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때 저희 동네에 차력 시범이라는 것이 열렸습니다. 요즘에는 쉽게 듣지 못하는 단어입니다. 차력. 도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맨 손으로 벽돌을 깨뜨리고 자동차를 줄에 연결해서 입으로 끌고 또 땅에 누워있으면 그 위에 자동차가 지나가고, 이건 절대로 흉내 내면 안되는 일들입니다. 못을 박은 판에 누워있으면 그 위에다 벽돌을 얹어놓고 망치로 그것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한참 시범을 한 후에 약을 팔기 시작합니다. 그게 본론입니다. 그것을 팔기 위해서 그 많은 쇼를 한 것입니다. 저는 저희 아버님과 그 차력시범을 구경하면서 아버님에게 차력이 무엇이냐고 여쭤봤더니 아버님 말씀이 ‘빌릴 借, 힘 力, 힘을 빌리는 것이다. 거기 모인 군중의 힘을 빌려서 괴력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걸 쉽게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군중의 힘을 빌린다는 말인지, 제 힘은 가져간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면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인지 군중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얘기인지 그것은 지금까지 제 머릿속에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물론 약을 팔기 위해서 쇼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끄는 것도 자동차 기어를 중립으로 놨을 때는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주차장에서 한 손으로도 자동차를 밀 수 있으니까. 저는 돌멩이뿐만 아니라 얼음장도 깨뜨리는 사람을 봤기 때문에 그들의 괴력에 대해서는 별로 의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무대에 서 있는 사람이 군중의 심리적인 분위기와 에너지를 빌릴 수 있을까, 분위기, 충분한 분위기를 만들 수만 있다면 혼자 할 수 없는 것을 군중심리의 힘을 이용해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의 차력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개최됐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기 위해 길에 모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기라고 응원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지만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의 열정과 에너지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선수들에게 전달되어서 그들이 더 잘 뛰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을 제가 만나본 적이 있으니까.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바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종교집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교집회에도 거기에 모인 군중의 열정과 기대감과 이런 것이 집합될 수 있다면 그 힘을 빌려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병자가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 하나의 심리적인 현상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 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뜨겁게 찬송하고 기도하는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본인도 덩달아 뜨거운 기도를 하고 찬양을 뜨겁게 부르는데 집에 돌아오면 그것이 되풀이되지 않더라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저는 남들이 방언을 할 때 덩달아 방언을 하다가 혼자 방언을 하려고 하니까 안 되더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여러 번 만나봤습니다. 왜 남들이 방언할 때는 본인도 방언이 나오는데 혼자 할 때는 안 나올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제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물상시간에―요즘에는 물리라고 부르지요. 그 당시에는 물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학생이 선생님에게 한 질문이 기억납니다. 물상시간에 일어난 다른 일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질문만 기억이 납니다. 어느 키 작은 학생이 당돌하게 선생님에게 여쭤봤습니다. ‘선생님, 부흥회 같은 데에 가면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목사에게 물어보지 왜 물상선생님에게 그걸 물어보는지 모르겠어요. 그 물상 선생님이 당시 크리스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순간적으로 선생님이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대답하시기를 ‘만일 사람의 병이 심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종교의 힘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몸의 병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없다든가 손발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신앙의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이 생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건 과학 선생님으로서 정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교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종교적인 현상을 합리적으로 과학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 아마 그런 일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적인 현상이 심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이런 말을 했지요.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은 없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랬더니 누가 대답하기를 ‘희한하게도 기도를 많이 할수록 우연한 일이 많아지던데요.’
