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전 (단편)

어둠처럼하얀200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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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塼(전)-





때는 늦가을이었다.
시린 바람이 불어 움츠러든 몸처럼 풍요롭던 마음도 조금씩 움츠러들고 있었다.
여유롭게 넓게 펼쳐졌던 노을빛파스텔 하늘엔 낮게 깔린 초라한 겨울이 조금씩 물들고 있었고
산과들 역시 차츰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저 만치서 검은 염소 두 마리가 돌부리를 차며 언덕을 올라온다.
언덕 아래로는 금색 장관을 이루었을 논과 밭이 누런 볏짚을 덮고 누워있었고
언덕을 따라 자갈이 가득 넘치는 좁은 시냇물이 차가울 만큼 맑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흰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염소의 입김에서 설익은 서리가 피어올랐다.
삶이 힘든 겐가 아니면 몸이 힘든 겐가.
저 한줌의 입김에서 뜨거운 몸속의 고뇌가 느껴진다.
쩔룩거리며 뒤를 쫓는 어린 염소 눈망울에 슬피 서린 눈물은
차가운 바람결에 얼어 가시로 떨어지고
언덕을 따라 졸졸 흐르는 냇물은 냉정한 웃음소리만 흘리누나....
저리도 서러운 눈물 잠시라도 달래주려 잠시라도 멎어 줄만 하건만
냉정한 저 웃음소리 끊이질 않는구나.


가을빛 언덕을 오르던 염소들 눈앞엔 늑대 한 마리가 서있다.
우락부락한 모습은 아니더라도 날카로운 이빨은 날이 번뜩이는 한 자루 칼처럼 위용을 뽑낸다. 늑대의 표정은 무표정하다. 언제나 했던 일처럼 늑대는 자기가 할일을 하고자 하렴이다.
흰 수염의 늙은 염소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린 쩔룩이 염소 앞을 지키며 섰다.
늙은 염소는 떨림이 없었다. 무표정한 늑대보다도 더욱 무표정한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무슨 볼일이신가.”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신 같은 존재에게 어떻게 저런 여유가 나올 수 있을까?
늑대의 무표정엔 섬광처럼 스치는 이빨이 번뜩였다.

“무슨 연유로 하늘같이 고귀하신분이 이런 외간까지 나와 계신지요. 라고 물어야지! 이 버릇없는 쭈그렁 탱이 할배 놈아!”

늙은 염소는 자신의 처지는 생각지도 않은 듯 알 수 없는 웃음만 보였다.
늙은 염소는 자신이 아무리 늙었다 해도 젊은 늑대에게 대접받을 수 없는 절대관계를 망각한듯했다.
노예와 주인과의 관계처럼 자신은 먹이의 자세로 살아야하고 언제고 주인이 원하면 목숨을 내어주어야 하는 절대관계. 자신은 그 절대관계의 하급계층에 있다는 것을 잊은듯했다.

“그래, 무슨 연유로 하늘같이 고귀하신분이 이런 외간까지 나오게 되신 겐가.”

염소는 늑대를 어린아이 다루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고귀하신분이 뭣 하러 이런 변두리까지 어슬렁대며 나왔느냐’ 하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그런 뜻이 숨어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한 말투였다.
그래서 멍청한 늑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마지막 부분이 높임말이 아닌 것 같은 거슬림뿐.
약간의 비위가 거슬린 늑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몸이 몹시 배가 고픈 터에 마침 네놈들이 이곳을 지나가 주더구나. 너희 같은 놈들을 발톱부터 산체로 오그작 오그작 씹어 먹어 주러 내려오셨단다. 크 흐흐흐”

처음의 무표정하던 표정은 간데없고 흉폭한 얼굴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어린염소는 왜 무서운지도 모르면서도 떨고 있었다. 그저 본능에 의해 전해져 오는 무서움 때문인지 공포를 못 이겨 오줌을 지렸다.
가을빛으로 물든 벼 이삭처럼 오줌역시 가을빛이었다. 심오한 이치다. 가을에만 가을빛이 성립이 되는...
어린 염소의 눈을 걱정스레 가리며 늙은 염소가 또다시 점잖게 말했다.

