마크 데로사를 1루수로 기용했다. 나는 이 설명하기 힘든 결정이 미국 야구가 일본 야구를 이길 수 없는 이유를 함축한다고 믿는다.
미국의 야구는 기본적으로 자율야구, 경제학의 영역으로 치면 '보이지 않는 손'을 맹신하는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우월한 개인으로 구성된 미국 팀은 선수들이 최선만 다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믿음은 오늘처럼 스타 플레이어가 출전한 경기에서 훨씬 더 확고해 진다. 최소한 미국 대표팀에서 감독의 역할이란 배팅 오더를 짜고, 선발 투수를 결정하는 정도의 역할만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한해 162경기를 치르는 메이저 리그 단일팀의 감독이라면 좀 더 세세한 간섭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역 리그 감독도 아닌 데이비 존슨이 "지터 이리오고, 던 저리 가!" "오스왈트 내려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 뿐더러, 결과적으로 합리적이지도 못한 가정이다.
만일 데이비 존슨이 적극적으로 게임에 간섭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경기 결과는 더 나빠졌을 것이다. 애초에 경유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고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미국 선수들의 야구관은 확고해서, 괴짜 감독 하나가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꾸려고 들다가는 도리어 역효과만 낳을 뿐이다.
나는 적어도 올림픽이나 WBC처럼 생소한 팀과의 단기전이라면 감독은 게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함을 믿는다. 어떤 스포츠보다 복잡한 야구를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해체하기보다 그 복잡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개인보다 팀이 중요함을 믿어야 하고, 때론 열등한 개인이 팀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때로는 팀을 위해 개인이 희생될 수 있어야 하며, 희생된 개인은 그것을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미국 야구가 일본 야구와의 단기전에 승리하려면 미국의 야구관을 수정해서 경기에 임하든가, 지금의 야구관을 견지한 대가로 수많은 연습 경기를 치르고, 단체 훈련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그래서 특별한 간섭이나 개입이 없더라도 팀이 구성원의 자율적인 조정으로 굴러갈 수 있는 상태로 팀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고, 결과는 우리가 본 그대로다. (그런 면에서 오늘 패배로 데이비 존슨이 공식 바보로 임명된 것은 그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단기전에 승리할 준비를 거의 마친 팀처럼 보인다. 그들을 경제학파로 비유하자면 케인즈 학파에 가깝다. 게임을 풀리지 않을 때 감독의 사인은 분주해진다. 투수코치는 장내의 핫도그장수 만큼이나 부산하게 마운드를 드나든다. 이치로가 경기에 임하는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한국에겐 악몽과도 같은) 니시오카의 대표 팀승선을 막은 것이나, 한 팀의 에이스 급 투수가 원 포인트 릴리프의 임무를 마치고 기뻐하며 덕 아웃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왜 일본이 강한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세계 최강이라 여겨지는 미국과 쿠바 야구를 차례로 침몰시킨 일본 야구. 이쯤이면 일본을 이길 팀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천적은 있었으니 바로 한국이다.
