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렉 - 裸婦, Dancer,Poster

최은희2009.04.09
조회251
'물랑루즈' 살롱 대기실        "다른 어디보다도 여기(창녀의 집)에 있을 때 나는      제일 편하다"   - 앙리 툴루즈 로트렉     로트렉은 평소에 음으로 양으로 느끼고 있던 육체적 컴플렉스(어릴 때 사고로 다쳐 다리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하체는 짧고 상체는 큰, 그렇다고 난장이 족은 아니었다)로부터 해방되어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창녀들이 부른대로 '무슈 앙리'로 돌아가서 아무 것 에도 거리끼는 일 없이 마음놓고 행동할 수 있던 것은 창녀들과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화가 '루오'같은 사람은 추악한 창녀들의 모습과 그런 그녀들의 존재를 허용하고 있는 사회의 추악함을 그려내 세상을 규탄하고 고발하는 작가의 자세가 많건 적건 느껴 지는데 비해, 로트렉의 그녀들은 단지 '창녀'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니와 구제받아야 할 여자들도 아니었다. 무슨 일에 대해서건 논쟁하거나 설교하거나 비판하거나 하는 것은 로트렉의 성품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고, 모럴리스트도 아니고 재판관도 아닌 오직 '화가'였을 뿐.           매춘부들이 성병 예방 검진을 위해 줄서고 있다.       남,여로 보이지만 사실은 여자들이다.   세상사가 심드렁하고 사내들의 욕망에 진저리가 난 창녀들의 태반은 '동성'에 대해서밖에 연애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레즈비언이었고 그것은 그녀들의 생활 가운데서도 가장 내밀한 부분이며, '앙브와즈'와 '물랭'가에 있는 창녀들의 집은 대부분 그들의 사랑의 갈증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아마도 로트렉만이 이런 세계를 가까이에서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또한 그만이 이런 세계를 사실대로 그리는 방법을 안 것같다.           아카데미 습작 시절 그린 남자 누드       로트렉은 '드가'와 마찬가지로 발레리나들도 즐겨 그렸다.                로트렉과 드가의 관계   로트렉의 진짜 아틀리에로서의 또는 예술적 영감원으로서의 몽마르트와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퐁테느'가에 있는 친구 '구르니에'의 아파트에 이사하면서 역시 그곳에 살고 있는 '드가'를 만나게 된다.   드가는 1839년생으로 1864년 태생인 로트렉이 늘 존경한 유일한 화가였다. 두 사람의 예술은 서로 공통된 점이 많았는데, 살롱, 페르낭도 서커스, 댄서들, 경마의 세계 등 을 주제로 그린 작품들이 많다. 특히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약동적인 세계에 많이 끌렸다.   주로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밖으로 나가 태양 아래서 시시 각각으로 변하는 자연 풍경의 '외광화'를 그렸다면, 두 사람은 카페나 극장의 스포트라이트의 교차라든지 가스등의 불빛이며 그 곳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사람들의 만화경같은 이미지를 그렸다.   로트렉 자신도 나중에 그에게 흥미가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라는 말을 했고, 드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에 노란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작품 제목은 '스페니쉬 댄서' 아래는 뮤직홀에서 음악에 맞춰 돌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     -----------------------------------    자, 이제부터 로트렉의 그림에 나타난 물랭루즈를 중심으로 한 주역들을 만나보자!   로트렉은 몽마르트의 '명물'로 불리우며 다양한 댄서들과 여배우들을 그렸다. 드가와 마찬가지로 자연보다는 '인간' 개개인에 흥미를 느낀 로트렉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함께 그의 붓끝에 펼쳐진 주역들을 당시의 귀한 사진과 함께 비교 감상해보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다.         