“어찌하여 고귀하신 존재께서 한낱 염소 따위로 배를 채우려 드는 겐가?
이, 늙은이는 가죽만 남아 질겅거리는 칡뿌리만도 못하고 이 어린 것은 보시다시피 뼈다귀 밖에 없질 않나. 고귀하신 입에 우리 같은 천한 음식은 어울리질 않는다네.”

늑대는 염소의 말이 간교한 말솜씨로 자신 목숨이나 연명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늑대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나이 좀 처먹었다는 염소가 말 같지도 않은 말로 나를 꽤하려 드는 게냐?
나를 우습게 본 모양이구나. 크흐흐흐 그래 어디 말장난 짓거리 좀 더 구경해보자꾸나.
고귀하신 입에 천한 것 따윈 어울리지 않는다 했더냐?
천하고 귀하고 간에 먹으면 배가 부르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더냐! 크흐흐...
가죽만 남았든 뼈만 남았든 난 네 녀석들 털 한 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버릴 테다.”

늑대는 의기양양 했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잠시나마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
유희란 돈이든 권력이든 간에 갖은자만의 여유이리라.
늑대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낙엽쪼가리 하나가 빙글 가르면서 떨어졌다.
가을빛 산세에 가을빛 늑대라.... 어울리지 않을듯하면서도 어울리는 구나...
다시금 늙은 염소가 입을 열었다.

“허허.... 늑대선생...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려. 선생 말처럼 무엇을 먹든 간에 배가 부른 것은 마찬가지 일세. 먹으면 또다시 변으로 나온다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이고. 그렇게 보자면 먹어도 늙어 죽고 먹지 않아도 굶어 죽는다네. 결국 죽는 다는 것은 변치 않는 진리 아닌가!
죽는다는 것은 어떤 동물이고 당연한 순리일진데 자네는 어찌하여 그렇게 먹는 것에 연연 하는가!”

늑대는 당황했다.
한번 도 생각지 않아본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먹어도 죽고 먹지 않아도 죽는다.
당연한 이치다.
자신은 왜 먹으려고 기를 쓰는가!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 것을...
늑대는 염소의 교묘한 화술에 걸려버린 듯 했다.
늑대는 배가 고플 뿐이었지만 염소는 늑대가 배가 고프다 보면 결국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배가고파서 먹으려던 것을 죽지 않기 위해 먹으려는 것으로 인식을 바꿔 버린 것이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당연지사 살려면 먹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염소의 질문은 왜 살려고 하는지, 왜 먹어야 하는지를 늑대가 생각지도 못하게 삶에 대한 모두가 부질없음을 염소 자신이 미리 이유를 없애버리곤 묻는 질문이었다.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는다. 그런데 왜 먹는 것에 연연하는가!

갖은자의 여유를 부리던 늑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는 네놈은 먹어도 죽고 먹지 않아도 죽는데 왜 풀을 뜯어 처먹는 게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순간’ 안에 잡아먹겠다는 뜻이 내포된 협박성의 물음이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단 몇 초안에 목숨을 뺏을 수 있다는 협박의 효과를 더욱 올리기 위하여 늑대는 염소들과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하지만 두려워해야 할 늙은 염소의 입가엔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 체 희미한 미소만 흐르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냇물의 냉소처럼....

“우린 지금 죽음을 찾으러 가는 중이라네
어차피 찾아오는 죽음이라면 미리 찾아나서 마중을 하는 것도 매력적이잖은가
그런 연유로 나와 손주 놈은 풀 따윈 먹지 않는다네. 물론 풀 따위를 떠나서 물 한모금도 마시질 않는다네.
죽으면 그만인 것을 먹으면 무엇 하겠나. 또한 마시면 무엇 하겠나.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 것을 살면 무에 하겠나.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 것을.....”

