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어서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내고 곱씹어보는 작업을 많이 해도 나의 글을 써내거나 하는 일은 조금 드물었다. 이유인즉슨 정리되지 못한 발언들을 하기 전에 사유의 가락을 조금이나마 잡아보자는 나름의 다짐이었다. 예수에 대한 다산적이었던 나 자신의 글을 최근에 써내려가지 못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민중신학의 태동지 한신이라고 하지만 실로 한신에서 배출하는 목사,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적 이념을 지닌 것은 아니다. 난 경동에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 민중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기표와 기의의 거리를 떠나, 그건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정해진 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 시대의 민중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답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낡은 어휘로 사어가 되어버린 그 '민중'이란 단어를 안병무는, 그리고 김규항은 이 시대에서 못 살고, 소외받는 그 모든 사람이 민중이라고 말한다. 아니, 당신들 모두가 민중이라고 말한다. 함석헌은 말했었다. 우리는 '씨알'이라고. 씨알은 마음속에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 큰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전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계급적인 표현을 넘어서 예수 역시 그렇게 사람을 대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억눌리고, 핍박받는 자들, 그들에게 당신들이 민중이라고,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핍박하는 자들, 당신들 역시 달라져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다. 세상은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을 넘어서 더 잘 사는 사람, 더 못 사는 사람과 같이 몇 십, 몇 백 조각으로 세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는 무소유를 권한다. 법정 스님과 다르지 않다. 그는 어려운 길을 말한다. 너의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제물, 가족까지도. 버리라는 말은 그들과 남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라는 말일 것이다. 예수가 40일의 고난을 겪은 뒤, 인격적으로 해탈을 했는지, 또는 부활 전에 이미 신이 되었는지를 논하기 전에 그는 조금씩 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유는 그가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영적 혁명은 사회적 혁명과 다르지 않았다. 예수가 불행했는가? 아니다. 그는 행복하기를 원했고,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김규항은 예수전의 뼈대를 마가복음에서 잡는다. 마가복음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의 원천이 되는 글이다. 신학적인 부분의 가미가 조금은 덜한 글이다. 그만큼 예수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예수가 왜 죽었는지? 정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것인지에 대해 그는 대답한다. 예수는 잘 사는 사람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억눌린 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 또한 꿰뚫어 보고 진정한 혁명은 계급, 무엇과 무엇을 가르는 이념을 떠나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가 서로 자기의 것을 취하지 않으려 할 때, 서로를 위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또한 영적 혁명이 사회적 혁명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억눌린 그들 자신도 역으로 자신이 혁명으로, 또 누군가를 억누르기 위해 변화를 원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예수는 그래서 외롭게 죽어갔다. 억누르는 자들의 권력과 억눌린 자들의 마음속에 도사린 이기. 그는 그 안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그는 변화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실로 가지고 갈 것은 한 줌의 공기 자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고등학교 때 읽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진리는 쉽다. 그리고 그건 종교를 넘어서 진리 그 자체로 다가온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뿐이다. 비겁한 우리가 진리를 훼손하고, 구원을 오독하며, 실존적으로 우리가 노력하며 이뤄야 할 것들을 이미 이루어졌다며 구원이 임했다고, 이미 이루어졌다고 싱겁게 말할 뿐이다. 예수는 성전을 헐었다. 휘장을 찢었다. 그리고 자신도 찢겼다. 휘장이 찢긴 것은 예수가 찢겼기 때문이다. 내가 찢기지 않는다면 사회는 찢기지 않는다. 나의 변화가 없다면 사회의 변화도 없다. 진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는 교회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지만 기독교는 교회 안에만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신앙은 하루가 아니라, 전 시간, 공간, 생애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허름한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이름 없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다.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한 예수는 지금도 우리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다. 예수가 쉽게 말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이름이 쉽게 불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그 이름이 김훈이 ‘바다의 기별’이라는 수필에서 말한 ‘사랑’과도 같은 개념이라고 느껴진다. 저 강 너머 언저리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그 목소리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손길을 본 내가 그와 나 사이의 강의 길이가, 또 넓이가 너무 길고 멀다며 외면할 뿐인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과 태도, 그 모습을 생각할 때, 난 일주일에 하루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와 자본주의라는 일상에 젖어 경영학의 제1명제인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라는 그 테제에 순응을 하며 현실로 돌아가고 안주하는 나 자신이 구역질이 난다. 어쩔 수 없다는 그 현실을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그럴 바에는 우리 차라리 예수를 말하지 말자. 그러기엔 우리가 참 더럽고, 그 이름이 너무 경건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차라리 기도도 말자. 내 것을 팔아 남에게 주라는 그의 기도 앞에 나의 복을 구하는 내 기도 역시 너무 더럽지 않은가? 그에게 미안해하며 내 삶을 전복시킬 각오가 없다면, 그리고 그게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 차라리 그 이름을 말하지 말자.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은 실은 우리가 신을 죽였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2000년을 넘어 우리에게 자신을 비울 것을 가르쳤지만 여전히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를 채울 것인지를 고민한다. 한 사회주의자가 전해주는 예수, 목사도 아닌 평신도가 전해주는 예수. 그가 전하는 예수가 어떤 목사가 들려준 예수보다 더 실제적으로 다가왔다. 버린 사람은 행복하다. 난 청량리에서 자취하면서 간간히 들리는 다일교회의 최일도 목사님의 얼굴에서 그것을 느꼈다.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버리면 모든 것을 잃고, 나 자신마저 잃을까봐 알알이 움켜쥔다. 예수는 내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에 가까워질 때 사회는 진정 영적으로, 신적이자 인간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전’의 서문처럼 열린 미완의 상태다. 그리고 그 미완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김규항의 예수전