Chocolat en dl Irish American Bar, 1896   얼굴이 까맣다고 '초콜릿(불어론 쇼꼴라)'으로 불리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흑인 남자 댄서로 그 당시 유명했 었나보다.       무희들의 단체 사진과 포스터       극장 홍보용 포스터(석판화로 제작)     로트렉과 포스터   포스터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간판과 더불어 전형적인 '거리의 예술'이다. 길거리의 벽과 극장이나 서커스의 입구에 붙여져서 비바람을 맞아 조만간 없어질 운명을 짊어진, 미술관과는 (적어도 당시에는) 거리가 먼 예술이었다.   당시의 아카데믹하거나 또는 고답적, 귀족적인 예술가라면 아마 예외없이 포스터에 손을 대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리라. 로트렉은 생활을 위해 포스터를 제작할 필요는 없었다. 혈통으로 보면 귀족 중의 귀족이었던 로트렉인데, 만일 그가 명성의 질이라는 것에 구애를 받는 사람이라면 그는 포스터 따위에는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끌로드 로제는 석판화를 제작하고 있을 때의 로트렉의 활기찬 모습과 소재로서의 돌 그 자체와 이에 쓰이는 인쇄용 잉크와 종이 등의 선택, 준비에 그가 얼마나 신중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판화에 대한 이러한 무한한 정열과 아울러 포스터를 통해 자기의 그래픽한 재능을 발휘하는 데에는 가장 손쉽고 마땅한 터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로트렉은 대략 30여점의 포스터를 제작했다고 한다. '도미에'와 더불어 질에 있어서나 양에 있어서 19세기 최대의 석판화가라고 할 만큼 로트렉 개인의 예술사에 있어서뿐 아니라 석판화사 및 포스터 예술의 역사상으로도 기념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로트렉 이전에도 '셰례'같은 인기있는 포스터 작가가 있긴 했으나 다만 그때까지의 것은 포스터이긴 해도 '포스터 예술'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로트렉도 고흐를 비롯한 당시의 프랑스 화단에 불어닥친 '자포니즘'의 열풍으로 '우키요에(일본 에도 시대에 발달한 서민적인 풍속화의 한 양식)' 목판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대담하고 단순 명쾌한 구성 방식과 색채감으로, 포스터의 경우는 우키요에 판화와 달라 그림에다 덧붙이는 '문자 구성(레터링)'의 좋고 나쁜 점이 작품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셈인데 그런 만큼 이 방면에 있어서 로트렉의 공적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랭루즈 최고의 댄서 중 하나인 '라 굴뤼'와 '발렝탕'               '라 굴뤼'와 '발렝탕'의 춤추는 모습들과 포스터, 맨 밑의 그림은 '물랭루즈에 들어가는 라 굴뤼', 1892      '라 굴뤼(la Goulue)'와 '발렝탕(Valentin)'에 대해   '메드라노'서커스에서 처음 데뷔했고, 물랭루즈에서 스타의 자리에 올라앉은 라굴뤼가 로트렉의 예술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891년이다. 원래 이름은 '루이즈 베벨'이지만, 주로 '대식가'라는 뜻을 지닌 '라 굴뤼'로 불린다. 별명처럼 음식도 많이 먹고 술도 잘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녀는 절제 없는 생활을 한 끝에 스타의 자리에서 물러나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라굴뤼와 함께 일세를 풍미했던 춤 파트너 발렝탕 데조세(Valentin le Desosse)는 별명이 '무골충 (뼈없는 벌레)'이라 부를 만큼 몸이 유연한 남자다. 로트렉의 작품에 수없이 등장하는 두 사람의 춤 추는 광경은 두 인물의 동작과 실루엣만으로도 충분히 그 시대의 스타였음을 알게 해준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스타 댄서 '잔느 아브릴(Jane Avril)'           잔느의 춤추는 동작, 물랭루즈로 출퇴근하는 모습, 포스터 등등 많이 등장하고 있다. 청보라색 코트에 분홍털목도리의 그림은 '장갑을 끼는 잔느'라는 제목으로, 화려한 스타의 자리에서 물러나 일반 시민으로 돌아간 모습을 그린 것이고 맨 밑의  '디방 자포네'포스터의 여자도 잔느가 모델이라 한다.   '잔느 아브릴(Jane Avril)'은?   1890년 22세 때 물랭루즈에 데뷔한 잔느 아브릴은 라굴뤼와 짝이 되어 춤추고 있었으나 그녀와는 잘 맞지 않아 헤어지고, 독립한 후에는 '자르댕 드 파리' '디방 자포네' '폴리 베르제르' 등에서 춤을 추었고 은퇴한 후에는 화가 '모리스 비에'와 결혼 했다. 라굴뤼와는 대조적으로 몸집이 작고 마른 편인 데다 세련된 취미와 섬세한 감정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923년에 사망했다.         검은 장갑의 스타 가수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             '커튼 콜'을 받고 있는 이베트 길베르의 모습들    이베트 길베르는 로트렉의 예술에 좋은 이해를 보인 몇 안되는 그 시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장갑을 낀 이베트의 모습은 주로 대담한 데포르메와 과장된 표정으로 그려졌는데, 모델의 특색을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파악하여 이것을 정확하게라기보다 시니컬하게, 때로는 참혹 하리만큼 시각화해보이는 로트렉의 소묘력이 돋보인다.        연극 배우 '마르셀 랑데'     '카드리유'를 추고 있는 마르셀 랑데 (카드리유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한 춤의 종류)         연극 배우 '메이 밀턴(May Milton)'     메이 밀튼은 에이레 출신이다.         연극 배우 '메이 벨포르(May Belfort)'             메이 벨포르의 포스터와 사진     로트렉은 '레 데카당'에 출연 중인 잔느 아브릴을 보러 갔다가 메이 벨포르를 발견하고 무대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유채화와 석판화로 그렸다. 메이 벨포르는 무대에서 거의 직립부동으로 표정도 바꾸지 않고 노래를 했다고 한다.         여자 어릿광대 '샤 위 카오(Cha U Kao)'        '여자 어릿광대 샤 위 카오', 1895   1895년부터 96년에 걸쳐 로트렉은 이 중국식 이름을 가진 여자 어릿광대를 여러점 그렸다. 모두 스테이지의 분장 그대로의 모습을 한 그녀를 그린 것으로 실제 연기하고 있는 그녀를 그린 작품은 없다. 맨 아래 카오가 눈을 감고 있는 작품이 루브르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공개(1914년)된 그림이다.   화가가 공적으로 인정받은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재는 하나의 척도는 그의 작품이 공적이며 대표적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느냐 않느냐 하는 점인데, 로트렉의 경우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뒤(1914년)에야 화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로트렉의 예술은 몇몇을 제외하곤 대다수의 당시 사람들 에겐 한마디로 말해서 세기말에 나타난 파리의 한낱 풍속 화가인 동시에 희화작가(케리커처리스트)였으며, 기껏해야 좀 참신한 감각을 지닌 포스터 작가 또는 판화가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저널리즘이 그를 다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로 그의 스캔들을 들취내는 것이었으며 그 경우에도 대개는 날조하거나 그의 예술을 무턱대고 깎아내리거나 야유하기 위해서였다.    세상 사람들의 이와같은 냉대에 대해서 로트렉의 자세한 심정은 모르겠지만,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로트렉과 같은 세대의 고흐나 고갱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나 비극적인 좌절감 따위는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고매한 이상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는 않았다. 또한 이른바 상아탑에 틀어박혀 세속에 초연하면서 자기의 인생과 예술을 지켜나가지도 않았다.   그가 인생을, 자기의 인생을, 또는 인생 일반을 비극이라 느끼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알 바 아니다. 다만 적어도 그가 보기 위해 산다기보다 오히려 봄으로써 살고, 본 것을 그림으로써 더욱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나 그 자신에게 있어서나 공통된 진실이 아니었을까?       