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면면이 영화 세트로 재탄생된 고장이 있다. 영화 의 무대인 강원도 영월군. 영화에서 비친 다소 낡고 빛바랜 듯 정감 가는 영월의 풍경은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며 7080시대의 아련한 추억을 건드렸다. 비운의 어린 임금 단종의 애사(哀史)와 산과 강이 어우러진 비경을 풍성하게 간직한 영월은 ‘라디오스타의 고장’이라는 제3의 타이틀을 달고 문화와 자연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2006년 개봉했던 영화 를 2년 만에 다시 보았다. 다시 보는 것일진대 영화의 소박한 캐릭터와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훈훈한 웃음과 감동을 선사했고, 다방아가씨 김양이 엄마를 부를 때는 어김없이 눈물이 또르르 흘렀으며, 빗속에서 박민수(안성기)가 최곤(박중훈)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마지막 장면은 또 한번 진하게 가슴을 적셨다.
영화를 다시 보니 영화의 배경에 눈길이 간다. 강원도 영월군. 는 달리 세트를 짓는 수고 없이 있는 그대로의 영월을 이용해 7080세대의 아련한 추억과 라디오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건드렸다. 어떤 이는 이준익 감독이 로케이션 장소로 영월을 선택한 이유는 도 보고 영월을 방문해 본 이라면 그 이유를 대번에 알아챌 것이라 했다. 그래서 영화의 주된 멜로디 ‘비와 당신’의 촉촉한 여운을 품고 훌쩍 떠났다, ‘라디오스타의 배경’ 영월로.
최곤은 영월을 후진 시골 촌구석이라 여겼지만, 영월은 최곤이 사람들과 부딪히며 새로운 인생을 여는 값진 공간으로 변모한다. 는 영월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순박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다시 빛을 발하게 되는 한물간 스타 최곤과 그가 빛날 수 있도록 (영화의 표현을 빌자면) 얼굴에 똥칠도 마다 않는 매니저 박민수, 그리고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다.
1988년도 가수왕에 빛났던 왕년의 스타 최곤이 폭력 사고를 저지르고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가 있는 영월까지 떠밀리듯 오게 된 설정은, 영월과 단종의 이미지를 다시 영화에 반영코자 했던 감독의 의도였을까. 여행에서 돌아와 촬영장소들을 곱씹어 보니 캐릭터와 에피소드, 대사 등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이야기의 공간인 영월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여 영월은 ‘라디오스타의 고장’으로 불려도 어색함이 없는 곳이다.
미용실 왼쪽 골목으로 가면 세탁소와 철물점이 있다
청록다방
보물찾기 같은 따라잡기
영월 터미널에 도착해 지도를 따라 의 촬영지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주변의 풍경은 여느 소도시와 다르지 않다. 키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어 고층빌딩이 빼곡한 대도시를 벗어났음을 실감하게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 따라잡기에 나서기 전, 분위기나 좀 살펴볼까 하고 슬렁슬렁 걷다 보니 대로가 낯이 익다. 영화에 자주 비쳤던 시내 큰 길이다. 영국 팝그룹 버글스(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신나게 흐르며 영월의 일상을 스케치하던 장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흥겹다.
가장 먼저 찾은 의 흔적은 인쇄소.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을 마케팅하겠다며 매니저 민수가 안내 전단을 손수 만들던 곳이다. 영월군은 의 배경으로 쓰인 가게들에 ‘라디오스타 촬영장소’라는 표지와 포스터를 붙여 놓아 여행객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표지가 붙어 있는 가게는 건물이 허름해도 마치 훈장을 단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당당해 보였다.
일요일 오전이라 문이 닫혀 있어 덩그러니 외관밖에 볼 수 없었지만, 인쇄소 문 앞에 붙은 ‘라디오스타 촬영장소’ 표지는 보물찾기에서 첫 보물을 찾아낸 것처럼 왠지 모를 뿌듯함을 선물한다. 의 흔적을 찾아온 이들에게 영월은 ‘인증’ 작업의 즐거움을 준다. 건너편에는 꽃집 아저씨가 라디오를 통해 여직원에게 사랑을 고백해 동네 주민들의 꽃배달이 줄을 이었던 농협과 그 꽃집 명동화원이 있다.
