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보름 만인 15일 숨을 거둔 택시기사 허세욱씨(54)의 삶에서 ‘양지’는 없었다. 중학교 중퇴, 택시기사, 독신 등 그의 인생은 ‘음지’에만 머물러 있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도 그의 자리는 앞이 아니었다. 그러나 늘 겸손하고 특히 약자를 끔찍이 배려하는 서민이었다. 허씨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그가 구하고자 했던 노대통령이 강행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허씨는 1953년 경기 안성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농사꾼 집안의 9남매 가운데 다섯째였다. 그러나 이후 40년 가까이 그의 삶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해 상경했다는 것, 서울에서 중국집 종업원 등 갖은 허드렛일을 했다는 게 전부다. 직장과 시민단체 동료들도 알지 못했다. 그의 가족은 그의 삶을 발설하는 것을 꺼렸다. 많은 한국의 50대들처럼 그의 인생이 신산스러웠을 것은 분명하다.
그의 인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은 41살 때인 94년부터다. 서울 봉천동 철거민이었던 허씨는 행정당국의 강제철거에 맞서는 빈민지역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눈을 떴다. 95년에 관악주민연대, 98년엔 참여연대에 가입했고, 2000년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이름만 올려 놓지 않았다. 택시기사로 120만원 월급을 받아 꼬박꼬박 회비를 냈고, 시간이 나면 신문과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허씨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활동가라도 ‘선생님’으로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홍은광 민노당 관악구위원회 부위원장은 “항상 뒷자리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시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신문 스크랩을 하고, 물어가며 공부했다”며 “대학생들에게 단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항상 존대말을 썼다”고 전했다.
90년대 초반 빈민운동을 하다 허씨를 처음 만났다는 신장식 민주노동당 민생특별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너무나 겸손하고 착한 분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허씨는 ‘달리는 민주노동당’이라고도 불렸다. 택시 승객과 끊임없이 사회 이슈에 대해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홍부위원장은 “철원군 농민들이 연행당했을 때, 허씨가 경찰서 앞에서 새벽까지 농민들을 기다렸다. 새벽이면 대중교통이 다 끊어지니까 기다렸다가 철원군까지 데려갔다”고 회고했다.
정지열 민주택시노조 조직부장은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 등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다들 겸손하고 진지한 사람으로 평가했으며, 자신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허씨는 문화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서점 ‘그날이 오면’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서점 후원회에 가입했다. ‘그날이 오면’ 김동운 대표는 “요즘 학생들이 사회적 모순을 인식할 수 있는 인문사회과학 공부를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고 기억했다.
주변 활동가들도 지극히 챙겼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허씨가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간사들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며 손에 과일을 담은 종이봉지를 들고 나타나곤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사랑의 김장 나누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봉사활동을 해왔다.
서동빈 한독운수노조 부위원장은 “김치를 담가서 독거노인에게 자신의 택시로 직접 전달해주곤 했다. 분신 이틀전 소주 한 잔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허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사람들을 걱정했다. 15일 공개된 유언장에서 허씨는 직장동료에게 ‘모금은 하지 말아주세요. 전부 비정규직이니까’라고 썼다. 경제사정이 넉넉지 않은 동료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는 또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전국의 미군기지에 뿌려서 밤새도록 미국놈들을 괴롭히게 해주십시오. 효순·미선 한(恨) 갚고…’라고 쓰기도 했다.
허씨는 한·미 FTA 반대운동을 하면서 자주 절망감을 토로했다고 한다. 수많은 집회가 열렸지만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해 답답해한 것이다. 허씨는 왜 정부가 무리하게 한·미 FTA 체결을 밀어붙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노대통령 탄핵에 누구보다 반대하며 집회에 참석했던 그가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분신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반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진행되는 FTA 협상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허씨의 죽음을 ‘참여정부가 저지른 살인’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그의 유서에는 곳곳에 생전에 느꼈던 그의 절망이 묻어났다.
‘(노무현 정부는)토론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 평택기지 이전, 한·미 FTA에 대해 토론한 적 없다. 숭고한 민중을 우롱하지 마라.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은 싫다. 나는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다. 저 멀리 가서도 묵묵히 꾸준히 민주노총과 같이 일하고 싶다.
허세욱열사님! 당신을 기억합니다-4.1일 분신일에 현장참배하고왔습니다.
4.1일 허세욱님 분신일엔
정신계승사업회 사무장님과 소식을 듣고 몇몇 촛불시민 분들이
하얏트 언덕배기 분신현장에서 참배드렷습니다.
힁**이 정성스레 준비한 국화와
그******님꼐서 또 그 정성을 더하여 준비해오신 촛불과 피켓으로
초라할 수있는 현장을 더욱 훈훈하게 밝혀주었습니다.
그런 작은 정성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힘받고,
고마운 자리였습니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애국시민 여러분!
올해 4월의 투쟁은 FTA를 온몸으로 항거하신 '허세욱열사님'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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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봉천동 철거민이었던 허씨는 행정당국의 강제철거에 맞서는
빈민지역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눈을 뜨게되어.....