그 외 여러 포스터들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의 포스터와 사진   '아리스티드 브뤼앙'은 당시 몽마르트의 인기 가수이자 작사와 작곡도 잘했다. 1885년에 카바레 '밀리통'을 개장했으며 이 무렵 부터 로트렉과 친했는데, 당시 갓 스물이 된 로트렉을 처음으로 창녀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한 인물로 알려졌다.         로트렉이 흠모했던 '미시아 나탕송(Misia Natanson)'             '미시아 나탕송'을 모델로 한 '라 레뷔 블랑쉬' 석판화와 사진     '라 레뷔 블랑쉬(la Revue Blanche)'는 나탕송 형제 (타데와 알렉상드르)가 주재하는 '상징파(미술에 있어서는 보나르, 부이야르, 발로통 등의 '나비 파' 사람들과, 문학에 서는 말라르메, 마테를링크, 로망 코류스, 트리스탄 베르나르 등과 비평가 겸 저널리스트인 펠릭스 페네옹 등이 모인)'의 동명의 문예지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인데, 로트렉이 나탕송 일가를 중심으로 한 이 사람들에게 끌린 건 타데 나탕송의 부인 미시아 나탕송이라는 태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시아는 천성의 미모에다 재기발랄해서 비록 무대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당시를 상징하는 스타의 한 사람이며, '벨 에포크의 퐁파두르 부인'이라고나 할 여자였다. 특히 로트렉은 그녀에게 몹시 마음이 끌려 그로서는 힘껏 그녀를 위해 봉사했으나 결국 그것은 궁정의 어릿광대가 공주에게 남몰래 품은 연정에 지나지 않았다.   로트렉이 전에 사랑했던 댄서나 창녀나 웨이트리스와는 달리 그가 참된 애정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동경 또는 숭배의 마음을 가지고 대했으며, 곁에 있어도 항상 한 걸음쯤 거리를 둔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와 이 잡지의 내용 및 성격이 맞지는 않지만, 나탕송 일가의 또는 그 그룹의 상징적 존재로, 또 로트렉이 가장 깊이 마음이 끌린 여성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모델로 선택된 것이리라.         그 외의 여러 포스터들                     로트렉이 16세 때 그린 자화상으로 그의 가장 초기 작품의 하나로 손 꼽히고 있다.               로트렉의 유명한 사진들       앙리 툴루즈 로트렉(Henri Toulouse Lautrec)의 정식 명칭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렉으로 1864년 11월 24일 프랑스의 옛도시인 알비에서 태어났다. 부친 알퐁스 백작과 어머니 아델 타피에 드 셀레이랑은 사촌간이었다. 이른바 근친의 결혼인데, 이것은 로트렉 가문에서는 이미 그런 선례가 몇이나 있었으므로 결코 색다른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부친 쪽의 로트렉 가문은 프랑스에서도 유수한 귀족이며, 어머니 역시 그에 못지않은 명문가인 셀레이랑 쪽 사람으로 이른바 혈통이 좋다는 점에서는 로트렉은 프랑스의 수많은 화가 중에서도 으뜸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1872년 로트렉이 8살 때 그의 집안은 한때 파리에 옮겨 살았고 이듬해 그는 '리세 퐁타느'에 입학했으나 1874년 1월에 중단하게 되는 이 짧은 중학교 생활 동안에 '루이 파스칼'과 '모리스 조앙'이라는 평생의 벗을 얻은 일은 그에게는 커다란 수확이었다. 특히 모리스 조앙은 로트렉이 죽은 뒤에도 그의 예술을 옹호하고 선전하는 데에 힘썼으며 또 방대한 로트렉 전기를 내놓는 등 로트렉에 대한 일반인 들의 이해를 깊게 하고 넓히는 데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1878년 5월 30일, 소년 로트렉은 발을 헛디뎌 그만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리고 몇달 뒤 어머니와 함께 다리를 절며 산책하던 로트렉은 도랑에 빠져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먼저 부러진 다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지금도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다)   모든 수단을 다해 치료한 보람도 없이 이 두번째의 골절 이후 로트렉의 성장(하반신)은 완전히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미 10살을 넘은 소년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넘어졌다는 것과 게다가 그 다리가 그만 성장을 중지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로트렉의 양친을 비롯하여 로트렉 가문에서 종종 있었던 근친결혼이 소년 로트렉의 허약 체질을 초래하게 되었고 이와같은 비정상적인 결과를 낳은 것이라고들 한다.   