예수님은 나중에는 기적을 행하는 자로 알려졌지만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기적을 행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을 읽을 때 우리가 받는 인상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처음 읽는 마음으로 이 마가복음 1장의 예수님의 공생애의 초기 사건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는지를 미리 다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예수님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군중의 분위기를 유도하려고 했다든가 군중의 심리를 유도하려고 했다든가 병이 나으려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라고 가르쳤다는 흔적을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뿐인데 그 중에 귀신 들린 사람이 그 속의 귀신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고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귀신은 알아봤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처럼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파악하기 전에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니까 귀신들이 정체를 드러내고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줄 압니다 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하셨다면 설교 도중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건 기대하지 않던 일입니다. 예수님도 기대하지 않고 청중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니까 귀신이 그 정체를 드러내고 떠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더니 그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집이라도 그 집안에 들어가면 병든 사람, 문제 있는 사람, 아픈 사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라고 예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개인의 일이기 때문에 감춰져 있는 것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 내막을 보면 아픈 사람이 없는 집이 없고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심방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접받기 위해서 심방하신 것이 아니고 그 집을 찾아가기 전까지는 그들의 참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을 찾아갔더니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일로 고했더니 예수님이 가서 그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손을 잡고 일으키신 것뿐입니다. 그랬더니 열병이 나았다고 기록한 게 아니고 오늘 본문 31절을 보시면 열병이 떠나갔다, 열병에 어떤 인격적인 지위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가시니까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열병을 고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는데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가시니까 열병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예수님이 더 가까이 오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니까 귀신이 떠나가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오시니까 열병이 떠나가고 그래서 온 동네가 예수님 앞에 모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것을 예수님이 미리 의도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병이 나으려면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읽어보면 병 나음에 대한 설교를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들의 사역과 대비가 되는 부분이에요. 오늘날 신유집회에 가보면 병 고침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합니다. 병 고침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병 고침에 대해서 믿음을 심어주고 그리고 안수기도를 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도 효과가 있지만 예수님은 미리 여러분이 병이 나으려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오신 것은 아니에요. 병을 고치셨지만 그 목적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면 삼년 반만 계시고 승천하시지 말고 삼십년을 계셔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병자 천지이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라면 예수님은 백년이 있어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귀신도 떠나가도 문둥병자가 나음을 받고 그리고 병자가 낫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미리 사람들의 심리를 유도했다든가 분위기를 조성했다든가 쇼를 했다든가 이런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사람들도 순수함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어요.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이든 신앙을 옹호하는 사람이든 좀 더 순수해져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비판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비판하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배운 사람이라면 비판하려고 합니다. 대통령을 비판하고 기업인을 비판하고 교육계를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하고 모든 것을 비판하려고 하는데 비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벌써 천 번도 더 바뀌었을 것입니다. 비판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예수님이 사람을 비판하기 시작하셨다면 한도 끝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 투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요. 너는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고, 한도 끝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몰라서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알고 계시지만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존재인줄 아시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큰 기쁨이 되신다 그러면서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 이 모든 비유의 공통점이 뭡니까.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다 찾았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고 기뻐하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기뻐하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 기뻐서 잔치를 열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이요 천국의 기쁨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세상에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회개하는 자가 없다면 천국의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죄에 대한 애통함도 말해야 되지만 구원의 기쁨을 말해야 됩니다. 죄 때문에 애통해야 될 때가 있지만 일평생 애통해 하는 것은 그것은 천국이 아니에요.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죄 사함의 기쁨, 구원의 기쁨, ‘그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하옵소서―restore unto me the joy of your salvation―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 죄를 회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죄 사함을 받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O happy day, happy day’ happy day는 날씨가 좋아서 happy day가 아니고 복권이 맞아서 happy day가 아니고 주 나의 죄 다 사한 날,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죄 사함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에요. 심리적인 방법으로 죄 사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수십 년 전에 I''m ok, You''re ok 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지요. 그게 심리적인 방법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냥 ok, 문제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당신도 ok 나도 ok, 문제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자, 그건 심리입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ok라고 해도 하나님이 ok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죄 짐을 지고 여전히 죄의식에 매여 있다면 그건 불신이지요. 그거야말로 불신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고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위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죄를 면죄해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죄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도 순수해져야 되고 신앙을 옹호하는 사람도 순수해져야 됩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쇼로 만들려고 했어요. 