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MBC 파업/손석희 그는 누구인가?

오은주2009.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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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장악 노린 손주환.최창봉의 오판 [월간 '말' 1992년 11월호] 다시보는 MBC 파업

최성민 한겨레신문 여론매체부 기자

 

전국언론노동조합이 한나라당과 정부의 '언론장악 7대악법' 저지를 위해 26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는 이와 관련 지난 1992년 벌어진 MBC파업에 대한 1992년 월간 '말'지 기사를 게재합니다.

MBC가 손주환 전 공보처 장관과 최창봉 사장의 방송장악 음모로 두 달째 '몸살'을 앓고 있다. MBC의 주인을 내쫓고 경찰을 불러들인 반언론행위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노태우 대통령은 재임중 방송국에 세 번이나 전투경찰을 주둔시킨 '국제적인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인가. MBC사태의 원인과 배경, 그 배후를 알아본다.

MBC 월간 '말' 1992년 11월호 사진 더 보기 ⓒ 민중의소리
MBC노조를 파업으로 몬 회사의 도발

지난 9월 2일(1992년) 노동조합의 파업돌입으로 시작돼 두 달 가까이에 접어들고 있는 MBC사태는 모종의기획된 '의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지면 이번 사태는 대선을 앞두고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파업을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회사쪽의 고발 시나리오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회사쪽의 그러한 의도는 노조파업을 불법으로 몰아 노조의 핵심 간부들을 제거하는 데 목적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러 통계에서 선거보도의 영향력 가운데 방송의 비중은 모든 매스컴의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방송의 이러한 위력을 아는지라 지난 87년 대선 당시 민정당은 노태우 후보의 유세뉴스 화면을 자체 제작해 KBS와 MBC 두 방송사에 저녁9시 뉴스용으로 공급했다는 얘기도 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도 방송보도에 의한 이미지 조작은 여권후보 당선의 중요한 열쇠로 작용할 것이고, 불공정방송 시비를 걸고 나올 노조와 그 핵심 간부들은 방송의 여권 편들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지난 90년 4월 KBS방송민주화 운동을 경찰력 투입으로 진압했던 경험도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시 경찰력투입 등 강공책이 다소 사회적 비판을 초래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금방 묻혀 버렸고 결과적으로 KBS노조를 약화시켜 방송장악의 실효를 거뒀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번 대선을 위해 이제 MBC노조만 잠재우면 여권 편들기 방송에 별 탈이 없을 것이고 동시에 상당히 적극적인 공정보도 실천 노력을 하고 있는 MBC노조를 약화시킨다는 것은 다른 언론사의 공정보도 운동에도 큰 무력감을 안겨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MBC회사 쪽의 이러한 도발의도는 그동안 회사쪽이 취해 온 입장과 노조에 대한 대응방법들을 꿰엮어 더듬어보면 잘 드러난다.

우선 MBC의 노조깨기 작전개시는 90년 초 3당합당과 때를 같이한다. 성경환 아나운서(MBC마감뉴스 담당앵커, 노조 쟁의대책위원) 등 일선 방송현업인들의 말에 따르면 3당합당 이전에는 그런대로 방송이 제대로 가고자 한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그러나 3당 합당으로 정국 기상도가 달라지자마자 방송은 여권 편향으로 기울기 시작, 90년 6월부터 회사쪽의 거부로 공정방송협의회(공방협)가 한 번도 열리지 못했다.

그리고 89년 말 단체협약에 추천제가 합의됐으나 노사간에 추천인단 구성 비율에 대한 논의가 완결되지 못한 채 추천제는 사실상 사문화 됐다. 추천제 문제가 해결 안 되자, 보도·편성·제작·기술국 노조원이 89년 11월 추천제 형식의 투표를 실시해 3배수의 대상자를 추천했으나 그와 관계없이 회사쪽은 각 국장을 임명했다.

안성일·김평호씨 해고로 노조에 '선전포고'

90년 9월 PD수첩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프로그램의 방영연기에 관한 논란으로 회사쪽이 현직 노조위원장 안성일 씨와 사무국장 김평호 씨를 전격해고한 사건은 노조에 대한 회사쪽의 노골적인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당시 남북고위급회담 북한쪽 대표들의 서울일정을 구실로 PD수첩의 방영을 돌연 연기시키고 이에 항의하는 노조위원장과 사무국장을 사내 위계질서 문란이라는 누명을 씌워 해고시켜 버렸다. 공방협 개최를 거부, 문제제기의 문을 봉쇄한 다음 PD수첩 방영을 일방적으로 연기해 노조를 자극하고 이에 항의하는 노조위원장과 사무국장을 제거함으로써 노사관계를 선의의 상대가 아닌 적대관계로 규정한 것이다.

