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선교 120년 역사를 조명하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한국기독교 120년 역사
한국기독교는 어느덧 120여년의 역사를 갖게 됐다. 성경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빠른 성장과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유래가 없을 정도다. 이 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고 한국기독교가 지금처럼 성장하기까지에는 분명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함께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의 한국기독교는 많은 비판과 질타 속에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한국기독교 120년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은 지난날의 죄와 변질된 모습을 회개하고 다시 처음의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 의미가 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한국에 처음 성경이 전해진 것은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에 들어왔을 때이다. 쇄국정책을 펴던 조선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중무장을 하고 통상을 요구하던 제너럴 셔먼호는 결국 평양 군민과 충돌하다가 불에 타서 침몰했다.
배에서 도망친 선원들은 전원 처형됐고, 통역관으로 함께 배에 올랐던 영국 웨일즈 선교사 토마스(Robert J. Tomas)는 이 땅에서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27살 나이로 순교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한문성경을 집 도배지로 사용한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은 훗날 복음을 영접하게 됐고, 모펫(Samuel A. Moffet, 마포삼열) 선교사는 1893년 그 집을 사서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교회를 세웠다.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명하면서 그 유명한 평양대부흥의 장소가 됐다.
대대적인 회개운동과 성령의 역사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게 되면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란 호칭을 얻게 됐다. 이렇듯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은 헛되이 끝나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성경이 먼저 퍼져
본격적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있기 전부터 민간에는 한문성경이 퍼지기 시작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교인인 서상륜, 이수정 등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전도했고, 후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들도 이들이 번역한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1879년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인 매킨타이어(John Mckintyre)와 로스(John Ross)는 서상륜,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서상륜은 1884년 고향인 황해도에서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솔내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1882년 제2차 신사유람단 비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기독교인이 된 이수정은 1883년에 세례를 받고 성서번역에 착수했다. 이렇듯 한국기독교는 선교사 입국 전부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복음 수용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모습(양화진홀 자료).
한국 선교의 시작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알렌(Horace N. Allen) 선교사는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 신분으로 입국했다. 알렌은 갑신정변 중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왕실의 호의를 얻게 되고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인 광혜원(제중원으로 변경,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을 설립하고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1885년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부활절에 제물포를 통해 입국하게 되는데 이 때를 한국 선교의 기점으로 본다. 당시는 외국 종교가 배척되었기 때문에 의료와 교육을 통해 간접적인 선교가 이루어졌고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입국해 활동했다.
알렌을 이어 제중원 원장을 맡던 헤론(John W. Heron)은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던 중 이질에 감염되어 1890년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때부터 양화진에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한 묘원을 마련하게 됐고, 이후 양화진에는 143명의 외국인선교사들과 가족들이 묻혔다.
양화진 선교사 묘원.
친일, 그리고 변질
외국인 선교사들은 새문안교회, 정동제일교회, 인천 내리교회 등의 교회와 배재학당(배재대학교 전신), 이화학당(이화여대 전신),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등의 학교를 설립하며 이 땅에 복음을 전했다. 많은 미션스쿨들은 근대화의 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으며, 기독교는 사회계몽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일 정도로 기독교는 항일·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말기 신사참배 압력이 거세지면서 1937년 감리교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데 이어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도 신사참배를 결의하며 한국교회는 모든 교단과 교파를 넘어 우상숭배에 나서게 됐다. 1939년 평양노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구속된 주기철 목사를 도리어 파면하고 산정현교회를 폐쇄했다.
한국교회는 부일협력에도 적극적이었다.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간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 2000원을 걷었고,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위문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 317원 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교회 종 1540개, 유기 2165점을 모아 12만여원을 마련해 일제에 바치기도 했다. 감리교 역시 1944년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로 ‘감리교단호’라는 애국기 3대 값인 21만원을 헌납했다.
신사참배의 결과
해방 후 출옥성도들은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를 문제삼고 회개를 촉구하나 당시 교계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고 이후 교단 차원의 공식적 회개도 없었다. 또한, 평양노회는 해방 후 60여년이 지난 2006년에야 주기철 목사를 복권했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은 공산치하에 들어갔고, 한국은 남북분열과 전쟁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장로교단은 1946년 고신파가 갈라져 나간 것을 시작으로 1953년에는 기장, 1959년에는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됐다. 1960년대 이후로는 수없이 분열, 현재 250여개 이상으로 나눠졌다. 다른 교단도 마찬가지로 많은 분열을 겪으며 한국교회는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나뉘어 하나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속화된 한국교회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은 한국교회는 이제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돕는 모습을 보인다. 일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군사정권에 야합하고 아첨하는 모습이었다. 유신헌법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내고, 조찬기도회를 통해 군사정권에 대해 축복기도를 하는 등 전직 대통령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그들의 권력에 일조를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의 모습은 성장지상주의와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점차 세속화되고 대형화 되어갔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대신 물질축복과 성공을 구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말씀도 윤리의식도 실종됐고, 한국교회를 지탄하는 목소리는 이제 사회뿐만이 아닌 교회 내에서도 연일 터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교회 비판’도 현직 목사가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국에서 15년간 활동하다 호주로 돌아간 조엘 박 목사는 개(個)교회주의, 교단우월주의, 지나친 성전건축과 헌금강요, 잘못된 설교와 기도, 목회자와 신자들의 감투 의식 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박 목사는 “한국교회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둘 또는 수백 개로 나눠놓고 있으며, 교회와 교단의 막힌 담은 옛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장벽보다 높고 견고하다”고 질타했다.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은 2007년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기점으로 더욱 심해져 안티기독교가 부르는 ‘개독교’라는 명칭이 익숙할 지경이 됐다. 1995년 당시 기독교인구는 전체인구의 4분의 1인 1000만 정도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많아진 이단세미나는 오히려 기독교 인구 감소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교회와 교회, 교인과 교인 사이에는 불신만 쌓이고, 사랑의 종교라는 기독교는 정작 사랑이 없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첫사랑을 회복해야
조엘 박 목사는 “한국교회는 뭇매를 맞고 있다”면서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대안은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성경적인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교회는 선교 120년을 맞게 됐다. 처음에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때는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고 하나님의 은혜 또한 충만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세상에 굴복하고 변질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제대로 된 회개 없이 더욱더 세속화·귀족화되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대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책망하시는 장면이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씀처럼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