최근에 들어서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내고 곱씹어보는 작업을 많이 해도 나의 글을 써내거나 하는 일은 조금 드물었다. 이유인즉슨 정리되지 못한 발언들을 하기 전에 사유의 가락을 조금이나마 잡아보자는 나름의 다짐이었다. 예수에 대한 다산적이었던 나 자신의 글을 최근에 써내려가지 못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민중신학의 태동지 한신이라고 하지만 실로 한신에서 배출하는 목사,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적 이념을 지닌 것은 아니다. 난 경동에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 민중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기표와 기의의 거리를 떠나, 그건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정해진 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 시대의 민중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답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낡은 어휘로 사어가 되어버린 그 '민중'이란 단어를 안병무는, 그리고 김규항은 이 시대에서 못 살고, 소외받는 그 모든 사람이 민중이라고 말한다. 아니, 당신들 모두가 민중이라고 말한다. 함석헌은 말했었다. 우리는 '씨알'이라고. 씨알은 마음속에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 큰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전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계급적인 표현을 넘어서 예수 역시 그렇게 사람을 대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억눌리고, 핍박받는 자들, 그들에게 당신들이 민중이라고,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핍박하는 자들, 당신들 역시 달라져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다. 세상은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을 넘어서 더 잘 사는 사람, 더 못 사는 사람과 같이 몇 십, 몇 백 조각으로 세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는 무소유를 권한다. 법정 스님과 다르지 않다. 그는 어려운 길을 말한다. 너의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제물, 가족까지도. 버리라는 말은 그들과 남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라는 말일 것이다. 예수가 40일의 고난을 겪은 뒤, 인격적으로 해탈을 했는지, 또는 부활 전에 이미 신이 되었는지를 논하기 전에 그는 조금씩 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유는 그가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영적 혁명은 사회적 혁명과 다르지 않았다. 예수가 불행했는가? 아니다. 그는 행복하기를 원했고,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했다.
김규항은 예수전의 뼈대를 마가복음에서 잡는다. 마가복음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의 원천이 되는 글이다. 신학적인 부분의 가미가 조금은 덜한 글이다. 그만큼 예수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예수가 왜 죽었는지? 정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은 것인지에 대해 그는 대답한다. 예수는 잘 사는 사람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억눌린 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 또한 꿰뚫어 보고 진정한 혁명은 계급, 무엇과 무엇을 가르는 이념을 떠나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가 서로 자기의 것을 취하지 않으려 할 때, 서로를 위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또한 영적 혁명이 사회적 혁명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억눌린 그들 자신도 역으로 자신이 혁명으로, 또 누군가를 억누르기 위해 변화를 원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예수는 그래서 외롭게 죽어갔다. 억누르는 자들의 권력과 억눌린 자들의 마음속에 도사린 이기. 그는 그 안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그는 변화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실로 가지고 갈 것은 한 줌의 공기 자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고등학교 때 읽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진리는 쉽다. 그리고 그건 종교를 넘어서 진리 그 자체로 다가온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뿐이다. 비겁한 우리가 진리를 훼손하고, 구원을 오독하며, 실존적으로 우리가 노력하며 이뤄야 할 것들을 이미 이루어졌다며 구원이 임했다고, 이미 이루어졌다고 싱겁게 말할 뿐이다. 예수는 성전을 헐었다. 휘장을 찢었다. 그리고 자신도 찢겼다. 휘장이 찢긴 것은 예수가 찢겼기 때문이다. 내가 찢기지 않는다면 사회는 찢기지 않는다. 나의 변화가 없다면 사회의 변화도 없다. 진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는 교회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지만 기독교는 교회 안에만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신앙은 하루가 아니라, 전 시간, 공간, 생애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허름한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이름 없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다.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한 예수는 지금도 우리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다. 예수가 쉽게 말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이름이 쉽게 불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그 이름이 김훈이 ‘바다의 기별’이라는 수필에서 말한 ‘사랑’과도 같은 개념이라고 느껴진다. 저 강 너머 언저리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그 목소리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손길을 본 내가 그와 나 사이의 강의 길이가, 또 넓이가 너무 길고 멀다며 외면할 뿐인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과 태도, 그 모습을 생각할 때, 난 일주일에 하루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와 자본주의라는 일상에 젖어 경영학의 제1명제인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라는 그 테제에 순응을 하며 현실로 돌아가고 안주하는 나 자신이 구역질이 난다. 어쩔 수 없다는 그 현실을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그럴 바에는 우리 차라리 예수를 말하지 말자. 그러기엔 우리가 참 더럽고, 그 이름이 너무 경건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차라리 기도도 말자. 내 것을 팔아 남에게 주라는 그의 기도 앞에 나의 복을 구하는 내 기도 역시 너무 더럽지 않은가? 그에게 미안해하며 내 삶을 전복시킬 각오가 없다면, 그리고 그게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 차라리 그 이름을 말하지 말자.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은 실은 우리가 신을 죽였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2000년을 넘어 우리에게 자신을 비울 것을 가르쳤지만 여전히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를 채울 것인지를 고민한다. 한 사회주의자가 전해주는 예수, 목사도 아닌 평신도가 전해주는 예수. 그가 전하는 예수가 어떤 목사가 들려준 예수보다 더 실제적으로 다가왔다. 버린 사람은 행복하다. 난 청량리에서 자취하면서 간간히 들리는 다일교회의 최일도 목사님의 얼굴에서 그것을 느꼈다.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버리면 모든 것을 잃고, 나 자신마저 잃을까봐 알알이 움켜쥔다. 예수는 내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예수에 가까워질 때 사회는 진정 영적으로, 신적이자 인간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전’의 서문처럼 열린 미완의 상태다. 그리고 그 미완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