그 이후 올해 4월 28일 단체협약 갱신교섭이 시작되기까지의 기간은 노조쪽에는 자괴감을 곱씹으며 어떻게 해서든 기사회생을 모색하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회사쪽으로써는 위원장 등을 해고시켜도 속수무책인 노조의 무력함을 확인해 가며 KO펀치를 날리기 위해 잽을 구사하는 굳히기 작전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회사쪽의 도발은 단체협약 갱신 교섭에서 바로 실천에 옮겨졌다. 현행 단체협약의 보도국장 등 추천제 조항을 없애자는 개악안을 부르짖고 나온 것이다. 그 이후로는 추천제가 회사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공정방송의 기준은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회사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KBS에서는 이미 노사간의 합의를 실시하고 있고, 많은 일간지들이 편집국장 직선제에서 추천·임명·동의제, 탄핵제까지 도입해가고 있는 추세에서 MBC회사 쪽이 왜 굳이 추천제 삭제를 들고 나왔겠는가? 언론노련을 비롯한 모든 언론사 노조 강령에는 공정보도 추구를 으뜸 목표로 정하고 있다. 공정방송 실천 노력이야말로 노조활동의 근간이요 노조의 존재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방송사 노조에게 회사쪽이 그것을 포기하도록 밀어붙이면서 노조를 당혹스럽게 한 것이다. 이때 또 회사쪽이 덧붙인 말이 있다. "89년 단협체결 때에는 전반적으로 노조의 힘이 상승세를 탈 때여서 추천제를 받아들였으나 이제는 사회분위기가 달려졌으니 제자리로 돌려 놓자"는 것이었다. 89년 단협체결 이후 한 번도 실시해 보지 않은 추천제를 인사권 침해를 들어 막무가내로 없애자고 하는 데에는 분명 다른 뜻이 들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도발의 수준은 임금 일방인상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론 MBC의 임금수준이 높아 총액기준 5%이상 올려줄 수 없는데도 노조쪽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선전하고 또 한편으론 임금인상 지연에 대한 사원들의 불만이 깊어 더이상 늦출 수 없다는 상반되는 홍보문구가 덧붙여 졌다. 이때 회사쪽은 노조가 파업 이외의 길을 선택할 수 없으리라고 봤음직하다.

회사쪽으로써는 노조가 이제 에너지가 거의 다된 그로기상태에서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을 때는 공익사업체 직권중재안이 동원될 것이고 그것을 거부한 노조의 파업은 당연히 불법딱지를 스스로 달면서 핵심간부를 잡아들일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는 계산은 쉽게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나리오는 바로 이행되었다. 파업과 거의 동시에 서울지방노동위원회의 직권중재가 들어와 오히려 회사 안보다 더 개악안으로 중재결정을 내리자 회사쪽은 이를 받아들여 92년도 노사교섭 종결을 선언해 버렸다. 그 다음 순서는 으레 파업참여 조합원들에 대한 일벌백계식 중징계였다. 백지연, 성경환씨 등 화면을 통해 널리 알려진 주요 보도프로그램의 앵커들에게 2~3개월씩의 정직이 내려졌다. 그리고 노조 집행부를 검찰에 고소해 구인장이 잇따라 발부되는 상황에서 교섭이 없는 대화 제스처가 한동안 진행됐다. 임금, 해직자 문제를 노조가 양보한 데 이어 공정방송 조항 문제에 있어서도 회사쪽의 대안제시 요구로 물러섰으나 이에 대한 회사의 대답은 "92년도 노사교섭은 이미 끝났으니 직권중재안을 받으라"는 것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지방 MBC노조들이 동조파업에 들어가자 이를 무산시켜 서울 본사 노조를 고립시키기 위해 지방 MBC에서는 모두 추천제 등을 수용하게 된다. 서울 본사의 방침과는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이율배반적인 방법이 동원된 것이다.

손주환·최창봉씨의 '오판'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회사쪽의 예기치 않았던 상황변화가 생겨 회사쪽의 도발목표 달성에 차질이 생겼다. 회사쪽의 잇따른 강공책이 노조원들을 분산시켜 노조를 약화시키기 보다 오히려 노조원들을 자극해 노조의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의 민자당 탈당과 중립내각 구성 발표 등 MBC사태에 영향을 미칠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회사쪽의 이러한 도발은 한 접시 잘 차려 올려서 권력의 환심을 사기 위한 회사 경영진의 자발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

