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

기웅서200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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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과연 재물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인간이 재물을 만들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허락하셨을까?

 

돈은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일만 악의 근원이 되는 돈이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아니러니하게 믿음의 조상들은 이 악의 근원인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 악의 근원이 되는 물건 따위를......

 

아! 그런데 생각해보라. 악의 근원이 되는 돈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면? 많은 재물로 인해 예수의 제자 되기를 주저한 청년을 보자.

 

그가 소유한 재물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말 그대로 '악'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 그런데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고 교회를 섬기며 고아와 과부를 먹여살리던

 

초대교회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무소유'는 곧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물론 그로 인해 교회내의 성장에 치우쳐 선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역효과도 발생할 수 있지만).

 

돈을 소유하려 하면 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돈을 버리려 하면 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에게 가까워진다.

 

여기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본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재물을 헛되이 썼다는 말이다.

 

그는 본디 의로운 자가 아니었고 의로운 청지기는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사실이 주인에게 발각되자 그는 두려움을 느낀다.

 

주인은 그에게 청지기 일을 하며 빼돌리거나 헛되이 쓴 돈이

 

얼마인지 알아보기 위해 재물을 셈하라 한다.

 

이상하게도 주인은 여기저기 재물을 빌려주었다.

 

그것도 갚기 힘든 많은 재물을.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보았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자, 밀 백 석을 빚진 자.

 

생각해보라. 기름 백 말, 밀 백 석을 빚진 채무자가 채권자의

 

부름을 받았을 때의 심정을. 틀림 없이 빚 독촉이나 경고를 하려고

 

자신을 불렀으리라는 두려움과 절망감으로 주인을 찾아갔으리라.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주인도 아닌 그의 청지기가

 

빚을 탕감하는 게 아닌가? 도대체 이 청지기는 뭐하는 작자란

 

말인가? 분명한 주인의 소유를 자신이 깎아먹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사실을 안 주인의 태도는 더더욱 이상하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했다며 칭찬한다.

 

이 사건 뒤에 이어지는 진술은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재물은 불의하다 하신다. 그런데 그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하신다. 이 말은 무조건적으로 재물을 퍼다 주라는 말일까?

 

자신은 완전한 무소유가 되어 거지처럼 살지라도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보라는 말인가? 그러면 그 친구가 은혜를 못 잊어

 

거지가 된 나를 책임지고 먹여살린다는 말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빚을 완전히 제하여 버린 것이 아닌,

 

탕감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0을 80으로, 50으로

 

줄여주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진 자에게 감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일지라도 그것이 의로운 일을 위해

 

쓰이는 것을 원하고 계실 따름이다. 삶의 희망이 없는 빚진 자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이 제 힘으로 돈을 벌어 빚을 갚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빚진 자들 또한

 

나중에 동일하게 자기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하기를

 

바라실 것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하신다. 지극히 작은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재물이다.

 

악의 근원인 불의한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자에게

 

어찌 믿음, 충성, 겸손, 온유, 절제, 감사, 자비, 양선, 오래 참음

 

등을 바랄 수 있을까. 겸손한 구두쇠, 충성스런 부자라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보이는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데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 이루어진다. 불의한 재물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사귀고

 

그것으로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예물을 드리는 것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자신의 소유의 얼마를 무조건 하나님의 것으로 제하고 나머지

 

것으로 삶을 유지하되,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충성하는 자라면

 

그는 진정 작은 것에 충성한 자라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라셨을 때 그가 순종했던 것처럼,

 

초대교회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와 고아와 과부를

 

섬겼던 것처럼 진정한 '무소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 본다.

 

나는 나의 소유를 나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내 힘으로 얻는

 

것도 내 것이며, 운 좋게 내 것이 된 것도 내 것이며 억지로 뺏은

 

것도 내 것으로 여긴다. 혹 내 재물에 손해가 있다면, 내 재물을

 

바라는 자가 있다면 먼저 의심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다. 세상에 내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삶의 주인이 되려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부터 나의 주인은 내가 되고 하나님은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대신, 재물이 하나님이 돼버렸다.

 

법정이 말한 무소유는 참된 무소유인가? 물론 맥락은 통한다.

 

허나, 그리스도인의 무소유는 소유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에 목적이 있다. 청빈한 삶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내 삶에 진정한 의미의 무소유가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나를 허비해야겠다. 불의한 재물을 허비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중간지대는 있을 수 없다.

 

불의한 재물이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의 도구가 되도록

 

여생을 살아가고 싶다. 잘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