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장 1~2절에 나타난 구레뇨 총독의 호구 조사 기록에 대하여 지금껏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주후 6년인데, 어떻게 주전 4년(헤롯왕 말년)에 구레뇨의 호적 등록(인구조사) 사무가 있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문점에 대하여 여러 잡다한 견해들이 피력되었는데, 그중 유력한 것은 아마도 슐라이에르마허와 보 라이케의 것이 아닌가 한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를 지지하는 보 라이케의 해석에 의하면, 누가복음서의 기자(누가)가 헤롯의 의해 실시된 지역적 인구조사와 구레뇨에 의해 실시된 대규모 호구 조사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라이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헤롯 시대에 실시된 유사한 호구 조사가 누가 전승을 통해서 그 이후에 구레뇨 시대의 호구 조사에 흡수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즉, 누가가 주전 4년(5년?) 경 실시되었을지도 모르는 헤롯의 국지적 호구 조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그 뒤(A.D 6) 구레뇨의 본격적 호구조사와 혼동한 나머지 구레뇨의 것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예수의 탄생 연대 추정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이 틀림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람제이와 같은 이는 18세기 중엽(1764년)에 발견된 유적(라피스 비문)에 의탁하여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을 두 차례 지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구레뇨가 문관 총독이었던 사투르니누스(B.C 9~6)와 함께 무관총독으로 부임하여 야만족을 무찌르는 싸움을 수행하도록 임명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주장에 슈타우퍼의 것이 있다. 그는 구레뇨가 주전 12년부터 '동방의 장군'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시기적으로는 사투르니누스와 바루스(B.C 6~4)등이 시리아 총독직을 맡고 있던 때라고 하였다.
이상의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과 나란히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후 구레뇨는 황제의 법정 상속자인 손자 가이우스 케사르가 동방으로 오게 되었을 때 (A.D 2~4) 고문의 자격으로 측근에 있게 되었고, 그가 죽자 (A.D 4), 이후부터 큰 권력을 쥐게 되었으므로, 구레뇨가 헤롯의 통치 기간중에 호구 조사를 명령할 만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누가복음 2장 2절의 호구 조사는 구레뇨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헤롯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볼 때 누가의 기록은 전혀 하자를 남기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살려볼 때,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던 구레뇨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호구 조사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별로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이다. 바루스 총독 시대에 무관 총독, 또는 동방의 장군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구레뇨는 주전 4년의 제 1차 아케라오 탄핵 사건에 유형 무형으로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며, 또 주후 4년 가이우스 케사르가 죽고 나서부터 더욱 큰 권력을 쥐게 되고, 그 2년 뒤 정식 총독에 임명될 때까지 영향력이 막대하여 주후 6년의 제 2차 아켈라오 탄핵 사건에 역시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였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과연 성경 누가복음은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 ( 모든 그리스도인 필독하실 것)
누가복음 2장 1~2절에 나타난 구레뇨 총독의 호구 조사 기록에 대하여 지금껏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것은 주후 6년인데, 어떻게 주전 4년(헤롯왕 말년)에 구레뇨의 호적 등록(인구조사) 사무가 있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문점에 대하여 여러 잡다한 견해들이 피력되었는데, 그중 유력한 것은 아마도 슐라이에르마허와 보 라이케의 것이 아닌가 한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를 지지하는 보 라이케의 해석에 의하면, 누가복음서의 기자(누가)가 헤롯의 의해 실시된 지역적 인구조사와 구레뇨에 의해 실시된 대규모 호구 조사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라이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헤롯 시대에 실시된 유사한 호구 조사가 누가 전승을 통해서 그 이후에 구레뇨 시대의 호구 조사에 흡수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즉, 누가가 주전 4년(5년?) 경 실시되었을지도 모르는 헤롯의 국지적 호구 조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그 뒤(A.D 6) 구레뇨의 본격적 호구조사와 혼동한 나머지 구레뇨의 것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예수의 탄생 연대 추정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의 기록이 틀림없이 옳다고 생각하는 람제이와 같은 이는 18세기 중엽(1764년)에 발견된 유적(라피스 비문)에 의탁하여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을 두 차례 지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구레뇨가 문관 총독이었던 사투르니누스(B.C 9~6)와 함께 무관총독으로 부임하여 야만족을 무찌르는 싸움을 수행하도록 임명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주장에 슈타우퍼의 것이 있다. 그는 구레뇨가 주전 12년부터 '동방의 장군'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시기적으로는 사투르니누스와 바루스(B.C 6~4)등이 시리아 총독직을 맡고 있던 때라고 하였다.
이상의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과 나란히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후 구레뇨는 황제의 법정 상속자인 손자 가이우스 케사르가 동방으로 오게 되었을 때 (A.D 2~4) 고문의 자격으로 측근에 있게 되었고, 그가 죽자 (A.D 4), 이후부터 큰 권력을 쥐게 되었으므로, 구레뇨가 헤롯의 통치 기간중에 호구 조사를 명령할 만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누가복음 2장 2절의 호구 조사는 구레뇨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헤롯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볼 때 누가의 기록은 전혀 하자를 남기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살려볼 때,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던 구레뇨가 전후 두 차례에 걸쳐 호구 조사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별로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찬가지이다. 바루스 총독 시대에 무관 총독, 또는 동방의 장군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구레뇨는 주전 4년의 제 1차 아케라오 탄핵 사건에 유형 무형으로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며, 또 주후 4년 가이우스 케사르가 죽고 나서부터 더욱 큰 권력을 쥐게 되고, 그 2년 뒤 정식 총독에 임명될 때까지 영향력이 막대하여 주후 6년의 제 2차 아켈라오 탄핵 사건에 역시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였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 어느 신학자의 '초대교회사' 라는 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