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 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슬픔. 그렇다.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다. 슬픔을 느끼자,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은희경,
슬픔을 느끼자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 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슬픔. 그렇다.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다.
슬픔을 느끼자,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