최근 눈에 드러나는 일본에 대한 한국 야구의 우위를 보고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어떤 때는 한국의 야구팬들조차 신기해하며 들떠 묻는다.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답변은 정신력의 문제, 더 파고들자면 역사적 과거사로 인한 양국 선수들이 받는 심리적인 영향을 이유로 드는 것이다. 흡사 야구의 역사주의적 관점이라 설명해도 좋을 이 가설은 별 볼일 없는 폴란드가 독일 축구만 만나면 강해지는 것이나, 1998년 월드컵에서 16강에 탈락한 이란이 미국을 꺾자 줄리메 컵을 들어올리기라도 한 듯 행동한 것만 봐도 그럴듯해 보인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한 수 아래인 대만 야구에 고전하는 것도 이런 가설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일본을 꺾었던 모든 한국 감독들의 멘트 "개개인의 기량은 일본이 더 낫지만..." 을 생각하더라도,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를 만났을 때 조금 더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처럼 보인다. 반대로 일본 야구가 한국 야구를 만났을 때 조금은 약해진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사실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그 속에는 '야구 기량 외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그러니까 엄청난 분석을 통해 김광현의 미소를 앗아간 일본 야구를 생각할 때, "모든 것은 정신력의 문제랍니다" 하고 말하는 건 촌스러워 보인다. 그것도 한 두 번도 아닌 수차례의 반복된 승리를 두고 "하하, 이번에도 정신력이지요" 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신력의 문제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과연 그것이 모든 승리의 공을 돌릴 만큼 대단한 것인가? 내 대답은 '아니오'다. 제 아무리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해도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 팀이 일본의 최정예 팀을 꺾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왜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만 만나면 강해지는가?" 내 답은 간단하다. "한국 야구 대표 팀이 일본 야구 대표 팀보다 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질문에 어폐가 있다. 왜 한국은 일본만 만나면 강해지는가?는 "왜 한국 대표 팀은 강한가?"로 바뀌어야 하며,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의 천적이라는 표현도,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에 강하다 정도로 수정돼야 옳다. 한국 야구는 원래 강한 탓에, 일본이라는 특정 상대를 만나서도 언제나처럼 더 많이 승리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어느 팀에게도 승리할 수 있는 팀을 두고 어떤 팀의 '천적'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이 간명한 결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개 거품을 물고 늘어질지도 모른다. 다소 폭력적인 사람이라면 "미친 소리네요. 일본 선수 연봉이 얼마인 줄 아세요? 메이저리거는 몇 명 인줄 아시나요?" 라고 침을 튀길 것이고, 그보다 예의 바른 사람이라면 "김인식 감독님도 일본의 능력이 낫다고 인정했습니다만..." 하고 의아한 듯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반론 모두 한국 야구 대표 팀의 강함을 부정하는 논거로 쓰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생각을 처음으로 돌려보자. 나는 미국 야구선수의 개인적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단기전에서 일본 야구는 결코 미국 야구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두고 최소한 단기전에서 일본 야구는 미국 야구보다 강하다고 했다. 만일 이 의견에 동조한다면 똑같은 논리로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보다 강하다고 해서 문제될 이유가 있는가? 연봉이 낮고 (시장이 작을 뿐이다), 메이저리거 숫자가 적고 (진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야구 환경이 열악하다 해서 (그저 슬프다) 한국 야구가 일본 야구보다 강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우리의 승리 앞에 습관처럼 "실제로는 일본이 더 강합니다만..." 식의 불필요한 겸손구를 덧 붙여야 하는가? 왜 일본이 미국을 꺾을 것을 확신했던 사람들조차 한국이 승리하기 위해선 야구 외의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자기비하다. 그것도 지나칠 정도의.
재차 말하지만 한국 야구 대표 팀이 선전하는 것은 그들이 강한 팀이기 때문이다. 흡사 그들은 아담 스미스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에게서 우성형질만을 받고 태어난 자식처럼 플레이 한다.
한국 야구는 미국 야구만큼 강력하고, 일본 야구만큼 정교하다. 염세주의자는 이 말을 비틀어 "한국 야구는 미국 야구보다는 약하고, 일본 야구보다는 투박하다"고 말하겠지만, 그 역시도 최근의 한국 대표 팀의 플레이를 봐 왔다면 이런 비아냥거림이 의미 없는 트집에 불과함을 자인할 것이다.
한국 야구는 역사적으로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유전적으로 한국인의 체형은 일본과 다르다. 선천적으로 일본 야구 선수보다 파워가 좋은 한국 선수는 좀 더 멀리 타구를 날릴 수 있고, 좀 더 묵직한 공을 던질 수 있다. 빅 볼과 스몰 볼의 장점을 조화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것이 한국 야구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의 기술 편차 역시 줄어든 상태다. 아니, 이제는 거의 없다고 표현해도 좋을지 모른다. 기술은 공개되어 있고, 후발 주자라 해도 노력하면 습득할 수 있다. 다행히 기술이란 놈은 무한으로 성장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지는데,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일본의 기술은 정체했고, 한국의 기술은 발전했다.