MBC 월간 '말' 1992년 11월호 사진 더 보기 ⓒ 민중의소리
민주당 조사단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9월 29일 손주환 전 공보처장관은 파업중인 문화방송의 최창봉 사장과 이득렬 전무 등을 참석시킨 가운데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0월 2일 문화방송 파업 현장에 경찰력이 투입됐다. 이로 미루어 MBC사태는 손주환 전 공보처장관이 MBC경영진에 사인을 보내 이루어진 도발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손주환 씨가 공보처장관으로 발탁되면서부터 MBC사태는 예견됐다고 볼 수 있다. 중견언론인 출신이자 김영삼 민자당 대표의 처남이기도 한 손주환씨는 지난 5월 민자당 대통령 후보 선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으면서 언론조작 등을 통해 김영삼 씨가 후보로 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다가 이종찬 의원 쪽의 불만을 사 경질됐다. 그러한 그가 곧바로 공보처장관에 임명되자 언론계 일각에서는 그의 입각이 언론장악을 위한 대선용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나다를까 손씨는 일간지에 정부·여당에 불리한 기사나 사설이 나가면 즉각 전화를 걸러 제목을 바꾸거나 내용을 변경토록 압력을 넣은 것으로 알려져 민주당에선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 김영삼씨의 사생아 문제를 폭로한 인사이더월드 발행인이 구속되고 6공비리를 다룬 '옵서버'지가 피소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 그는 얼마 전 "언론은 통치기관"이라는 어마어마한 언론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언론계와 정가에서는 손 씨의 불도저식 스타일이 대선이 다가오면서 왠만한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언론을 기어코 장악하는 방법으로 발현될 것이며 그것을 위해 손 씨를 그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언론장악의 주요 대상은 중요도에 비추어 당연히 방송이 될 것이며, 이미 90년 5월 KBS사태를 거쳐 장악이 완료된 KBS에 이어 MBC가 그 첫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파업기간동안 MBC회사 쪽이 보여준 상식을 초월한 주장과 밀어붙이기식 대처방안도 그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태가 날마다 이어졌기 때문이다. 손주환 씨와 교감하거나 그의 입김을 스스로 감지하고 대선 방향이 특정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고 있다는 판단하에 확실히 점수따는 방법을 선택했가고 볼 수가 있다. 여기에다 현 MBC경영진의 핵심간부 인력구조도 사태와 연관해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89년 말 추천제 형식의 투표당시 조합원들에 의해 최다투표로 뽑힌 노성대 씨를 비롯한 강영구, 하광언씨 등이 현재 각각 통일문제 담당 이사대우, 도쿄지사장, 보도제작국 부국장 등 모두 무보직·한직 또는 그와 유사한 자리로 물러나 있고 당시 추천에서 탈락돼 불신임 평가를 받은 이득렬, 편일평, 이상욱씨 등은 각각 전무·관리담당이사·보도담당이사 등 모두 주요 핵심직책을 맡고 있는 것이다.

MBC노조 승리의 조건들

따라서 10월 2일의 경찰력 투입은 물러날 날짜를 받아놓은 손주환 전 공보처장관이 점수따기에 급급한 MBC최고경영진 및 추천제를 기피하는 핵심간부들과 함께 벌인 마지막 강공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노조의 응집력은 경찰력 투입에도 별로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밖으로 쫓겨나온 뒤 오히려 국민적인 명분에서도 노조가 앞서고 있어 MBC, KBS는 물론 언론노련·기자협회·범국민대책회의 등의 모든 조직이 대국민 홍보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여기에 마침 중립내각 출범과 KBS의 동조파업 결의라는 호재가 겹치는 등 지금까지의 상황전개로 보아 90년 KBS사태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또 공공재인 방송이 벌써 두달 가까이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는 데 대해 회사최고책임자의 문책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정가에서 나오고 있다. 신임 유혁인 공보처장관은 MBC사태의 내부해결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동안 최창봉 사장의 지나친 강공책이 회사쪽을 자승자박해 노조쪽으로부터 극도의 불신을 사고 있어 원만한 대화에 의한 내부해결은 최 사장의 경질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함께 방송위원회(위원장 고병익)가 지난 9월 본회의에서 MBC사태에 대한 강한 대책을 세우기로 결의하는 등 벌써 눈치가 달라지고 있다.

