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는 불어와 영어다 그것은 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면서 식민화시킨 나라중에서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본토보다 9배나 큰 지역이었던 프랑스령 서 아프리카지역은 1875년에서 1904년 사이에 프랑스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었다 프랑스는 세네갈의 프랑스 기지에서 시작해서 기니, 코티드브와르, 다호메이등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구호는 이것이었다 'everything north of the equator'(적도 이북의 모든것) 즉, 적도 이북의 아프리카 지역전체를 식민화 시키는 것이었지만 영국과의 마찰로 인해서 꿈을 다 이루지 못했다 서 아프리카 식민지의 국경을 확정하는데 있어서 주로 해안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과 많은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화 쟁탈과, 국경설정에서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나라와 나라의 경계사이가 일적선인 경우가 많은것은 국경의 설정이 아프리카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외교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지의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것이다 그것은 외교적인 낙서에 불과한 것이었고 가진자들의 낙서였다 문제는 방만한 태도의 식민화 국경설정은 결국은 아프리카 종족들의 분열과 분쟁을 낳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아프리카의 노역무역과 함께, 식민화에 뛰어들었던 유럽 국가들의 1885년 베를린회의에서 결정된 국지의 정책, 즉 해안을 고수한다는 것은 그 지역과 관계된 내륙도 점령한다는 것과 효과적인 점령의 원칙, 해안의 점령은 그 지역에 대한 무역 및 운송의 자유권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득을 취하고자 했다 서구 열강들의 아프리카 분할이 치열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인 아프리카의 미개척 자원을 상대 경쟁국이 소유 하게 된다는 경쟁 심리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즉, 아프리카 식민화와 분할경쟁이 치열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서구 열강, 유럽국가들의 자원을 향한 탐욕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주의 정책언 '동화주의'(Assimilation)로 알려진 정책이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의 문명과 문화가 가능한 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문명과 문화가 열등한 나라는 어느 정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랑스인들은 다른 민족들이 프랑스 문화에 동화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 여겼으며 프랑스에 유익한 것은 다른 국가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말은 쉽게 말한다면 프랑스 입장에서 아시아의 황인종과 아프리카의 흑인종들도 프랑스인과 똑같이 말하고, 거주하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프랑스 시민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민족이 살고 있는 영토는 행정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프랑스의 지방행정국단위와 동등하게 된다 그러므로, 동화주의는 프랑스식민지에 있는 모든 민족들의 삶의 양식에 여러 각도로 영향을 주고, 프랑스의 관점하에서 식민지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식민정책이론이었다 하지만, 1890년과 1914년 사이에 프랑스인들은 동화정책에 대한 비난을 했고 1920년에 동화정책은 연합주의정책(Association policy)으로 수정된다 동화주의는 프랑스의 좌익의 요구였고 연합정책은 프랑스 우익의 요구에 의해 나왔다 연합정책은 프랑스 제3공화국하에서 수행된 프랑스제국의 급속한 팽창속에서 제기된 것이다 연합정책은 프랑스인이 프랑스와 관계된 아프리카의 후진민족을 돌보고 통제할 뿐 아니라 보호한다는 가부장적 신념을 기초로 한다 프랑스문화를 아프리카인 대중에 전달시키는 과정에서 프랑스는 함께 일할 수 있는 아프리카인 엘리트를 양성시키는 일과 식민지 주민의 종교,관습,생활양식을 존중하고 상호 원조한다는 것이 연합정책의 내용이다 연합정책은 2차세계대전 전까지 프랑스 식민정책의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연합주의자들은, 동화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정책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프리카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는 연합정책은 프랑스식대로의 관점이 적용된 '동화주의'가 혼합되어있었다 그들은, 정책을 바꾸었다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아프리카대륙을 침탈했던, 프랑스인들은 동화주의를 그대로 적용한것이다 그것은 아프리카대륙에서 프랑스 시민을 창조한다는 목표가 폐지되지 않았다 둘째, 연합정책과는 양립될 수 없는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식의 행정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세째, 프랑스인들의 문명화의 사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째, 아프리카 식민지 개개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행정체제를 부여했다 다섯째, 아프리카 식민지가 프랑스 본국 경제단위의 연장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여섯째, 연합주의자들은 스스로 동화정책의 경향을 표현하곤 했다 프랑스의 정책은, 잔인했다 그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의 관점으로 이해해야한다 존중이란 그런것이다 자문화 우월주의, 이기적인 발상은, 다른 나라 문화를 짓밟기도 한다 프랑스가 선택한 방법은, 지극히 이기적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정책은, 그들 스스로의 힘의 논리에 의한 지배였던 것이다 프랑스인들식의 문명화 방법은, 통치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에 씻을수 없는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그들은 총으로 협박하고, 힘으로 짓밟고 그들의 이득을 위해서, 아프리카인들을 이용했다 동화정책의 식민주의 방법자체는 '바보정책'을 낳았다 쉽게, 빨아들일 양분은 다 빨아먹고, 필요없는것은 버리는 시스템이었던것이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정책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는
