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교수에게 실존적 고독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

최선혁2009.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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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 2004년 5월호에 진중권 교수가 기고하신  글의 내용중 일부를 옮긴 글  

 

  

몇 년 전 부산대 여학생 몇이 인터넷 사이트에 대학 내 예비역들의 군사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자 전국의 예비역들이 궐기해 이들에게 끔찍한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그들의 개인정보를 빼내 포르노 사이트에 올리기까지 했다.마침 '안티조선' 운동을 하던 나는 조선일보의 극우성을 비판하는 네티즌이라면 이런 군사문화와도 열렬히 맞서 싸워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네티즌들은 이 사태 앞에 침묵하거나 그 몰상식한 폭력의 편에 섰다. 이 예상치 못한 사태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실존적 고독을 느꼈다. 

 

또 하나의 예, 한동안 미군 장갑차의 사고로 죽은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촛불로 애도하던 이들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여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감성적 휴머니스트라면 서해교전 당시 북한의 발포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죽음에도 애도를 보내야 한다. 아울러 사람을 치어놓고 '나 몰라라' 하는 미군의 무책임을 비난하는 사람이라면, 뚜렷한 이유 없이 총질을 하는 북한의 모험주의 노선도 소리 높여 비난해야 한다. 나는 응당 그러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깨졌다. 미군을 비난하는 것은 휴머니즘이나, 북한을 비난하는 것은 냉전수구세력의 음모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저런 모순을 머리에 담아놓고 살아갈 수 있을까?

 

최근에 벌어진 또 다른 사건의 예를 들어보자. 말많은 조선일보의 편집기술을 성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이번에 방송위로부터 '주의'를 받은 MBC의 프로그램 ( '사실은') 을 보았을 것이다.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이 방송의 고약한 편집기술 또한 열렬히 비판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조선일보의 편집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편파보도지만, MBC의 편집은 사태의 본질을 꼭 집어내는 공정보도라는 것이다. 정합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분열된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이해가 안 된다.

 

MBC가 영부인 모독 발언 장면을 노컷으로 방영했을 때 그것을 보고 나는 모든 논란이 해결됐다고 믿었다. 제작진이 문맥을 고약하게 왜곡했다는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가보니 네트즌 상대로 여론조사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응한 네티즌의 90%는 문제의 화면이 왜곡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기가 막혔다. 이쯤되면 종교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들은 나를 보고" 가슴이 없다" 고 말한다. 그들은 사유를 심장으로 하는지 몰라도,나는 사유를 머리로만 한다. 아마도 그들은 나와 다른 해부학적 구조를 가졌거나, 심장과 뇌를 오가는 공감각의 능력을 가진 모양이다. 그들은 내 글에 "감동이 없다" 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다. 내 글은 감동을 위한 게 아니라 생각을 위한 것이다. 그들이 연출하는 값싼 키치는 내게 역겨움을 주고, 그들이 표출하는 파토스의 과잉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감동' 을 잘먹는 그 섬세한 감성들이, 왜 노동자가 분신하고, 농민이 음독하고, 소녀가장이 투신할 때에는 발동하지 않는 걸까. 내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와 그들은 감정이입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안티조선' 으로 시작된 언론운동은 그 동안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스포츠 조선 노동조합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조선일보는 이 사회는 '웃음거리' 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구석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이 사회언론의 수준이 얼마나 향상되었는가. 당파적 저널리즘의 폐해는 외려 더 심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선일보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새로운 언론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제 언론비평을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당파적 저널리즘의 폐해는 또 다른 당파적 저널리즘으로 극복될 수 있는게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떠나 비평의 공정한 기준부터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도처에 있다. 정말 중요한 권력은 바로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관계의 망이다. 진짜 억압은 여의도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오는 것이다. 악마는 한나라당도 아니고, 열린 우리당도 아니다. 조선일보도 아니고, 오마이뉴스도 아니다. 악마적인 것은 자기를 둘러싼 인간관계, 다시 말해 당신의 친구들과 나아가 당신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