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애도 나를 알아보았는지 미처 확인할 새도 없이 황급하게 눈길을 피하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그애하고 눈길이 마주친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P22)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는 평화가 얼마나 더 거룩한가. 나는 내 안에서 회오리치는 위험에의 갈망과 이렇게 맞섰다.(P37)
남이 쳐다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비단옷과 보석이 무의미하듯이 남이 샘내지 않는 애인은 있으나마나 하지 않을까.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P37-38)
우리는 서로 부등켜안고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돈이 안 드는 사치는 이렇게 위험했다.(P53)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처졌다.(P70)
그 남자의 부음을 들은 지 얼마 안 되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앞으로 그 남자보다 십 년 이상, 아니 몇십 년을 더 살지도 모른다. 그 남자의 중년도 노년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같은 처녀일 것이다.(P97)
이 세상 어딘가에서 한 남자가 나 때문에 앓고 있다는 확신이 일상의 무의미를 뚫고 빛을 발하며 가까이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마 피할 수 없을 것이다.(P168)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P169)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그 남자네 집 - 박완서
그애도 나를 알아보았는지 미처 확인할 새도 없이 황급하게 눈길을 피하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그애하고 눈길이 마주친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P22)
살아남은 자의 슬픔보다는 평화가 얼마나 더 거룩한가. 나는 내 안에서 회오리치는 위험에의 갈망과 이렇게 맞섰다.(P37)
남이 쳐다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비단옷과 보석이 무의미하듯이 남이 샘내지 않는 애인은 있으나마나 하지 않을까.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나를 구슬 같다고 했다. 애인한테보다는 막내 여동생한테나 어울릴 찬사였다. 성에 차지 않았지만 나도 곧 그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구슬 같은 눈동자, 구슬 같은 눈물, 구슬 같은 이슬, 구슬 같은 물결..... 어디다 그걸 붙여도 그 말은 빛났다.(P37-38)
우리는 서로 부등켜안고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돈이 안 드는 사치는 이렇게 위험했다.(P53)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처졌다.(P70)
그 남자의 부음을 들은 지 얼마 안 되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앞으로 그 남자보다 십 년 이상, 아니 몇십 년을 더 살지도 모른다. 그 남자의 중년도 노년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에게 그가 영원히 아름다운 청년인 것처럼 그에게 나도 영원히 구슬같은 처녀일 것이다.(P97)
이 세상 어딘가에서 한 남자가 나 때문에 앓고 있다는 확신이 일상의 무의미를 뚫고 빛을 발하며 가까이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마 피할 수 없을 것이다.(P168)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 무엇을 입고 나갈까, 첫사랑이 긴 치마를 허리띠로 동여매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 남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나 또한 그 남자가 첫사랑이거늘. 그건 첫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나는 이것저것 좋은 나들이옷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어떤 옷은 점잖아 보이고, 어떤 옷은 촌스러워 보이고, 간혹 요염해 보이는 옷도 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P169)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그 남자도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P310)
05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