한편 KBS노조가 8일 조합원 투표에서 70%에 가까운 동조파업 찬성률을 얻어낸 데 이어 13일 비상대책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연대투쟁 결의를 재확인하는 등 MBC노조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밖에 이미 MBC의 방송차질이 심화돼 시청률이 현저히 떨어져가고 있는 가운데 MBC정상화와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등 시민단체들이 'MBC안보기', 'MBC광고주 상품불매운동'을 벌일 기세여서 MBC사태 해결을 위한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또 회사쪽이 무한정 경찰력 상주요청으로 노조의 회사진입을 막고 있을수만은 없다는 점도 사태전개의 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물로 또다른 전제로써 회사쪽이 노사대치상황을 현상태의 수준대로 대선까지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있다. 기왕 벌어진 일이고 보면 차라리 노조라는 제어장치가 밖에 나가있는 사이 다른 프로그램은 포기하더라도 의식이 뚜렷한 핵심간부들을 총 동원해 보도 프로그램만은 마음 먹은 바 대로 대선때까지 끌고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 회사쪽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현시점에서 대화에 의한 사태해결로 노조가 들어올 경우 한층 오른 노조의 기세가 회사경영층을 전보다 훨씬 공박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럴 경우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던 경여층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는 위기의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제 누구를 위해 편들기 방송을 하느냐"는 물음에 부딪히게 된다. 최근 정국의 흐름은 섬겨야 할 대상을 흐리게 해 이제 문화방송 사태를 일으킨 도발은 자기정리에 상당히 혼돈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정방송을 감옥에 가둘 수 없다
MBC 월간 '말 1992년 11월호 사진 더 보기 ⓒ 민중의소리
영등포구 여의도동 31번지. 이곳은 더이상 MBC주소가 아니다. 1992년 10월 2일 MBC의 주인들은 원치않는 이사를 해야 했다. 이날부터 MBC의 주인들은 전투경찰로 바뀌었다. MBC의 주인들은 지금 두 개의 주소를 갖고 있다. 영등포구 여의도동 18번지 KBS노동조합. 이곳에는 MBC노동조합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정기평)가 자리잡고 있다. 비대위는 연일 부문별 집회와 거리홍보를 벌이며 경찰을 난입시켜 MBC의 역사에, 한국 방송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폭거를 고발하고 있다.

또하나의 주소가 있다. 구로구 고척동 영등포구치소. 이곳에 또다른 MBC의 자랑이 있다. 공정방송이 갇혀 있다.

이완기. 회사측이 안성일 위원장 집행부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단체교섭을 기피하자 지난 1월 말 기술부문 부위원장에서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아 MBC노조를 이끌어 온 방송기술인이다. 동료들은 넉넉한 포용력과 소탈한 성격으로 합리적 대화를 중시했던 그가 회사측의 일방적인 도발로 감옥에 같혀 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는 지금 3455번으로 불린다.

최상일. 편성제작부문 부위원장. 노조창립 초기부터 굳은 일을 도맡아 꼼꼼하게 처리해 온 그는 방송에서 찬밥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 민요를 채집하기 위해 전국을 방랑하기도 한 진짜 한국인이다. 최창봉 사장 덕분에 3407번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박영춘 사무국장. 상식과 원칙을 중시하는 그는 조합활동 이후 즐겨 마시던 술도 절제했다. 사내외 정보에 정통한 '마당발'로 대인관계가 넓은 조합의 살림꾼이었다. 방송문화연구소에 소속돼 있던 MBC노조의 어머니는 3403번이라는 수번을 달고 있다.

정찬형 민실위 간사. 한 번 한다면 끝까지 추적하는 열정파. 직함에 어울릴 만큼 공정방송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 방송담당 기자들도 "그는 늘 기자들보다 새로운 정보를 취재·발굴한다"며 면도칼같은 정보통을 뺐긴 것을 애석해 하고 있다. 아나운서보다 더 많이 파업집회의 사회를 도맡아 조합원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그는 누구보다도 방송을 사랑하는 프로듀서이다. 서른 다섯의 노총각인 그가 파업직전 12살 아래의 규수를 꼬셔 결혼에 성공한 것도 그의 재취와 사람 좋음 때문. 그를 구제해 준 주인공 김현정씨(기자협회보 기자)는 "연애시절 MBC노보에서 '무엇을 위한 징계인가? 공정방송이 징계받은 안타까운 계절'(89년 6월)이라는 글을 일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정 프로듀서는 그가 쓴 글대로 한달 만에 아내와 생이별을 당했다. 김현정 씨는 당시 '남편을 3412라고 쓸때 가장 슬프다'는 기고문을 통해 "무엇을 위한 구속인가?-공정방송이 탄압받는 분노의 계절"이라며 항의하고 있다.('프로듀서' MBC파업특보, 10월 13일)