인쇄소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니 곰세탁소와 사팔철물이 있다. 영화에서 세탁소와 철물점의 주인은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이인 청록다방 단골이지만, 김양에게 진 외상은 미적미적 해결할 기미도 없다. 최곤은 방송에서 세탁소와 철물점 주인에게 외상값을 갚으라고 종용한다. 소도시 영월에서 지역주민 대상으로 방송을 하는 설정이 만들어낸 재미있던 에피소드.
실제로 세탁소와 철물점은 마주보고 있다. 두 가게의 주인이 절친한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세탁소 아저씨는 영화에 출연하지도 않았는데 영화 상영 이후에 종종 자신의 사진을 찍어 간다며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세탁소라는 특성 때문인지 영화의 수혜는 거의 없어 보였다. 영화 따라 찾아온 외지인들에게 ‘여기가 그곳이오’ 인증을 해줄 뿐. 반면 영화에 나왔던 중국집 영빈관은 한때 영화팬들이 많이 찾아와 자리를 꽉꽉 메웠다고. 영빈관은 읍사무소 건너편에 있다.
나하나미용실(사진 왼쪽 위) 곰세탁소(↑) 지금은 폐허가 된 방송국
김양의 다방은 그때 그대로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첫 방송이 흘러나올 때, 머리하던 아줌마가 시끄럽다며 라디오를 꺼 버렸던 나하나미용실을 지나니 김양이 일하던 청록다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앗, 그런데 영화에 등장했던 낡은 간판 대신 예쁘게 디자인된 새 간판이 걸려 있다. 낡고 촌스러워 오히려 매력 있던 영화 속 그대로의 흔적을 바랐던 여행자는 다소 실망을 해야 했다. 그러나 다방 안에 들어서니, 내부는 의 공기로 가득하다. 청록다방은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김양이 일했던 곳이라서, 다방에서만 꼬박 6일을 촬영했을 만큼 영화에 등장한 분량도 많았다. 주인이 영화에 직접 출연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다방 간판은 기자가 영월을 찾기 불과 이틀 전에 바꾼 것이라고.
시내의 촬영장소를 돌아본 결과, 영월군에서 덕에 가장 큰 수혜를 본 곳은 아마도 청록다방이 아닐까 싶다. 기자가 본 다방 종업원들만도 5명에 달할 정도로 영월의 작은 다방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대개 군민이어야 이용할 수 있는 세탁소나 철물점, 미용실과는 달리 청록다방은 타지에서 온 여행자라도 언제든지 들어가 차 한잔을 하며 영화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장소다. 개인적으론 ‘라디오스타 따라잡기’ 여정 중에서 영화를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도 청록다방이었다. 다방 안에는 그때 그 테이블과 찻잔이 그대로 있고, 관련 사진과 사인, 메시지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 영화의 흔적을 찾아 떠나온 이들의 감성을 100% 충족시켜 준다. 커피 한 잔에 단돈 2,000원이니 부담도 없다.
마침 다방 ‘주인언니’를 만나 에 얽힌 이야기를 물어 봤다. 영화 이후 잡지와 TV 등에 수많은 인터뷰를 했다는 주인언니는 기자의 질문에도 술술 거침이 없다. 일년에 단 하루, 어머니의 생일날만 가게를 쉰다는 주인언니는 다방을 닫은 날 ‘왜 문을 닫았느냐’며 질타 아닌 질타를 받기도 했다면서, ‘영화를 보고 먼 길을 온 사람들이니 앞으로는 쉬더라도 가게 문은 열고 쉬어야겠다’고 웃는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폭넓은 영화 팬들이 영화 속 다방을 찾아오는데 를 스무 번도 넘게 봤다는 한 커플은 하루에 3번이나 다방에 들렀다나. 청록다방이 언제까지고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그래서 영화의 여운을 느끼러 온 이들을 항시 반갑게 맞아 주기를 바라본다.
영업시간 오전 8시~밤 12시 문의 033-374-2126
영화에 사용됐던 커피잔
←청록다방 ↑관객들의 메시지
라스트씬의 진한 여운을 다시 한번
영월을 찾기 전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라디오스타의 주무대였던 방송국이었다. 그러나 KBS영월중계소는 아쉽게도 철문이 굳게 잠긴 채 폐허가 돼 있었다. 하지만 철문 주변을 서성이며 철문 사이로 빠끔히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 그곳으로 쉽게 공간 이동이 된다. 짙은 여운과 훈훈한 감동을 남겼던 마지막 장면이 그려진다. ‘그 빗속에서 그는 그의 우산이 돼 줬더랬지... 그 빗속에서 그는 마침내 행복한 미소를 지었더랬지...’