어떻든 이것을 계기로 하여 저 기형적인, 우리에게도 낯익은 로트렉 상이 서서히 형성되어 오는 것이다. 양 다리가 불구가 되어 좋아하던 스포츠와 승마로부터 버림받은 로트렉은 그림을 그리는 데서만 유일한 위안을 발견했다. 부친이 이것을 계기로 로트렉에게 실망하고 그를 돌보지 않게 된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불행 중 다행 이었다. 그럼으로써 로트렉은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사소한 우연 때문이었다. 내 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나는 결코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로트렉은 뒷날 자조적으로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1882년, 18살이 된 로트렉은 동물화를 잘 그리는 화가 '르네 프랑스토' 밑에서 드디어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그 후 스승의 소개로 당시 화단의 거장이었던 '레옹 보나'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런 종류의 아카데믹 하고 틀에 박힌 아틀리에 교육이 로트렉의 기풍 및 화풍 과는 원래부터 맞지 않았던 터에 보나의 아틀리에가 폐쇄 된 것을 계기로 로트렉은 '코르몽'의 화실로 옮긴다.   코르몽도 역시 아카데믹한 화가이긴 했지만 그는 보나처럼 강압적인 데가 없고 화실 분위기도 훨씬 자유스러웠으며, 게다가 30여명쯤 되는 그의 제자 가운데에는 고흐나 에밀 베르나르같은 젊고 훌륭한 화가들과 친하게 교류했다.   특히 고흐는 로트렉보다 11살이나 손위인 데다 프랑스 말도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골뜨기 화가였으며 로트렉과는 혈통이나 가정 환경 등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으나 이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이상하게도 서로 끌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도시적이며 향락적이고 사교적인 로트렉으로서는 무슨 일에건 진지하고 열성적이고 구도적이며 이상주의적인 고흐의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으련 만 인간 및 예술가로서의 고흐의 성실성을 잘 이해하고 있던 로트렉은 그런 기색을 털끝만큼도 내색하지 않았다. 1887년에 로트렉이 그린 '고흐의 초상'은 이 두 사람의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거짓없는 우정에 대한 기념비의 하나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트렉이 그린 고흐의 초상, 1887     로트렉이 코르몽의 화실에 형식상으로는 1882년 9월부터 86년까지 적을 두고 있었으나, 제대로 다닌 것은 초기뿐이고 도중부터는 몽마르트가 그의 진짜 작업실이 되었다. 위에 드가와 함께 잠깐 언급했지만, 퐁테느 가에 있는 친구 '구르니에'의 아파트로 이사해 간 1884년부터가 진정한 예술적 영감원으로서의 아틀리에인 셈이다.   1894년 전후의 수년간은 로트렉의 제작력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였으며 그 무렵부터 그의 예술의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해 국내는 물론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전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또는 단순히 휴양이나 관광을 위해 자주 여행한 것으로, 1895년에는 런던에서 오스카 와일드, 비어즐리 등과 만났으며 휘슬러의 예술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1898년에는 친구 모리스 조앙의 주선으로 런던의 '구필'화랑 에서 출품작이 78점이나 되는 개인전을 개최했지만 전시회는 완전히 실패로 끝나게 된다. 