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김현수200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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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분쟁

 


이 분쟁을 이해하는 데는 역시 성서라는 부분에서 찾지 않으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그들은 구약에 예견되었듯이 아브라함의  한 핏줄로써  적서자로 출생되어 장구한 세월을  반목과 질시 서로 다른 배타적인 성격의 종교를 갖고 있고 같은 언어 같은 음식 같은 의상과 풍습을 갖고 이렇게 철천지원수가 된 민족은 아마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


역사적 배경


AD77년 유대는 로마에 의해 마사다 전투에서 완전 패망하고 지도상에 이스라엘은 흔적도 남지 않았고 이 민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 지역에서 시나고그를 만들어 살아왔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무렵 이스라엘 민족지도자 대표 (벤구리온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들은 영국과 협상을 시도하여 전쟁비용을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 종전 후 옛 유대 땅에 이스라엘 건국을 약속받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안 독일 히틀러는 가공할만한 유대인 학살을 감행하게 된다. 종전 후 이스라엘의 건국은 2천 년 가까이 나라를 잃고 전 세계를 유랑하던 유대인들에게는 실지 회복이었지만,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온 원주민(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는 비극이었다.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 종결 6개월을 앞둔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가결해 팔레스타인 모든 지역(2만 6천323㎢)의 56.47%를 이스라엘에, 42.88%를 아랍국가에, 나머지 0.65%에 해당하는 예루살렘을 국제 관리지구로 할당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대부분인 87.5%를 소유하고 있던 아랍인들은 당연히 이 분할 안을 거부했고, 유대인들은 이를 수용해 이듬해 5월14일 건국을 성사시켰다. 국제 사회의 지지를 받을 길이 없는 아랍인들이 당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력뿐이었다.


분쟁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충돌은 1947년 UN이 팔레스타인 지역 일부를 유대인에게 할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아랍군의 공격으로 촉발된 제1차 중동전을 시작으로 1973년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제4차 중동전까지 양측은 모두 네 차례의 전면전을 치렀다. 이후 국제사회의 중재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 간에 수많은 평화협상이 벌어졌지만 양측의 불신과 갈등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48: (1차중동전) 아랍연합((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요르단) –이스라엘)

강대국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 승리


1956: (수에즈운하분쟁 2차중동전)(이집트-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연합군)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이스라엘 선박의 무역을 금지하면서 촉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완전 점령하나, 유엔의 권고로 철군. 이스라엘군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한 계기


1967: (3차중동전) (6일전쟁)(이스라엘-아랍연합군)

이스라엘 공군의 이집트 공군기지 기습.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골란 고원까지 점령하면서 영토가 3배나 늘어남. 이 전쟁에 대한 반대급부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PLO)가 조직되었다. PLO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무력투쟁을 주도했고, 이 투쟁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서구 언론을 통해 `테러'라는 오명을 얻었다. PLO의 수장인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들은 1988년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가자와 서안 지역으로 구성되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는데, 이는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돌려받아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고, 나머지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해 두 국가로 공존한다는 구상이었다.


1973: (4차중동전) (욤키프르전쟁)(아랍연합군- 이스라엘)

아랍 연합군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유대인의 최대명절인 욤키푸어에 일으킨 전쟁. 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무기지원은 소련이 하고, 재정 지원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가 했는데, 서방국들의 지원으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아랍 산유국들은 원유수출을 제한하면서 1차 오일쇼크 발생.


1979-1982

캠프데이비드에서의 협정으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게 시나이 반도를 단계적으로 돌려준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화해한 첫 번째 아랍국가가 된다.

1982: (이스라엘-레바논전쟁)

레바논의 시아파 정당인 헤즈볼라(헤즈볼라는 레바논에 본부를 두고 있던 PLO를 몰아내기 위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해 남부지역을 점령한 이스라엘에 대한 지속적인 게릴라 공격을 감행해 2000년 5월 이스라엘의 철군을 이끌어 낸 바 있음. 민병조직을 갖고 있으면서 레바논 제도 정치권에도 진출한 헤즈볼라는 현재 남부 레바논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음)를 제거하려는 의도


1987-1993: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전쟁)

1988년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 태동하게 됨. (하마스: 팔레스타인 계 이슬람 저항운동단체인 동시에 정당. 팔레스타인의 민중 봉기인 ‘제1차 인티파다’가 발생한 87년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창설. 하마스는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의 약칭인 동시에 ‘열정·용맹’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1982-2000: (이스라엘 레바논 전쟁)

2000-2007: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2차 전쟁)

2006 :(이스라엘- 파타- 하마스전쟁)

2007년5월 레바논분쟁


2008년12월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모든 실지의 회복을 주장했고, 2008년1월 총선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장악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공격에 나선 배경에는 눈엣가시 같은 하마스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


주요 분쟁지역


가자 지구


중동의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위치하고 지중해에 면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통치 구역이자, 웨스트뱅크와 함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잠재적 영토로 상정되어 있는 곳이다. 역사가 오래된 곳이며, 고대 필리시테인의 거주지였다. 강경 정파’ 하마스가 장악한 자치지역.

이스라엘 건국 후 1948년 발발한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에 귀속됐던 가자지구는 67년 3차 중동전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2005년 가자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의 주민을 모두 이주시키고 군 병력을 철수하며 점령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지난해 6월 팔레스타인 무장정치조직 하마스가 파타계열의 보안군 병력을 몰아내고 가자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의 고삐를 죄었다. 이스라엘의 철저한 봉쇄조치로 ‘가자지구는 하늘만 열린 감옥이 됐다.


웨스트뱅크


중동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행정 구역이다. 서안 지구라고도 한다. 가자 지구와 함께 잠재적으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영토로 상정되어 있다.

국제법상 어느 나라의 영토도 아니나, 실질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군사 통제 하에 놓여져 있다. 웨스트 뱅크 내부에는 유대인 정착촌이 군데군데 산재해 있으며, 이들 정착촌의 보호를 구실로 이스라엘군이 개입한다. 일부는 웨스트 뱅크를 이스라엘로 병합된 영토 또는 이스라엘의 영토라고 하나, 웨스트 뱅크 주민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국민으로서의 어떤 권리도 주어져 있지 않고 있고, 유대인 정착촌이외에 이스라엘의 주권이 웨스트 뱅크주민을 보호해주는 일이 없으므로 사실상 비 주권지역에 가깝다.

요르단 강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 북, 남쪽으로는 이스라엘 영토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로는 요르단과 접경 .


예루살렘 동쪽지구


예루살렘 구도시를 성역으로 이를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당시  점령한 지구인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신전이 있어 항시 분쟁의 소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