늙은 염소는 어린 염소를 가르키며 말을 계속 이었다.

“우리도 알지 못했었다네. 이 어린것의 애비가 허무하게 죽고 그제 서야 알게 되었지.
자네도 일찌감치 깨우치는 것이 좋을 걸세. 살면 무엇 하겠나?
살면 심신만 피곤하지 않나.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프고 또 배가 고프면 이것저것 먹어야 하고
먹기만 하나? 사냥을 해야 먹을 것이 아닌가. 자네도 알다시피 사냥이란 것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이 드는가! 하루 종일 쫄쫄 굶어 배가 등가죽에 붙는 고통이 일어도 그 사냥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되느냐 이말 일세.
뭣 하러 살겠다고 매일 매일 배고픔에 시달리는 겐가 그냥 죽어버리면 아무 고통도 없는 것을.
죽으면 때 마다 배고픈 것도. 때마다 먹일 찾아다니는 번거로움도. 곧 있으면 찾아올 추위도 고통도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네. 왜 굳이 살려고 버둥치며 그 고생을 해 대는가!
우리도 마찬가지라네... 이제 곧 찾아올 겨울이 되면 어디하나 수월하게 풀을 뜯을 곳이나 있겠나. 이리 걷고 저리 걷다 동상에 걸려 얼어 죽고 말겠지.
그래서 결심하게 됐다네. 죽음을 기다리기보단 찾아 나서기로.
이 애비 놈이 먼저 보여주었다네.
죽으면 모든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을. 죽으면 얼마나 평온해 지는가를....”

한참을 생각에 잠긴 늑대.
언덕 꼭대기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빛 밤나무 잎이. 툴툴거리며 떨어지는 가을빛 밤송이가 고요한 정적 속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음을 자각시킨다.
늑대가 고개를 떨궜다.
어깨의 떨림이 보인다. 우는 것인가?
염소의 말이 그렇게나 감명 깊은 것이었나?
혹은 자신이 사냥을 하며 느꼈던, 엄동설한에 먹이를 찾아 헤메이던 고생이 떠오른 것인가?
아니다.
늑대는 웃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부터 끌어올라 폭발하는 웃음.
잔잔한 어깨의 떨림이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서 더욱 큰 떨림을 보였다.
폭발한 웃음소리에 놀라 날아 가버리는 산새들의 표정
겨울에게 먹힐 운명인 가을의 두려움을 닮았구나....
산 고등을 따라 메아리치는 웃음소리.
나무마다 하얀 눈이라도 걸려있었다면 메아리의 울림에 눈이 우르르 떨어지는 절경을 볼 수 있었으리라.
한참을 웃던 늑대가 입을 열었다.

“그래... 겨울이 다가오는구나.... 이번겨울 역시 잘 넘길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

어이 늙은이.

내 잠시나마 늙은이의 말에 넘어 갈 뻔 했는데 당신의 말엔 오류가 있어.
죽음을 찾아다니고 있다면서 왜 살려고 그렇게 버둥대는 것이지?
죽으면 고통이 없어진다면서
죽으면 모든 것이 평온해 진다면서
왜 내겐 목숨을 내놓지 않고 그렇게 설교만 해대는 거지?
그래, 네놈이 그렇게 설교한 죽음의 미학을 먼저 보여줘 봐.
내가 늙은이 네가 그렇게 찾아 헤메던 죽음을 선물해줄 테니까.
네놈이 먼저 내 앞에서 죽어 내게 교훈을 준다면 네가 설교한 그 죽으면 편해진다는 말을 믿어보마. 물론 저 꼬맹이 염소 까지 잡아먹을 필욘 없게 되겠지.
어차피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는 것.
죽으면 평온해진다는 것 모두가 네놈 말한 그대로일 것이니
나도 더 이상 살려고 바둥거리진 않을 거야.”