안일한 꿈을 꾸는 빅토리아 왕조의 점잔을 빼는 부르주아 도덕이 세상을 풍미하고 있던 당시의 영국 사회를 생각해보면 댄서나 창녀의 생태를 노골적으로 그린 로트렉의 예술이 호평을 받을 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런던에서의 개인전 실패는 반드시 로트렉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고는 여겨지지 않으나 이 무렵부터 그의 심신은 눈에 띄게 쇠약해진 것은 확실하다. 그 이듬해 2월 그는 물랭가의 창녀 집에서 처음으로 의식을 잃어 '누이이'의 요양소에 입원하게 된다. 이것을 안 파리의 선정적인 저널리즘은 때를 놓칠세라 로트렉의 방탕, 주정, 광기 등등에 대해 대서특필 했다. 하지만 로트렉은 자신이 정상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요양소 안에서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37점이나 되는 '서커스'의 연작을 그려 성공했다. 2개월 후에는 퇴원할 수 있었고, 그 뒤 보르도, 알카숑, 르아브르 등으로 전지 요양 하면서 건재를 과시하는 작품도 적잖게 제작했다.   로트렉이 성적으로 매우 조숙했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자주 지적하는 바이며, 그의 다채로운 여성 관계도 이 즈음 시작되고 있다. 수잔 발라동, 마리 샤를르, 로자 라 루즈 등의 여성과 사귀었는데 특히 로자한테서 성병이 옮아 끝내는 이것이 그의 화가로서의 생명을 빼앗긴 한 원인이 되었다. (나중에 로트렉의 여자들에 대해 자세히, 특히 수잔 발라동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많다)   생각컨대 이 무렵 로트렉은 이미 그와 그를 둘러싼 여성들과의 사이에 육체 또는 욕망의 접촉은 있을망정 정신적 또는 감정의 접촉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결국 로트렉 이 이성으로부터 항상 변함없는 참된 애정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밖에 없었던 듯하다. 나중에 작품들을 올리겠지만 어머니에 관한 한 그의 붓끝은 한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으로 가득 찼으니까.   성병과 함께라기보다 아마 그 이상 로트렉의 육체적 예술적 생명을 좀먹은 것으로 그의 음주벽을 들 수 있는데, 20살 안팎 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그것이 거의 만성적 또는 병적인 것으로 된 것은 1890년대 말기부터였다. 로트렉을 병리학적 으로 연구해서 유명한 두보아장 박사에 의하면, 로트렉의 가계에는 알콜 중독의 선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니 이것은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심리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즉 자기의 육체적 정신적인 핸디캡을 조금이라도 잊으려고 로트렉은 술에서 구원을 찾으려다 마침내는 술에 빠지고 만 것이다.   전지 요양 다닐 때도 어머니가 일부러 '비오'라는 감시자를 딸려 두었건만 로트렉은 그의 눈을 피해 산책용 지팡이에 숨겨 둔 럼주와 브랜디를 몰래 마시곤 했다. 이와같이 절제를 안한 보답으로 다리를 못쓰게 되고 이어서는 화가의 생명인 손이 경련을 일으키게 되어 한 시간도 제작을 계속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1901년 5월에 멀잖아 자기가 죽을 것을 예감한 듯이 아틀리에 정리를 하고 자기 작품에 제작 연대와 서명을 적어 넣었다. 1901년 8월 20일에 어머니가 계신 말로메로 돌아간 로트렉은 다음 달 9월 9일,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라파엘, 카라바죠, 와토, 고흐 등과 마찬가지로 37년의 짧은 생애였다.   스탕달의 유명한 묘비명을 인용해서 말하면, 로트렉 역시 '살고, 그림을 그렸으며 그리고(뒤에 가서 알게 되지만) 사랑했던 것이다'     로트렉이 세상을 떠난 1901년 처음으로 파리에 나온 약관의 피카소는 고국의 벗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파리에 와서 비로소 나는 로트렉이 얼마나 위대한 화가인가 를 알았다" 그 이후 피카소의 '청색 시대'에 이르는 작품에 로트렉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 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