분신 보름 만인 15일 숨을 거둔 택시기사 허세욱씨(54)의 삶에서 ‘양지’는 없었다. 중학교 중퇴, 택시기사, 독신 등 그의 인생은 ‘음지’에만 머물러 있었다.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도 그의 자리는 앞이 아니었다. 그러나 늘 겸손하고 특히 약자를 끔찍이 배려하는 서민이었다.
허씨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그가 구하고자 했던 노대통령이 강행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허씨는 1953년 경기 안성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농사꾼 집안의 9남매 가운데 다섯째였다. 그러나 이후 40년 가까이 그의 삶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해 상경했다는 것, 서울에서 중국집 종업원 등 갖은 허드렛일을 했다는 게 전부다. 직장과 시민단체 동료들도 알지 못했다. 그의 가족은 그의 삶을 발설하는 것을 꺼렸다. 많은 한국의 50대들처럼 그의 인생이 신산스러웠을 것은 분명하다.
그의 인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은 41살 때인 94년부터다. 서울 봉천동 철거민이었던 허씨는 행정당국의 강제철거에 맞서는 빈민지역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눈을 떴다. 95년에 관악주민연대, 98년엔 참여연대에 가입했고, 2000년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이름만 올려 놓지 않았다. 택시기사로 120만원 월급을 받아 꼬박꼬박 회비를 냈고, 시간이 나면 신문과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허씨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활동가라도 ‘선생님’으로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홍은광 민노당 관악구위원회 부위원장은 “항상 뒷자리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시는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신문 스크랩을 하고, 물어가며 공부했다”며 “대학생들에게 단 한 번도 반말을 하지 않고 항상 존대말을 썼다”고 전했다.
90년대 초반 빈민운동을 하다 허씨를 처음 만났다는 신장식 민주노동당 민생특별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너무나 겸손하고 착한 분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허씨는 ‘달리는 민주노동당’이라고도 불렸다. 택시 승객과 끊임없이 사회 이슈에 대해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홍부위원장은 “철원군 농민들이 연행당했을 때, 허씨가 경찰서 앞에서 새벽까지 농민들을 기다렸다. 새벽이면 대중교통이 다 끊어지니까 기다렸다가 철원군까지 데려갔다”고 회고했다.
정지열 민주택시노조 조직부장은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 등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다들 겸손하고 진지한 사람으로 평가했으며, 자신과 의견이 다르더라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허씨는 문화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서점 ‘그날이 오면’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서점 후원회에 가입했다. ‘그날이 오면’ 김동운 대표는 “요즘 학생들이 사회적 모순을 인식할 수 있는 인문사회과학 공부를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고 기억했다.
주변 활동가들도 지극히 챙겼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허씨가 사무실에 들를 때마다 간사들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며 손에 과일을 담은 종이봉지를 들고 나타나곤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사랑의 김장 나누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봉사활동을 해왔다.
서동빈 한독운수노조 부위원장은 “김치를 담가서 독거노인에게 자신의 택시로 직접 전달해주곤 했다. 분신 이틀전 소주 한 잔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허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사람들을 걱정했다. 15일 공개된 유언장에서 허씨는 직장동료에게 ‘모금은 하지 말아주세요. 전부 비정규직이니까’라고 썼다. 경제사정이 넉넉지 않은 동료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는 또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전국의 미군기지에 뿌려서 밤새도록 미국놈들을 괴롭히게 해주십시오. 효순·미선 한(恨) 갚고…’라고 쓰기도 했다.
허씨는 한·미 FTA 반대운동을 하면서 자주 절망감을 토로했다고 한다. 수많은 집회가 열렸지만 현실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해 답답해한 것이다. 허씨는 왜 정부가 무리하게 한·미 FTA 체결을 밀어붙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노대통령 탄핵에 누구보다 반대하며 집회에 참석했던 그가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분신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반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진행되는 FTA 협상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허씨의 죽음을 ‘참여정부가 저지른 살인’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그의 유서에는 곳곳에 생전에 느꼈던 그의 절망이 묻어났다.
‘(노무현 정부는)토론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 평택기지 이전, 한·미 FTA에 대해 토론한 적 없다. 숭고한 민중을 우롱하지 마라.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은 싫다. 나는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다. 저 멀리 가서도 묵묵히 꾸준히 민주노총과 같이 일하고 싶다.
: 경향신문) 故허세욱씨 ‘굴곡의 인생’…의로운 세상 꿈꾸다 ‘배반당한 삶’ 중
4월 12일
"허세욱열사 2주기추모묘역참배"
2009.4.12-일요일은 마석 모란공원에서 참배를 갖습니다.
4월 15일
FTA를 반대하는 애국시민들과 함께하는
<"허세욱열사 2주기 촛불추모문화제" 및 용산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촛불문화제>
2009.4.15-수요일 저녁 7:30 하얏트 호텔앞
망국적 '한미FTA'로 걱정많은 시민들과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가 함께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