여지껏 유지하고 있던 늙은 염소의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정곡을 찔려버린 것이다.
멍청한 줄 알았던 늑대는 생각보다 멍청하진 않았다.
벌써 몇 일째 몇 몇의 포식자들을 괴변으로 속이며 거의 완벽한 레퍼토리를 완성해 온 염소다.
헌데 멍청한 줄로만 알았던 늑대가 그것을 간파하고는
‘허튼소리 하지 말고 네놈의 목숨만 내놓으면 손자는 살려준다.’ 라는 예기를 돌려서 예기하고 있다.
염소는 난감했다.

늙은 염소는 지금과 똑같은 상황으로 인해 가까운 얼마 전 아들까지 잃었었다.
가을 들녘 들판을 걷다 한 마리 늑대의 기습에 전부 죽을 뻔하였지만 지금처럼 똑같은 괴변으로 목숨을 연명했다.
아들목숨 댓가로 손주 녀석과 자신의 목숨은 건졌지만
또다시 둘 중하나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
지금상황에 도망쳐봐야 둘 중에 하나는 먹잇감이 될 터.
애석하게도 자신의 손주는 다리까지 절고 있었다. 운이 나쁘면 둘 다 죽는다.
추워지기 전에 남쪽으로 가면 먹을 걱정은 없을 거라던 아들놈의 말을 먹을 것 하나만 생각하고 말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 탓해본다.
염소의 땅이 꺼질듯 한 깊은 한숨이 공기 중에 얼어붙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염소.

염소의 입가엔 다시금 여유가 베어났다.

“꼭 눈으로 보아야지만 믿을 수 있는 겐가?
내 자네 같은 젊은이에게 죽음을 구걸해볼 생각을 안 해본 것이 아니라네.
생각해보게나.
이 늙은이 하나 먼저 죽겠다고 자네 같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을 더 줄 순 없지 않은가!
내 몸뚱이 내 목숨 덕에 자네 같은 젊은이가 조금의 배고픔은 덜 수 있겠 되겠지.
허나 잠시간의 배부름 뒤엔 또다시 배고픔과 고통에 허덕여야 하네.
내가 격어야 할 고통의 시간을 자네 같은 젊은이가 더 짊어지고 가야할 뿐이란 말일세.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날 잡아 잡수’하면서 목을 건넬 수 있겠나...

허나 자네는 꼭 자네는 눈으로 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니. 어쩔 수 있나.
내 자네에게 내 짐을 맡김세.”

늙은 염소는 말을 마치곤 눈을 감았다.
그리곤 한 가닥의 희망을 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 짧은 순간의 겨를에 완벽한 대답을 생각해 냈기 때문이다.
너무도 그럴 듯하게 대답을 했기에 혹시라도 늑대가 자기 꾐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눈을 감은이유도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늑대가 믿고 속아 넘어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허나 결말은 염소가 원하는 대로 끝나지 않았다.

점점 저물어 가는 시린 늦가을 하늘엔 가을빛파스텔노을이 영글고 있었고
점점 저물어 가는 시린 늦가을 들녘엔 붉은빛유채화물감이 물들고 있었다.

어린 염소는 붉은빛유채물감의 끈적임을 모른다.
어린 염소는 그것이 무얼 의미 하는지도 모른다.
허벅지부터 드러나는 뻘건 뼈다귀의 공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우그적거리는 늑대주둥이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망울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다만 꺼져가는 할배의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뿐.

어린 염소는 저 신음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안 다.
꺼져가던 어머니의 숨소리도
꺼져가던 아버지의 숨소리도
지금 꺼져가는 할배의 숨소리처럼 모두 저렇게 싸늘한 신음소리만 남기곤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다 윙윙거리는 벌레들과만 예기를 나누었고 무언지 도통 알 수 없는 역겨운 냄새만 풍겼다. 그리곤 그렇게 그곳에서 멀어져 또 길을 걷다보면 또 누군가가 저런 숨소리를 내고 또다시 역겨운 냄새만 풍겼으며 또 다시는 그와는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머물렀고 자신은 그렇게 또 걸었다. 점점 가슴이 비어 얼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외로움이란 것을 아직 모르는 염소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다시 가슴이 비어가고 있고 얼어가고 있다.