분위기와 감정을 조장하고 그것이 마치 성령인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것처럼 한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차력 시범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해서 울게 하고 웃게 하고 마치 그것이 성령인 것처럼.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든가 사람들이 병 고침을 사모하게 하였다든가 이런 것이 일절 없고 예수님 자신도 무엇을 의도하신 것이 아닌데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동안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건 정말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의도한 게 아니에요. 그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권한으로 그것을 행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우리가 배울 것은 주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해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Let him do what he want to do, 주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내어드려야 됩니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어요. 예수님의 은혜든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했어요.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소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고 그것이 잘 믿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 그게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이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목사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목사가 기적을 일으키려고 의도한다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요.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하면 병자도 낫고 귀신도 떠나가고 문둥병자도 깨끗함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회당에 들어오시니까 귀신이 떠나가고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시니까 열병이 떠나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게 무엇일지를 우리가 미리 요구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순종하고 따르다 보면 당연히 좋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더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미리 요구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생각하지 않던 방법으로 주님의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분위기도 아니고 심리적인 것도 아니고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참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발견
2002년 한일월드컵이 개최됐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기 위해 길에 모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기라고 응원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지만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의 열정과 에너지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선수들에게 전달되어서 그들이 더 잘 뛰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을 제가 만나본 적이 있으니까.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바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종교집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교집회에도 거기에 모인 군중의 열정과 기대감과 이런 것이 집합될 수 있다면 그 힘을 빌려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병자가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 하나의 심리적인 현상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기도원에 가 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뜨겁게 찬송하고 기도하는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본인도 덩달아 뜨거운 기도를 하고 찬양을 뜨겁게 부르는데 집에 돌아오면 그것이 되풀이되지 않더라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저는 남들이 방언을 할 때 덩달아 방언을 하다가 혼자 방언을 하려고 하니까 안 되더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여러 번 만나봤습니다. 왜 남들이 방언할 때는 본인도 방언이 나오는데 혼자 할 때는 안 나올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제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물상시간에―요즘에는 물리라고 부르지요. 그 당시에는 물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학생이 선생님에게 한 질문이 기억납니다. 물상시간에 일어난 다른 일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질문만 기억이 납니다. 어느 키 작은 학생이 당돌하게 선생님에게 여쭤봤습니다.
‘선생님, 부흥회 같은 데에 가면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목사에게 물어보지 왜 물상선생님에게 그걸 물어보는지 모르겠어요. 그 물상 선생님이 당시 크리스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순간적으로 선생님이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대답하시기를
‘만일 사람의 병이 심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종교의 힘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몸의 병도 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없다든가 손발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신앙의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이 생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건 과학 선생님으로서 정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종교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종교적인 현상을 합리적으로 과학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 아마 그런 일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적인 현상이 심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이런 말을 했지요.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은 없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그랬더니 누가 대답하기를 ‘희한하게도 기도를 많이 할수록 우연한 일이 많아지던데요.’
예수님은 나중에는 기적을 행하는 자로 알려졌지만 애초부터 의도적으로 기적을 행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을 읽을 때 우리가 받는 인상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처음 읽는 마음으로 이 마가복음 1장의 예수님의 공생애의 초기 사건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는지를 미리 다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예수님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군중의 분위기를 유도하려고 했다든가 군중의 심리를 유도하려고 했다든가 병이 나으려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라고 가르쳤다는 흔적을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뿐인데 그 중에 귀신 들린 사람이 그 속의 귀신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고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는데 귀신은 알아봤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처럼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파악하기 전에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니까 귀신들이 정체를 드러내고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줄 압니다 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하셨다면 설교 도중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건 기대하지 않던 일입니다. 예수님도 기대하지 않고 청중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니까 귀신이 그 정체를 드러내고 떠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더니 그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집이라도 그 집안에 들어가면 병든 사람, 문제 있는 사람, 아픈 사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라고 예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개인의 일이기 때문에 감춰져 있는 것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집에 들어가 내막을 보면 아픈 사람이 없는 집이 없고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심방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접받기 위해서 심방하신 것이 아니고 그 집을 찾아가기 전까지는 그들의 참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을 찾아갔더니 장모가 열병을 앓고 누워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일로 고했더니 예수님이 가서 그 손을 잡고 일으키셨다고 했습니다. 손을 잡고 일으키신 것뿐입니다. 