불어와 영어다
그것은 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하면서 식민화시킨 나라중에서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본토보다 9배나 큰 지역이었던
프랑스령 서 아프리카지역은 1875년에서 1904년 사이에
프랑스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었다
프랑스는 세네갈의 프랑스 기지에서
시작해서 기니, 코티드브와르, 다호메이등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구호는 이것이었다
'everything north of the equator'(적도 이북의 모든것)
즉, 적도 이북의 아프리카 지역전체를 식민화 시키는 것이었지만
영국과의 마찰로 인해서 꿈을 다 이루지 못했다
서 아프리카 식민지의 국경을 확정하는데 있어서
주로 해안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과 많은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화 쟁탈과, 국경설정에서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나라와 나라의 경계사이가 일적선인 경우가 많은것은
국경의 설정이 아프리카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외교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지의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것이다
그것은 외교적인 낙서에 불과한 것이었고
가진자들의 낙서였다
문제는 방만한 태도의 식민화 국경설정은
결국은 아프리카 종족들의 분열과 분쟁을 낳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아프리카의 노역무역과 함께, 식민화에 뛰어들었던 유럽 국가들의
1885년 베를린회의에서 결정된
국지의 정책, 즉 해안을 고수한다는 것은 그 지역과
관계된 내륙도 점령한다는 것과
효과적인 점령의 원칙, 해안의 점령은 그 지역에 대한
무역 및 운송의 자유권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득을 취하고자 했다
서구 열강들의 아프리카 분할이 치열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인 아프리카의 미개척 자원을
상대 경쟁국이 소유 하게 된다는 경쟁 심리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즉, 아프리카 식민화와 분할경쟁이 치열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서구 열강, 유럽국가들의 자원을 향한 탐욕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주의 정책언 '동화주의'(Assimilation)로 알려진 정책이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의 문명과 문화가 가능한 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문명과 문화가 열등한 나라는 어느 정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었다
프랑스인들은 다른 민족들이 프랑스 문화에
동화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 여겼으며
프랑스에 유익한 것은 다른 국가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말은 쉽게 말한다면
프랑스 입장에서
아시아의 황인종과 아프리카의 흑인종들도
프랑스인과 똑같이 말하고, 거주하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프랑스 시민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민족이 살고 있는 영토는 행정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프랑스의 지방행정국단위와 동등하게 된다
그러므로, 동화주의는 프랑스식민지에 있는 모든 민족들의 삶의 양식에
여러 각도로 영향을 주고, 프랑스의 관점하에서 식민지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식민정책이론이었다
하지만, 1890년과 1914년 사이에 프랑스인들은 동화정책에 대한 비난을 했고
1920년에 동화정책은 연합주의정책(Association policy)으로 수정된다
동화주의는 프랑스의 좌익의 요구였고
연합정책은 프랑스 우익의 요구에 의해 나왔다
연합정책은 프랑스 제3공화국하에서 수행된
프랑스제국의 급속한 팽창속에서 제기된 것이다
연합정책은 프랑스인이 프랑스와 관계된
아프리카의 후진민족을 돌보고 통제할 뿐 아니라
보호한다는 가부장적 신념을 기초로 한다
프랑스문화를 아프리카인 대중에 전달시키는 과정에서
프랑스는 함께 일할 수 있는 아프리카인 엘리트를 양성시키는 일과
식민지 주민의 종교,관습,생활양식을 존중하고 상호 원조한다는 것이
연합정책의 내용이다
연합정책은 2차세계대전 전까지 프랑스 식민정책의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연합주의자들은, 동화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정책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프리카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는 연합정책은
프랑스식대로의 관점이 적용된 '동화주의'가 혼합되어있었다
그들은, 정책을 바꾸었다고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아프리카대륙을 침탈했던, 프랑스인들은
동화주의를 그대로 적용한것이다
그것은 아프리카대륙에서 프랑스 시민을 창조한다는 목표가 폐지되지 않았다
둘째, 연합정책과는 양립될 수 없는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식의 행정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세째, 프랑스인들의 문명화의 사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째, 아프리카 식민지 개개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행정체제를 부여했다
다섯째, 아프리카 식민지가 프랑스 본국 경제단위의 연장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여섯째, 연합주의자들은 스스로 동화정책의 경향을 표현하곤 했다
프랑스의 정책은, 잔인했다
그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의 관점으로 이해해야한다
존중이란 그런것이다
자문화 우월주의, 이기적인 발상은, 다른 나라 문화를 짓밟기도 한다
프랑스가 선택한 방법은, 지극히 이기적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정책은, 그들 스스로의 힘의 논리에 의한 지배였던 것이다
프랑스인들식의 문명화 방법은, 통치했던 아프리카 국가들에
씻을수 없는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그들은 총으로 협박하고, 힘으로 짓밟고
그들의 이득을 위해서, 아프리카인들을 이용했다
동화정책의 식민주의 방법자체는 '바보정책'을 낳았다
쉽게, 빨아들일 양분은 다 빨아먹고, 필요없는것은 버리는 시스템이었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