그리고 2009년 즈음에 와선 기술의 미묘한 차이만으로는 승부가 갈리지 않을 정도가 됐다. 이제는 십 수 년전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선배들이 하수의 일본 사람들에게 물었던 질문 "포크볼이 대체 뭔가요?" "레벨 스윙은 뭐고 다운 스윙은 뭐죠?" 식의 굴욕적인 질문은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반대로 물으려 드는 것은 일본이다. "한국의 거포들은 왜 그렇게 덩치가 큽니까?" 오히려 극복하기 힘든 것은 이쪽의 질문이다. "원래 태어날 때부터 그랬습니다만..." 이라는 답에 그들이 어떤 대책을 강구할 수 있겠는가?
일본이 한국의 야구보다 우월하다는 논거인 리그 수준의 차, 연봉의 차이야 말로 '야구 외적인 문제'다.
김태균이 무라타 보다 연봉이 적은 것이 김태균의 문제인가? 이승엽이 메이저리거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후쿠도메보다 못한 타자인가? 질 높은 용병이 한국 보다 일본 리그를 택하는 것이 한국 리그의 수준이 낮기 때문인가? 앞으로는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의 시합의 최종 스코어에 양국의 GDP나 고교 야구부 숫자를 계수화해 곱해야만 합당한가?
한국의 대부분의 야구팬들은 오늘 미국과 일본의 4강전에서 미국이 승리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일본은 질렸어요" 라든가 "미국 야구를 꺾어야 더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는 식의 이유를 들었지만 나는 그런 이유를 믿지 않는다.
그들이 미국의 승리를 간절히 원했던 까닭은 우리로서는 미국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본이 미국보다 나은 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마음 한 구석에선 아직도 일본 야구는 한국 야구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고개를 내 저으며, "미국에게 지는 건 용서가 되지만 일본에게 지는 것은 용서가 안 되니까 선수들의 부담이 가중될 거에요" 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승부에 대한 부담감이 강한 쪽은 우리보다 일본이다. 상식적으로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상대가 자신보다 강함을 알았을 때 누가 더 움츠려 들 것인가? "확실히 내 쪽이 우위입니다" 라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던 자가 실제로는 자신이 더 약함을 알았을 때 기분이 어떨 것인가?
요컨대 우리가 실력도 우위에 있는 데다 부담감마저 상대가 많다면 어느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가? (틀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해외 배팅 사이트를 제외한다면) 모든 정황증거가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음에도 한국의 많은 야구팬이 일본 야구에 대한 병적 불안에 사로잡힌 것을 보는 것만큼 신기한 일도 없어 보인다.
"한국이 일본보다 조금 강하니까 승리할 확률이 높아요. 혹시 진다면 그게 스포츠인 거고요"라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우리 야구의 강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그토록 대단한 용기를 필요한 일인가?
지금의 한국 대표 팀은 일본보다 강하다고 당당하게 말하자. 수십 년의 야구 역사 차이를 뒤로 하고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멋지게 성장했는지를 뿌듯하게 지켜보자. 이와쿠마의 대단함을 칭송하기 전에 봉중근 역시 위대한 투수임을 인정하자.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게임을 즐기자.
이게 어려운 일인가? 내 생각에 이 정도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곤 통계를 보고 읽어 내려가는 것뿐인 미국 팀의 누군가도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인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뒤로하고 내일이면 우리 야구에 환희의 물결이 넘쳐날 것을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한국 야구를 신뢰할 수 있다고 당당히 인정하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을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언젠가 또 다른 중요한 한일전이 열리면 무더기의 불안이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것 역시 믿는다.
'한국 야구의 강함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야구팬은 한국의 야구팬이다'라는 아이러니는 대체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압도적인 전적을 기록해야 우리 야구의 강함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까?
차분히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동안 우리 야구 대표 팀이 어떤 경기를 해 왔던가?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에 승리해서 강한 것이 아니라,
한국 야구는 강하므로 일본 야구에 승리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강하다. 강하므로 승리할 것이다" 사실은 정말 쉬운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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