석탄업이 흥했던 한때 13만 명에 달한 적도 있던 영월 인구는 현재는 4만 명을 조금 웃도는 정도다. KBS영월방송국(영화에서는 MBS영월방송국) 역시 고장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했다. KBS영월방송국은 30년 동안 영월·정선·평창을 중심으로 하루 2차례 자체 방송을 하던 어엿한 방송국이었지만 지금은 2004년 KBS원주방송국에 통폐합되면서 중계소 역할만 하고 있다.
방송국은 촬영장소 표지판을 단 채로 지키는 이 하나 없이 외로이 방치돼 있지만 발품이 아깝지는 않은 곳이다. KBS영월중계소까지 오르는 길이 너무도 예쁘기 때문이다. 초록의 나무가 드리운 구불구불한 비탈은 산책하기에도, 드라이브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방송국에서 내려와 최곤과 민수가 영월 유일의 록밴드 ‘이스트리버’와 마주쳤던 건널목을 들렀다. 기찻길은 도시인을 설레게 하는 묘한 기운이 있다. 마침 건널목에 딩딩딩 경보음이 울리고 차단기가 내려온다. ‘기차가 지나가면 건너편에 이스트리버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칙칙폭폭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차가 지나가고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건너편엔 길을 건너는 동네 아주머니와 철도 관리인 아저씨가 서 있다.
‘비와 당신’을 노래하던 라디오는 멈췄지만, 순박한 사람들의 일상은 아름다운 강과 산들이 빚어낸 소박한 풍경 속에서 영화의 감성을 최대한 끌어안은 채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몸을 맡겼던 영화 속 공간에서 빠져나와 도시로 돌아간다. 아날로그적인 보다 최신 디지털스러운 비디오스타가 더 어울리는 곳으로.
'동강 말이다. 이게 동쪽으로 흘러서 동강이냐 아니면 동쪽에서 시작해서 동강이냐? '민수의 이 썰렁한 농담에 대한 답은 ‘동쪽에서 시작해서 동강’이라고 한다.
라디오는 멈췄지만 일상은 흐른다 ①
지역 면면이 영화 세트로 재탄생된 고장이 있다. 영화 의 무대인 강원도 영월군. 영화에서 비친 다소 낡고 빛바랜 듯 정감 가는 영월의 풍경은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며 7080시대의 아련한 추억을 건드렸다. 비운의 어린 임금 단종의 애사(哀史)와 산과 강이 어우러진 비경을 풍성하게 간직한 영월은 ‘라디오스타의 고장’이라는 제3의 타이틀을 달고 문화와 자연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글 김영미 기자 사진 Travie photographer 엄지민 스틸제공 영화사 아침
취재 트레비 www.travie.com 한국관광공사 www.visitkorea.or.kr
‘비와 당신’이 그리워 영월을 찾다
2006년 개봉했던 영화 를 2년 만에 다시 보았다. 다시 보는 것일진대 영화의 소박한 캐릭터와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훈훈한 웃음과 감동을 선사했고, 다방아가씨 김양이 엄마를 부를 때는 어김없이 눈물이 또르르 흘렀으며, 빗속에서 박민수(안성기)가 최곤(박중훈)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마지막 장면은 또 한번 진하게 가슴을 적셨다.
영화를 다시 보니 영화의 배경에 눈길이 간다. 강원도 영월군. 는 달리 세트를 짓는 수고 없이 있는 그대로의 영월을 이용해 7080세대의 아련한 추억과 라디오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건드렸다. 어떤 이는 이준익 감독이 로케이션 장소로 영월을 선택한 이유는 도 보고 영월을 방문해 본 이라면 그 이유를 대번에 알아챌 것이라 했다. 그래서 영화의 주된 멜로디 ‘비와 당신’의 촉촉한 여운을 품고 훌쩍 떠났다, ‘라디오스타의 배경’ 영월로.
최곤은 영월을 후진 시골 촌구석이라 여겼지만, 영월은 최곤이 사람들과 부딪히며 새로운 인생을 여는 값진 공간으로 변모한다. 는 영월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순박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다시 빛을 발하게 되는 한물간 스타 최곤과 그가 빛날 수 있도록 (영화의 표현을 빌자면) 얼굴에 똥칠도 마다 않는 매니저 박민수, 그리고 평범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다.
