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엄마의 집 - 전경린

김윤경200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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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우리집도 한번쯤은 크게 다쳐보았더라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 부모님은 삶이 천길 낭떠러진 줄 알고 사셔. 아빠의 소심한 권위와 엄마의 뻔뻔한 낙심이 지탱하는 가정이란 살얼음판 같아. 한번쯤 얼음판이 깨져보면, 바닥이 별로 깊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될 텐데. 그러면 나와도 좀 통하는 사람들이 되었을지 몰라." (p 12)

 

 

 

"우린 무언가를 할 때마다 실패도 하고 상처도 입고 후회도 하지. 마음이 무너지기도 해. 사는 동안 몇 번이고 마음이 무너지지. 하지만 중요한 건 다시 하는 거야."

"그럴 때, 난 쉬운 일만 해. 심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하지. 쉬운 일도 규칙적으로,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힘이 생겨. 그리고 시간이 가면, 그게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걱정 마, 곧 그렇게 될거야." (p 122)

 

 

 

사춘기를 지나던 시절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홀로 지낸 나는, 마음먹기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길을 잃고 어디까지 가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라는 가로수가 서 있는 길을 걷는 것 같이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엄마의 기도와 아빠의 믿음, 그런 것이 양치기 개처럼 나를 인도했던 것만 같다 (p 141)

 

 

 

"엄만 내가 양성애자라면 어때?"

"어떻긴? 그런가 보다 하지."

엄마는 의외로 쿨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 저마다 자기 생긴 대로, 행복을 찾아야 한다구. 그게 인생인걸. 범죄가 아닌 이상, 누구도 그걸 억압해서는 안 돼."

"그리고,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이 꼭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보다 덜 위험한 것도 아니야. 어짜피 인생이란 숱한 기회들과 선택의 연속인걸. 난 네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게, 너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진실들을 경험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아."

"가족이 이건 해라, 이건 하지 말아라 하며 족쇄를 채우고 각자 가는 길에 바짓가랑이를 붙잡아서야 되겠니. 그건 월권행위지."

"더군다나 우리 같은 가족은 최선을 다해 서로 돕는 게 우선이야. 불필요한 고집을 서로에게 부리거나 무리한 요구를 해선 안 되는 거야. 좀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게 도와야 해."

"옳은 말씀."

"하지만 네가 정말로 양성애자라면, 사회적 소수로서 피할 수 없는 불이익과 차별과 편견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알아야 해. 이 세상에 대한 선택의 폭과 기회가 훨씬 더 좁아질 거야. 그게 정말로 더 행복한지, 더 치열하고 어려운 삶을 살 용기가 있는지 검증해봐야 해." (p 149)

 

 

 

사랑이 다시 온다 해도 난 뒷걸음질칠 것만 같다. 사랑은 나를 격정적으로 만들고, 균형 잡힌 관계들을 훼손시키고, 내 일상의 페이스를 무너뜨린다. 내 사랑에 대해 내가 보는 눈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은 반드시 끝이 난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p 182)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할 거야. 지구의 중력을 이탈해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무한의 우주를 지나 꿈꾸어온 달에 착륙하는 여행 말이야. 그 여행이 엄청난 것은 우주선도 없고 연료도 없이 오직 단둘이 끌어안고 스스로 발사체가 되어 날아간다는 점이지. 그리고 달나라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 살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랑 속에 안주해서 살 수도 없단다. 실제로 달은 채석장처럼 끔찍하게 척박한 곳이고 인간의 발을 둥둥 뜨게 만드는 곳이지. 단지 지구와 달 사이, 원심분리기같이 굉장한 속도로 회전하는 허공만이 사랑의 현장인 거야. 사랑이 끝나고 지상으로 돌아올 때는 우주선을 버리고 각자의 낙하산을 펴야 하지. 이 지상에 따로따로 떨어져 착륙해야 하는 것, 사랑은 그런 거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때 함께 있든, 혹은 헤어져 있든, 무사한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결국 끝이 나. 삶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 사는 거거든."

그리고 평생 계속될 것만 같이 단단하게 뭉쳐서 희끗한 형체의 유령처럼 등 뒤를 따라다닌 감정의 응어리도 때가 되면 결국 재처럼 부서져 흩어지겠지. 단둘만의 달나라를 보았던 동질성조차 겨우 이 년 혹은 삼 년 정도면 무화되고 타인이 되는 것이다...... 진짜 상실의 아픔은 그것이다. 평생 계속되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다 (p 195)

 

 

 

"이 사람이라면, 내게 상처를 입혀도 괜찮아. 이 사람이라면, 내게 잘못을 해도 좋아...... 그런 마음이 생겼을 때, 내가 아저씨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어." (p 204)

 

 

 

어른들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까지도 저렇게 힘껏 받아들이는 사람들인가...... 가슴이 뻐개지도록 밀고 들어오는 진실들을 받아들이고 또, 승낙 없이 떠나려는 것들을 순순히 흘려보내려면 마음속에 얼마나 큰 강이 흘러야 하는 것일까. 진실을 알았을 때도 무너지지 않고 가혹한 진실마저 이겨내며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인 것이다.

"세월이 좀 흐르니, 나도 그러고, 네 아빠도 그렇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산 하나처럼 느껴져. 생각해봐. 산 하나의 내부가 품고 있는 그 많은 생명들과 어찌할 수 없는 인과관계와 진실을. 그게 한 인간이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인 거야. 그러니, 누구도 타인을 구할 만큼 자유로울 수 없어. 제 한 존재를 버티는 일도 참 버거운 거란다." (p254)

 

 

 

"엄마에겐, 너와 이 집이 너무나 중요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낯선 곳으로 와 몇 년 동안 원룸에서 밤낮 없이 일을 할 때, 난 자신에게 이렇게 독려했어. 지금은 아무것도 원하지 말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해내야 할 일만 생각하자. 그것이 이 막다른 곳에서 나가는 길이야. 일하는 한, 난 밖으로 나가고 있는 거다." (p 264)

 

 

 

"호은아, 사람이 진짜 어른이 되면 말이야. 타인에게서 사랑을 바라지 않게 된단다."

"그럼, 사랑 없이 사는 거야?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데?"
농담이 섞여든 내 말에도 엄마는 웃지 않았다.

"사랑은 늘 있어. 너를 바라보는 이 순간에, 햇빛 속을 걸을 때나 비 오는 날 우산을 펼칠 때, 한밤중에 창문 밖에 걸린 반달을 볼 때도,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할 때도, 차 한 잔을 마시거나, 홀로 먹을 밥을 끓일 때에도, 아침 일곱시와 오후 두시와 밤 열한시에, 사랑은 늘 거기 있어." (p 274)

 

 

 

"엄마, 달에서는 우리가 꿈꾸는 일이 일어난대. 그곳에 한 번 찍힌 발자국은 수백 년이 흘러가도 없어지지 않고 모래성을 쌓으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대. 그곳엔 비도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중력도 아주 약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니?"

"엄마가 전에 말했잖아.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달나라에서 살 수는 없지만, 그곳에 찍은 발자국은 영원하다는 의미이지." (p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