손석희 대외협력위 부간사. 별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뉴스 앵커. MBC노조의 보배로 통한다. MBC노래패, 겨레현대사모임 등에 참여해 다방면의 재능을 키워온 그는 전국을 누비는 명연사이기도 하다. 민주방송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는 그는 화면 뒤에서도 스타이다. 서울대의 한 여학생은 "손석희 아나운서 때문에 MBC를 좋게 보게 됐다"고 말하고 "MBC경영진은 그에게 공로패라도 수여하는 게 도리"라고 덧붙였다. 손석희 아나운서는 화면 밖에서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파업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고 감옥에까지 같혀야 하는 현실은 우리 방송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아뭐래도 이 부끄럼 타는 동안의 미청년이 만삭의 아내(신연숙 전 아나운서)를 밖에 두고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3461번이라는 수번을 그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MBC 월간 '말 1992년 11월호 사진 더 보기 ⓒ 민중의소리

 

 

이채훈 선전홍보부장. MBC의 조합원들과 언론노동자들은 문화방송 노보를 통해 그를 만나왔다. 노보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의 표정에는 늘 방송사랑이 넘친다. 털털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순박함과 섬세한 심성의 소유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피아노와 클래식기타를 잘 치는 '고전파'로 알려져 있다. 평소 "본격적인 음악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게 꿈"이라던 이 프로듀서는 "원래 음대를 가고 싶었다"고 자주 얘기해왔다. 수번은 3433번.

함윤수 파업독려반장. MBC의 한 관계자는 "파업독려반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그를 만나본 사람이면 누구나 천진무구한 언행에 놀랠 정도로 온건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파업기간 내내 침착한 태도로 질서를 유지해주었던 그가 구속되자 추가로 파업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수번은 3410번.

그러나 민주방송을 감옥에 가둘 수는 없다. 짓밟을수록 일어난다. 지방 MBC노조가 동지들을 구하러 나섰고 KBS노조도 90년 4월의 빚을 잊을 수 없어 MBC노조의 뒤를 따라 나섰다. 전국 방방곡곡의 아주머니·노동자·학생·경찰관·공무원들이 MBC의 뒤를 잇고 있다. MBC의 주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송의 주인인 국민들이 'MBC정상화와 공정방송실현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로 뭉쳤다. 진짜 방송이 일어난다. 국민의 '쇳소리'가 되살아나고 있다.

MBC비대위는 파업투쟁속보를 제작·배포하고 있다. 파업투쟁속보 28호는 지난 10월 6일 '공정방송실현 방송인대회'의 촛불시위를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불은 군중의 상징입니다. 어젯밤 우리들이 모인 곳에는 촛불이 있었습니다. 촛불은 잘 절제되고 승화된 불입니다...우리는 이런 싸움을 촛불과 같은 모습으로 해나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르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단식과 구속과 징계. 우리는 앞으로도 이런 방법으로 싸워나갈 것입니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질 때까지...더 이상 구속될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보도국 최문순)

이제 그리 멀지 않은 '민주승리'의 훗날을 위해 MBC를 경찰에 내주고서야 맘이 편한 사람들은 손주환 전 공보처장관, 최창봉 사장, 이득렬 전무였고 대통령은 노태우씨였으며 집권당의 총재는 김영삼씨였다고 써놓아야겠다. 그리고 이른바 '중립내각'의 공보처장관인 유혁인씨가 MBC사태를, MBC의 구속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지켜보아야겠다.

안성일 위원장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2백93일의 농성을 같이 했던 동지들의 구속이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프지만 값진 경험을 통해 더욱 강해지리라 생각한다"며 "승리의 기쁨으로 동지들이 돌아올 날이 멀지 않았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방송인들은 긴 나날을 불공정방송에 대한 '원죄의식'으로 살아왔다. 국민에게 진 빚을 갚겠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MBC의 구속방송인들에게 국민이 진 빚을 갚을 차례이다.

민주방송을 사랑하는 국민들, 월간 '말'의 독자들이 구속방송인과 MBC비대위를 위해 격려편지와 전화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MBC노조:789-3881, MBC비대위·KBS노조:781-2991)

공정방송의 간판스타 손석희 아나운서 [월간 '말' 1992년 12월호] 다시 보는 92년 MBC파업

양성희 TV저널 기자

 

전국언론노동조합이 한나라당과 정부의 '언론장악 7대악법' 저지를 위해 26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는 이와 관련 지난 1992년 벌어진 MBC파업에 대한 1992년 월간 '말'지 기사를 게재합니다.

'아도니스형의 미소년' 아나운서 손석희. MBC의 '간판스타'인 그가 노조의 열성당원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옥살이까지 경험했음에도 더욱 열심히 공정방송을 위해 뛰고 있는 그를 '문화초대석'에 앉혔다.