1988년도 가수왕에 빛났던 왕년의 스타 최곤이 폭력 사고를 저지르고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가 있는 영월까지 떠밀리듯 오게 된 설정은, 영월과 단종의 이미지를 다시 영화에 반영코자 했던 감독의 의도였을까. 여행에서 돌아와 촬영장소들을 곱씹어 보니 캐릭터와 에피소드, 대사 등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이야기의 공간인 영월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여 영월은 ‘라디오스타의 고장’으로 불려도 어색함이 없는 곳이다.
미용실 왼쪽 골목으로 가면 세탁소와 철물점이 있다
청록다방
보물찾기 같은 따라잡기
영월 터미널에 도착해 지도를 따라 의 촬영지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주변의 풍경은 여느 소도시와 다르지 않다. 키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어 고층빌딩이 빼곡한 대도시를 벗어났음을 실감하게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 따라잡기에 나서기 전, 분위기나 좀 살펴볼까 하고 슬렁슬렁 걷다 보니 대로가 낯이 익다. 영화에 자주 비쳤던 시내 큰 길이다. 영국 팝그룹 버글스(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신나게 흐르며 영월의 일상을 스케치하던 장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흥겹다.
가장 먼저 찾은 의 흔적은 인쇄소.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을 마케팅하겠다며 매니저 민수가 안내 전단을 손수 만들던 곳이다. 영월군은 의 배경으로 쓰인 가게들에 ‘라디오스타 촬영장소’라는 표지와 포스터를 붙여 놓아 여행객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표지가 붙어 있는 가게는 건물이 허름해도 마치 훈장을 단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당당해 보였다.
일요일 오전이라 문이 닫혀 있어 덩그러니 외관밖에 볼 수 없었지만, 인쇄소 문 앞에 붙은 ‘라디오스타 촬영장소’ 표지는 보물찾기에서 첫 보물을 찾아낸 것처럼 왠지 모를 뿌듯함을 선물한다. 의 흔적을 찾아온 이들에게 영월은 ‘인증’ 작업의 즐거움을 준다. 건너편에는 꽃집 아저씨가 라디오를 통해 여직원에게 사랑을 고백해 동네 주민들의 꽃배달이 줄을 이었던 농협과 그 꽃집 명동화원이 있다.
인쇄소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니 곰세탁소와 사팔철물이 있다. 영화에서 세탁소와 철물점의 주인은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이인 청록다방 단골이지만, 김양에게 진 외상은 미적미적 해결할 기미도 없다. 최곤은 방송에서 세탁소와 철물점 주인에게 외상값을 갚으라고 종용한다. 소도시 영월에서 지역주민 대상으로 방송을 하는 설정이 만들어낸 재미있던 에피소드.
실제로 세탁소와 철물점은 마주보고 있다. 두 가게의 주인이 절친한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세탁소 아저씨는 영화에 출연하지도 않았는데 영화 상영 이후에 종종 자신의 사진을 찍어 간다며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세탁소라는 특성 때문인지 영화의 수혜는 거의 없어 보였다. 영화 따라 찾아온 외지인들에게 ‘여기가 그곳이오’ 인증을 해줄 뿐. 반면 영화에 나왔던 중국집 영빈관은 한때 영화팬들이 많이 찾아와 자리를 꽉꽉 메웠다고. 영빈관은 읍사무소 건너편에 있다.
나하나미용실(사진 왼쪽 위) 곰세탁소(↑) 지금은 폐허가 된 방송국
김양의 다방은 그때 그대로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첫 방송이 흘러나올 때, 머리하던 아줌마가 시끄럽다며 라디오를 꺼 버렸던 나하나미용실을 지나니 김양이 일하던 청록다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앗, 그런데 영화에 등장했던 낡은 간판 대신 예쁘게 디자인된 새 간판이 걸려 있다. 낡고 촌스러워 오히려 매력 있던 영화 속 그대로의 흔적을 바랐던 여행자는 다소 실망을 해야 했다. 그러나 다방 안에 들어서니, 내부는 의 공기로 가득하다. 청록다방은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김양이 일했던 곳이라서, 다방에서만 꼬박 6일을 촬영했을 만큼 영화에 등장한 분량도 많았다. 주인이 영화에 직접 출연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해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다방 간판은 기자가 영월을 찾기 불과 이틀 전에 바꾼 것이라고.