“할배.....”



싸늘히 얼어가는 가을 들녘에 싸늘히 얼어가는 염소의 가슴이 무의미한 부름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그 부름엔 슬픔이 묻어났다.
그 부름엔 눈물이 묻어났다.
한 방울 떨어진 눈물이 붉은빛수채화로 변하고
가을빛 캔버스 위엔 씨뻘건 입을 벌린 체 사납게 서있는 늑대와 가슴이 얼어버린 어린 염소한마리가 그려졌다.
어린 염소의 눈은 늑대보다 더 사나운 분노를 표출한다.



“크크크... 배부르다.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 큭큭큭....
그런 괴변으로 내가 자살이라도 할줄 알았나 보지?”

포만감과 만족감을 한웅큼 맛보았지만 늑대는 아직도 모자란 듯
아쉬움으로 물든 긴 혀로 피로 물든 긴 주둥이를 한 바퀴 둘러 핧았다.
싸늘한 가을빛 언덕이 끈적끈적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늑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위로 추벅추벅 한 걸음씩 옮긴다.
늑대의 발이 땅에 닿으면 사방으로 흩어 넓어지는 붉은 피의 요동.
차츰 늑대와 어린염소의 거리가 좁혀진다.
어린 염소의 눈은 차츰 분노를 싸늘히 얼려간다.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할아버지 역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더는 자신과 대화 할수 없게 만든 늑대에 대한 분노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은 뭐지? 나를 물기라도 하려는 거야? 큿큿큿...
할애비나 손자나 뭐 별반 다를 것 없는 똥통머리를 달고 다니는구나. 크크크크”

늑대는 자신의 사나운 얼굴을 염소의 얼굴에 들이댔다.
역겨운 피 냄새가 추잡하게 벌어진 입 틈새를 비집고 염소의 코를 찌른다.
염소는 두려움이 아닌 역겨움 때문에 뒷걸음질 친다.
늑대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줄로 착각하며 오만함을 듬뿍 담아 계속해서 역겨운 구린내를 피워댄다.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는다고? 크크크크
안 먹으면 배가고파서 죽겠으니까 먹는 거야.
살려니까 먹으려는 것이고
이렇게 예기 했으면 네 할애비가 또 물었겠지 왜 살려고 드느냐고
네 할애비 놈은 정말 어리석어 크크
네 할애비처럼 말만 번지르 하게 하는 놈들은 꼭 자기 꾐에 자기가 빠져들지 케케케케.
내가 너희 두 놈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너희를 잡아먹을 수도 있었지만
네 놈들 앞을 얼쩡거리며 나타나 말을 걸어준 것은 혹시 모르는 실패를 걱정했기 때문이었어.
늙은 염소때기 하나 잡자고 뒤쫓다 싱싱한 어린놈을 놓치면 배는 부르겠지만 고기가 맛이 없어 입가심을 안 하면 입안이 텁텁해지기 때문이고
어린놈을 쫓다 늙은 놈을 놓치면 싱싱하고 입맛은 돋는데 정작 배는 부르지 않고 허기만 질 것 같아 두 놈 다 잡을 궁리를 해낸 것이지
그래서 네 할애비 말을 경청해 주는 척 했다 이 말이지.
떠드는 입은 두뇌의 회전을 막거든. 크크... 두뇌 회전이 없으면 언제고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때를 틈타 살금살금 거리를 좁혀 덮치면 늙은 염소도 잡고 싱싱한 네놈도 잡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라고 하는 것이지
크크크 ....