범법자가 된 MBC의 '간판스타'

손석희 월간 '말 1992년 12월호 사진 더 보기 ⓒ 민중의소리

 

누군가는 다소 감상적인 어휘를 빌려 '아도니스형의 미소년'이라 했다. 아나운서 손석희(36). 탁월한 순발력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의 뉴스앵커, 희고 차가운 용모의 인기 아나운서, MBC의 간판스타.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그의 프로필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MBC 노조 대외협력위 부간사라는 직함의 그는 석 달 새에 20일의 옥살이를 겪고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및 업무방해죄로 불구속 기소중인 범법자(?)가 되었다. 지난 6년간 매일 저녁 7시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텔레비전 화면에서 사라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공정방송'을 내건 50일간의 파업이 끝나고 정상을 되찾은 MBC노조 사무실. '구속자 석방' '프로그램 원대복귀'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들이 어지러이 붙어 있는 조합사무실은 건강한 생기로 가득 차 있다. 부산한 움직임 속에 한족 구석에서 예의 단정하고 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있는 그가 보인다. 요즘 부쩍 많아진 집회, 행사의 초청전화다. "제가 요즘은 너무 바빠서요. 마음 같으면 꼭 참석하고 싶지만, 그런 위치도 아니고요." 상대방은 여간해서 설득당하지 않는 눈치다.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를 '문화초대석'에 앉혔다.

- 파업은 끝났는데, 더 바빠지신 것 같군요.
"글쎄 저 혼자 싸운 것도 아닌데 관심을 가져주시네요. 이 모든 것이 우리 MBC 노조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쑥스럽습니다."

- 이번 MBC 파업에 대한 내부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애초의 목표인 '노조사수'에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주요쟁점이었던 '3국장 추천제' 확보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 대신 공정방송의 실질적 장치인 '공정방송협의회'의 활성화에 노사가 합의한 만큼 진 싸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따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백지연·김은주 등 8명의 아나운서 복귀문제, 공정방송부문 등 앞으로 합의 사항이 얼마나 지켜지느냐와 구속자(이완기 위원장 등 3명), 수배자(심재철 등 3명) 등의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달려 있을 것 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파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 셈이지요."

'잘 나가는' 방송인이 왜 노조일에?

- 방송사 노조의 전반적인 침체속에서 이번 MBC 노조의 응집력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그동안 너무 침체되고, 너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90년 이후 MBC 노조는 해고사태와 근 10개월간의 철야농성에도 아무 성과 없이 연명하다시피 지내온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집행부 내부에서도 최악의 경우 1,290명 가량 파업에 참여하리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정적인 오판이었고 도리어 그간 쌓여온 자괴감과 위기감이 결정적인 시기에 폭발한 것이죠. 온건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파업을 풀어간 집행부의 판단도 주효했다고 봅니다."

- 일부에서는 이번 파업이 지나치게 MBC 내부만의 문제로 좁혀지지 않았는가 하는 지적도 있는데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유는 두가지인데, 첫째 실질적으로 MBC 파업은 꼭 외부와 연계시키지 않아도 결국 외부로 파급된다는 것이고, 둘째 조합원을 결집시키고 내부역량을 다 끌어내려면 현재 노조가 처해 있는 실정에 맞게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사내부의 문제, 공정방송의 문제에 사회·정치적 문제를 결부시키면 곧 거부감을 느끼는 게 대다수 조합원의 정서입니다. 이를 두고 타협이다, 부문운동의 한계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까요.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운동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 이번 파업에서는 아나운서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진 것으로 기억됩니다만.
"특별히 더한 일도, 덜한 일도 없습니다. 다만 아나운서들은 시청자에게 최종적으로 방송을 전달하는 사람들로서 느끼는 갈등이나 고민이 컸고, 일의 속성상 파업에 들어가면 당장 표가 나 파업의 가시적인 효과가 크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만큼 파업 후 피해나 불이익이 큰 점은 아주 안타깝습니다. 이를 두고 마치 MBC 아나운서들은 모두다 강성이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주 잘못된 시각입니다."

이쯤 해서 아주 어뚱한, 그러나 본질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어찌보면 '잘 나가는', 아쉬울 것 없는 방송인인 그가 왜 이토록 열성적으로 조합일에 나서게 된 건가 말이다. 그로 말하자면 입사 직후부터 주요 프로를 도맡아, 한때는 5개 프로에 겹치지 출연하면서 MBC 뉴스를 대표하는 간판스타로 '키워져'온 이가 아니었던가. 일종의 '시혜'로 까지 여겨지는 아나운서의 보도국 기자 발령도 그가 최초였다(그는 87년 4월에서 89년 3월까지 보도국 사회부 기자로 일했다).