시내의 촬영장소를 돌아본 결과, 영월군에서 덕에 가장 큰 수혜를 본 곳은 아마도 청록다방이 아닐까 싶다. 기자가 본 다방 종업원들만도 5명에 달할 정도로 영월의 작은 다방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대개 군민이어야 이용할 수 있는 세탁소나 철물점, 미용실과는 달리 청록다방은 타지에서 온 여행자라도 언제든지 들어가 차 한잔을 하며 영화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장소다. 개인적으론 ‘라디오스타 따라잡기’ 여정 중에서 영화를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도 청록다방이었다. 다방 안에는 그때 그 테이블과 찻잔이 그대로 있고, 관련 사진과 사인, 메시지들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 영화의 흔적을 찾아 떠나온 이들의 감성을 100% 충족시켜 준다. 커피 한 잔에 단돈 2,000원이니 부담도 없다.
마침 다방 ‘주인언니’를 만나 에 얽힌 이야기를 물어 봤다. 영화 이후 잡지와 TV 등에 수많은 인터뷰를 했다는 주인언니는 기자의 질문에도 술술 거침이 없다. 일년에 단 하루, 어머니의 생일날만 가게를 쉰다는 주인언니는 다방을 닫은 날 ‘왜 문을 닫았느냐’며 질타 아닌 질타를 받기도 했다면서, ‘영화를 보고 먼 길을 온 사람들이니 앞으로는 쉬더라도 가게 문은 열고 쉬어야겠다’고 웃는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폭넓은 영화 팬들이 영화 속 다방을 찾아오는데 를 스무 번도 넘게 봤다는 한 커플은 하루에 3번이나 다방에 들렀다나. 청록다방이 언제까지고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그래서 영화의 여운을 느끼러 온 이들을 항시 반갑게 맞아 주기를 바라본다.
영업시간 오전 8시~밤 12시 문의 033-374-2126
영화에 사용됐던 커피잔
←청록다방 ↑관객들의 메시지
라스트씬의 진한 여운을 다시 한번
영월을 찾기 전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라디오스타의 주무대였던 방송국이었다. 그러나 KBS영월중계소는 아쉽게도 철문이 굳게 잠긴 채 폐허가 돼 있었다. 하지만 철문 주변을 서성이며 철문 사이로 빠끔히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 그곳으로 쉽게 공간 이동이 된다. 짙은 여운과 훈훈한 감동을 남겼던 마지막 장면이 그려진다. ‘그 빗속에서 그는 그의 우산이 돼 줬더랬지... 그 빗속에서 그는 마침내 행복한 미소를 지었더랬지...’
석탄업이 흥했던 한때 13만 명에 달한 적도 있던 영월 인구는 현재는 4만 명을 조금 웃도는 정도다. KBS영월방송국(영화에서는 MBS영월방송국) 역시 고장의 쇠락과 운명을 같이했다. KBS영월방송국은 30년 동안 영월·정선·평창을 중심으로 하루 2차례 자체 방송을 하던 어엿한 방송국이었지만 지금은 2004년 KBS원주방송국에 통폐합되면서 중계소 역할만 하고 있다.
방송국은 촬영장소 표지판을 단 채로 지키는 이 하나 없이 외로이 방치돼 있지만 발품이 아깝지는 않은 곳이다. KBS영월중계소까지 오르는 길이 너무도 예쁘기 때문이다. 초록의 나무가 드리운 구불구불한 비탈은 산책하기에도, 드라이브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방송국에서 내려와 최곤과 민수가 영월 유일의 록밴드 ‘이스트리버’와 마주쳤던 건널목을 들렀다. 기찻길은 도시인을 설레게 하는 묘한 기운이 있다. 마침 건널목에 딩딩딩 경보음이 울리고 차단기가 내려온다. ‘기차가 지나가면 건너편에 이스트리버가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칙칙폭폭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차가 지나가고 다시 조용한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건너편엔 길을 건너는 동네 아주머니와 철도 관리인 아저씨가 서 있다.
‘비와 당신’을 노래하던 라디오는 멈췄지만, 순박한 사람들의 일상은 아름다운 강과 산들이 빚어낸 소박한 풍경 속에서 영화의 감성을 최대한 끌어안은 채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몸을 맡겼던 영화 속 공간에서 빠져나와 도시로 돌아간다. 아날로그적인 보다 최신 디지털스러운 비디오스타가 더 어울리는 곳으로.
'동강 말이다. 이게 동쪽으로 흘러서 동강이냐 아니면 동쪽에서 시작해서 동강이냐? '민수의 이 썰렁한 농담에 대한 답은 ‘동쪽에서 시작해서 동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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