역시 진정 현명한자는 말을 아껴야 하는 거야
잠자코 들어주기만 했더니 자신의 무덤을 자신이 파지 않았느냐
크 하하핫!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는 것이거늘 왜 먹는 것에 연연하느냐고? 생각할수록 재밌는 물음 이야. 앞으로 나도 써 먹어야겠어.
도망가도 늙어 죽고 지금 나에게 잡혀 먹혀죽어도 어쨌든 죽는 것은 매한가진데 왜 그렇게 살려고 바둥 거리냐고 말이야 큿큿큿큿!
노망난 늙은이한테 하나 배웠네. 그려. 크크크.....”


늙은 염소는 왜 자신의 목숨을 그렇게 쉽게 내놓을 생각을 했던 것일까?
늑대가 그 말을 정말 믿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늙은 염소는 삶에 이유를 몰랐던 것 같다.
삶을 염원하는 자들의 삶에 의지를 말이다.
지금 이 한순간 한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를 말이다.
당신이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오늘이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염원하던 내일이라는 말처럼
지금 이 한순간을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말이다.
온갖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삶이 찌들고 쓰러져도 지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늙은 염소는 잠시 망각했었나 보다.
자신 또한 얼마나 삶을 열망했으며 얼마나 가치있는 삶을 영위하려 했었는지를.
아내를 잃고 며느리를 잃고 아들을 잃으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 버렸겠지.
모든 것이 죽으면 그만인 것을 알아버렸겠지
허나 늙은 염소는 너무도 안타깝게도 한 가지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목숨을 내 놓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죽으면 그만인 것을 깨닫기 위해선 꼭 죽음의 문턱이 눈앞에 보여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대 부분은 죽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이다.
처음부터 죽음을 생각지도 않아본 늑대에겐 처음부터 먹혀들지 않을 괴변으로만 들렸을 것이다.
몇몇의 포식자를 자살하게 만든 늙은 염소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 포식자들은 이미 죽음을 의미심장하게 생각해본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이가 있었다는 예기이기도 하다. 죽음은 죽음을 생각해본 자들에게만 안식이며 평온이다.
하지만 오류가 많은 안식이며 오류가 많은 평온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도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것도. 또한 죽으면 극락으로 간다는 것도.
생각해 보라
고작 100년도 채 살지 못한 인생의 잘못이나 선행으로 평생 영원의 지옥과 평생영원의 극락에서 살게 되는 평가의 기준이 된다면 100년이란 것이 얼마나 덧없고 얼마나 짧은 것인가.
이 짧은 생으로 지옥이니 극락이니 떠들어 대는 것을 믿는 인간들의 머리는 또 얼마나 어리석은가.

어린 염소가 여린 목소리로 늑대에게 물었다.



"삶은 뭐고 죽음은 뭐에요?"

늑대가 당연한 것도 모르냐는 듯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삶이란 숨을 쉬고 살아가며 세상 모든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며 죽음이란 숨이 멎고 모든 것을 느낄 수 없으며 더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뜻하지."


"그렇다면 저희 할아버지도 죽은 건가요?"

"그렇지. 죽었지."

"왜 죽은 거 에요?"

"왜 죽었느냐고?"

아직 체 죽음이 무언지도 모르던 어린 염소였다.
어린 염소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
자신의 먹잇감 즉, 자신의 요깃감에게 늑대가 이런 쓸때 없는 물음에 답 해줘야할 의무가 없다는 것도 역시나 모른다.
다행이도 늑대는 갖은자의 여유와 유희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배도 부른 상태 서두를 필요가 없다.
늑대는 싸늘한 가을과 가을빛 풍경을 즐기며 팔짱을 낀 체 먹잇감을 음미하듯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한다.

"내가 죽였으니까 죽었지. 크크크 ... 너도 이제 곧 죽을 거란다."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된 어린 염소의 몸은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 온다는 것을 직시 하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늑대가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단다.
늑대가 자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한단다.
늑대가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한단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추위를 피해 걷지도 못한다는 것이며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맛있는 풀을 뜯기 위해 걷지도 못한다는 것이 된다.
또한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풀을 먹어도 맛있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는 것이며 한 순간 한 순간의 기쁨으로 인한 쾌락을 더 이상은 느낄 수 없게 한다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한다는 말이 죽여 버린다는 말이다.
그 말이 정말 사실로 실현될 수 있을 때 그 두려움은 최고조에 달한다.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염소는 묻는다.