"왜 노조를 하는가, 이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노조를 안할 수 있는 명분이 없습니다. 운동가까지는 못 되더라도 직업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식, 소시민적 도덕성을 지키려고만 해도 노조활동은 불가피 합니다. 이게 우리 방송현실의 비극인데, 거기에 국민의 눈과 귀를 대신한다는 우리 직업의 특수성이 더해집니다. 노조만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선택이지요."

- 노조활동으로 인한 불이익이 두렵지 않았습니까.
"아니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불이익이 뭐겠습니까. 프로그램을 못하는 것, 시청자와 만나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프로를 많이 한다고 대수는 아니지요. 아무리 적은 프로를 하더라도 바르고 좋은 방송을 하는 게 중요하겠죠."

부끄럽고 낯 뜨거운 기억

사실 그동안 그가 공정한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남모르게 들인 노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다. 그를 옆에서 지켜봤던 후배 이채훈 PD(노조 선전홍보부장)는 "그야말로 상식과 균형감각을 갖춘 앵커다. 그가 어려운 시절 보여준 용기는 고귀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부끄럽고 낯 뜨거운' 기억이 있다.

"88년 쟁의기간중 준법투쟁으로 '공정방송 쟁취'라는 리본 달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땐 리본을 달겠다고 하면 아예 진행자를 교체해버리는 분위기였는데, 토요일 '뉴스데스크' 시간에 나가면서 와이셔츠에 리본을 달고 그 위에 겉옷을 입고 나갔습니다. 리본이 보일락 말락 하게요. 방송을 끝내고 얼마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던지, 이러다간 내 인생 앞에 큰 빚을 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 다음날 당장 리본을 달고 나갔죠. 그땐 말들이 많았습니다."

- 우스운 얘기지만 입사 초기엔 속된 말로 '빽이 든든한' 아나운서로 알려지기도 했었는데요.
"그 부분은 정말 해명하고 싶어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제 뒤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뒤에 뭔가 있지 않고서는 저럴 수 없다 하는 오해가 생겼던 모양인데, 전 단지 상황이 만든 스타였을 뿐입니다. 그때는 정권홍보의 차원에서 뉴스 시청률에 신경을 많이 쓰던 때였죠. 시청률이야 올바른 뉴스를 내보내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것인데 상황은 안 그랬고 자연히 비본질적인 것에 더 신경들을 썼어요. 미국식의 앵커시스템을 (그것도 껍데기만) 도입한 게 그때 일이에요. 스타앵커를 키우고 외모나 분위기 같은 '포장'에 훨씬 더 비중을 두는 거죠. 그나마 미국식 앵커처럼 편집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캐스터에 가까운 역할이었는데, 상품성·스타성이 있다 싶으니까 뉴스·퀴즈·FM 가리지 않고 내보낸 겁니다. 마냥 행복한 기분만은 아니었어요. 계단을 내려오는데 누가 뒤에서 미니까 넘어지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안간힘을 쓰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 바람직한 앵커시스템이란 어떤 것이라 생각합니까.
"흔히들 우리나라엔 제대로 된 앵커가 없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다분히 미국식의 앵커제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 생각은 미국식이 뉴스진행의 이상적인 형태는 아니라고 봅니다. 미국식 앵커란 앵커 개인에게 스폿을 맞춰서 '스타'를 팔아먹는 겁니다. 그에게 전권을 주죠. 앵커가 편집도 하고 인사에도 관여하고 텔레비전 화면 전면을 차지하고 뉴스를 지배합니다. 하지만 뉴스는 취재에서 송출에 이르는 생산과정을 거치는 생산물이지 앵커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결국 문제는 앵커의 자율성이 아니라 그 생산과정의 건강성이에요. 생산과정만 건강하다면, 그래서 건강한 뉴스만 생산된다면, 제가 앵무새처럼 멘트를 읽는다고 해서 뭐가 문제겠습니까. 뉴스는 객관성이 최고의 덕목인 만큼 개인의 퍼스낼리티는 가급적 '죽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를 다시 파업으로 돌려보자. 구치소에서의 20일간은 어떠했을까?

손석희 월간 '말 1992년 12월호 사진 더 보기 ⓒ 민중의소리


"닭장차를 타고 구치소에 들어가는데, 문이 버스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만큼 비좁았어요. 창문의 창살 틈새로 내다보니 예전에 용인자연농원 사파리에 아들 구용이(6)하고 놀러 갔던 기억이 나데요. 방에 들어간 건 새벽 4시였습니다. 일단 24시간 동안 불을 켜놓는 게 안심이 됐어요. 외부와 단절된 시공간 속에서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없다는 막막함은 견디기 힘들었지만, 1년 반 전에 김철수 선배(KBS 전 노조위원장)를 면회하러 갔던 1호실 그 자리에서 역으로 면회를 당하려니 그것도 좀 묘하데요."