그랬더니 열병이 나았다고 기록한 게 아니고 오늘 본문 31절을 보시면 열병이 떠나갔다, 열병에 어떤 인격적인 지위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가시니까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우리는 열병을 고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는데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다가가시니까 열병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예수님이 더 가까이 오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니까 귀신이 떠나가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오시니까 열병이 떠나가고 그래서 온 동네가 예수님 앞에 모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것을 예수님이 미리 의도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병이 나으려면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읽어보면 병 나음에 대한 설교를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들의 사역과 대비가 되는 부분이에요. 오늘날 신유집회에 가보면 병 고침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합니다. 병 고침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병 고침에 대해서 믿음을 심어주고 그리고 안수기도를 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도 효과가 있지만 예수님은 미리 여러분이 병이 나으려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오신 것은 아니에요. 병을 고치셨지만 그 목적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면 삼년 반만 계시고 승천하시지 말고 삼십년을 계셔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병자 천지이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라면 예수님은 백년이 있어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귀신도 떠나가도 문둥병자가 나음을 받고 그리고 병자가 낫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미리 사람들의 심리를 유도했다든가 분위기를 조성했다든가 쇼를 했다든가 이런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사람들도 순수함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어요.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이든 신앙을 옹호하는 사람이든 좀 더 순수해져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비판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비판하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배운 사람이라면 비판하려고 합니다. 대통령을 비판하고 기업인을 비판하고 교육계를 비판하고 교회를 비판하고 모든 것을 비판하려고 하는데 비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벌써 천 번도 더 바뀌었을 것입니다. 비판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어요. 예수님이 사람을 비판하기 시작하셨다면 한도 끝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 투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요. 너는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고, 한도 끝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몰라서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알고 계시지만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존재인줄 아시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큰 기쁨이 되신다 그러면서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 이 모든 비유의 공통점이 뭡니까.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다 찾았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고 기뻐하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기뻐하고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 기뻐서 잔치를 열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이요 천국의 기쁨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세상에 소망이요 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회개하는 자가 없다면 천국의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죄에 대한 애통함도 말해야 되지만 구원의 기쁨을 말해야 됩니다. 죄 때문에 애통해야 될 때가 있지만 일평생 애통해 하는 것은 그것은 천국이 아니에요.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죄 사함의 기쁨, 구원의 기쁨, ‘그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하옵소서―restore unto me the joy of your salvation―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 죄를 회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죄 사함을 받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O happy day, happy day’ happy day는 날씨가 좋아서 happy day가 아니고 복권이 맞아서 happy day가 아니고 주 나의 죄 다 사한 날,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죄 사함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에요. 심리적인 방법으로 죄 사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수십 년 전에 I''m ok, You''re ok 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지요. 그게 심리적인 방법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냥 ok, 문제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당신도 ok 나도 ok, 문제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자, 그건 심리입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ok라고 해도 하나님이 ok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건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죄 짐을 지고 여전히 죄의식에 매여 있다면 그건 불신이지요. 그거야말로 불신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고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위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죄를 면죄해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죄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도 순수해져야 되고 신앙을 옹호하는 사람도 순수해져야 됩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쇼로 만들려고 했어요. 분위기와 감정을 조장하고 그것이 마치 성령인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것처럼 한 경우가 너무 많았어요. 차력 시범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해서 울게 하고 웃게 하고 마치 그것이 성령인 것처럼.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든가 사람들이 병 고침을 사모하게 하였다든가 이런 것이 일절 없고 예수님 자신도 무엇을 의도하신 것이 아닌데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동안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건 정말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의도한 게 아니에요. 그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권한으로 그것을 행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로 우리가 배울 것은 주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해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Let him do what he want to do, 주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내어드려야 됩니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어요. 예수님의 은혜든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했어요.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소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고 그것이 잘 믿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 그게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이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목사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목사가 기적을 일으키려고 의도한다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요.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하면 병자도 낫고 귀신도 떠나가고 문둥병자도 깨끗함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회당에 들어오시니까 귀신이 떠나가고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시니까 열병이 떠나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게 무엇일지를 우리가 미리 요구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순종하고 따르다 보면 당연히 좋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더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미리 요구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생각하지 않던 방법으로 주님의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분위기도 아니고 심리적인 것도 아니고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참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