"왜.... 왜.... 제가 죽어야 하는 거죠?"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쏘아보던 염소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차자
더욱더 늑대는 우월감과 자아도취에 빠져 유희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큿큿크.. 네놈이 풀을 뜯어 먹으면서 배를 채우듯 나도 네놈을 뜯어 먹으면서 배를 채워야 살아 갈 것이 아니냐?
네놈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까지 나불대 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게다가 나는 왕에게 바칠 제물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지."

염소는 풀을 뜯어 먹는 것과 자신을 뜯어 먹는 것을 생각해 본다.
배가 고프면 여지없이 풀을 뜯어 먹었듯이 또는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입이 심심해 풀을 뜯어 먹었듯이 늑대도 자신을 뜯어 먹으려 하는 것이고 자신도 역시 풀을 죽였다는 것을 풀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풀 역시 살아 있는 것이다. 풀 역시 삶을 갈망하며 더욱 번식하길 원한다.
풀에게 입이 있다면 아마 아무도 풀을 밟지 않을 것이며
풀을 먹으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풀잎 한 잎 한 잎마다 질러대는 그 비명소리를 어떻게 감당할 텐가.
살기위해 풀을 죽인 어린염소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살기위해 염소를 죽였고 조금 더 배를 채우기 위해 필요이상의 욕심을 내는 늑대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어린염소의 눈이 한없이 슬퍼 보인다.
대부분의 모든 이들이 삶에 이유도 제대로 깨달지 못한 체 죽음을 먼저 배운다.
죽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삶에 이유가 되고
죽음 이후의 세상이 두려워 값진 삶의 시간을 있지도 않은 사후세계의 고민으로 갉아 먹는다.
또 다른 이들은 고민만 하지 않고 아예 미리 죽음이후의 세상을 위해 현 세상에서 보험을 들어 둔다. 정말 사후세계가 있다하여도 현세에서 돈을 냈다고 사후세계에서 좋은 곳으로 갈수 있을까? 만기일도 없고 환불도 받을 수 없는 불확실한 보험에 왜 가입을 하고 왜 자신의 배를 곪아가며 왜 보험사의 배에 기름칠만 해주고 있는 것일까?
어린염소는 이제 막 죽음을 알았다.
살아온 시간이 너무 적어 아직 알지 못해 면죄부도 보험도 가입하지 못한 어린 염소는 지옥으로 가는 것일까 극락으로 가는 것일까?
죽음을 알자마자 죽어야 하는 어린염소.
삶도 체 깨달지 못했는데 떨어지는 저 눈물은 죽음이 슬퍼서 떨어지는 것일까?
뚝뚝 떨어지는 저 눈물이 냇가로 흐르는 구나....

울먹이며 힘없는 소리였지만 간절한 한마디가 들렸다.



"사.... 살....려주세요...."


늑대는 아무소리도 안 들린다는 듯 돌 뿌리를 차며 뚜벅뚜벅 염소에게로 향한다.
죽음이 두려운 염소는 더디게 뒷걸음질 치며 애원한다.

"사.... 사... 사.. 살려주....."


염소의 간절한 애원이 체 끝나기도 전에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더욱 싸늘한 고음이 울려 퍼졌다.
또 다시 세상은 붉은빛유채화로 물들었고
또 다시 세상 빛 바탕의 투명 캔버스에 홀로 서있는 늑대 한마리가 그려졌다.
늑대의 입에 목이 물린 한 마리가 아닌 한 개의 염소와 함께...
그림 속의 염소는 점점 작아 졌다.
머리도 없어졌고 몸통도 없어졌고 꼬리도 없어졌다.
캔버스안의 풍경은 흰 염소의 다리 한 짝을 물고 가는 늑대 한마리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