잊을 수 없는 20일간의 수감생활

20일간의 수감생활중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세면장 갈 때나 면회하러 나갈 때 마주치는 수인(잡범)들이 따뜻한 안부인사를 건네던 기억들이며, 몇년 만에 찾아온 가족이 넣어준 영치금으로 야쿠르트 한 병을 사주던 한 살인범의 호의다. '뽀미언니'로 잘 알려진 부인 신현숙씨(30, MBC 전 아나운서)가 한달 남짓 산달을 앞두었을 대 덜컥 구속돼 하마터면 감옥 안에서 둘째 아들을 얻을 뻔했던 그는 첫 면회자로 찾아온 매형 주철환씨(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PD)에게 아이의 이름을 민주라 지어달라고 부탁해 작은 화제를 낳기도 했었다.

"둘째아이라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어요. 하지만 뱃속에서부터 구치소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도 안됐고, 집사람이 워낙 마음 고생이 심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정상인지부터 확인했다니까요. 지금은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는 56년 서울생이다. 개인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워낙 순박한 어른으로 남들에게 속는 일이 장기인지라 집안은 거의 늘 망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유년의 가난이 유별나거나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은 아니었다. 서라벌중학교, 휘문고등학교를 거쳐 76년에 국민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간 그는 사회비판의식은 있지만 행동의지는 박약한 '허무주의자'로 4년을 보냈다. 10·26, 5·18을 군에서 맞고 84년 1월 막연히 관심이 있었던 방송사 입사시험을 본 그는, 어쩐지 기자나 PD보다는 체질에 맞을 듯한 아나운서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여성스럽고 곱상한 외모만을 보고 아무런 세상고생도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 정도로 생각하는 통에 손해도 많이 봤다. 심지어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나서는 그에게 혹시 프락치가 아니냐며 공공연히 의심하는 선배도 있었다. 훗날 그로부터 정중한 사과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한 풀종다리의 꿈

- 혹시 방송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는 없었습니까.
"왜요. 5공 말기를 통과하면서는 많이 부대꼈지요. 하지만 어떤 갈등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함께 해결해나가려는 의지가 있는 한 희망은 있지 않을까요. 요즘은 어떤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도 그 조직을 이루는 사람들간의 애정과 신뢰가 더 중요한 문제란 생각이 듭니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왜 이런 맥주광고 있지 않습니까? 'OB가 좋다 사람들이 좋다'는."

- 방송인으로서 꿈은 무엇입니까.
"일단 방송현장에 돌아가는 일이지요. 그리고 '좋은 방송'을 하고 싶습니다. 이건 다소 포괄적이고 넓은 개념인데, 정치적으로 공정할 뿐 아니라 다양하고, 상식에 입각한 방송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우리 방송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저 역시 사회비판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관심을 가져왔는데 앞으론 관심의 폭도 넓히고 싶습니다. 굳이 장르를 따진다면 입장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의견을 조정하는 토론프로의 진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 생애에서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실체는 분명하지 않더라도 지금껏 제 일생에 지켜온 어떤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 싶다는 겁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또 지위가 달라진다고 해서 제 자신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긴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책상서랍에서 원고뭉치를 꺼낸다. '풀종다리의 노래'란 제목이 붙여진 짤막한 동화다.

"석방돼서 돌아오니까 서랍에 이게 들어 있더군요. 누가 서서 갖다 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정방송을 향해 싸우는 우리를 풀종다리(귀뚜라미과에 속하는 곤충)에 비유한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고, 우리 민주가 자라면 꼭 읽어줄 생각입니다

 

 

손석희 아나운서 국장이 22년간 몸담은 MBC를 떠나면서 자신은 행복한 아나운서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손석희 국장은 2006. 2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 방송센터 지하 간부식당에서 열린 퇴임기자회견에서 "내 아나운서 생활은 후배들이 평가를 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운이 좋았던 사람이었다"며 "1984년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MBC에 입사해서 (지금까지)생존해 남았다는 것이 운이 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노력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고 자평했다.

 

 

출생 : 1956년 6월 20일

직업 : 교수

학력 : 미네소타대학교대학원 석사

데뷔 : 1984년 MBC 앵커

소속 :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 전 MBC 아나운서 국장

방송 : MBC 100분 토론 MC  ,  MBC 표준 FM >>손석희의 시선집중

 

 

그의 존재는 해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에게 각인 되어지는듯하다...

손경민 앵커의 MBC 9시 뉴스데스크 방송 하차로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역시 손석희씨는 멋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