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 못 박히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고행(苦行)을 선택했다. 그들은 모두 만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원하고, 깨달음을 주기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성현들의 희생정신에 대해 우리들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성자와 성현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창작시 <빵을 굽는 시간>을 통해 언급했지만, 작은 사랑의 실천 정신마저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릇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역할이 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있고,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해야 될 것이 있다. 그리고 직업과 재능에 따라 자신이 담당해야 할 것들이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과 희생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작은 예수요, 부처이다. 남들의 선행(善行)만 바라보고 칭찬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자신의 만족을 위한 자족적 예술이 있고, 만인과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체적 예술이 있다. 뭉크는 <절규>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고,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스페인내전의 참상을 알렸다. 창작예술을 통해 감춰진 인간의 내면과 현실을 발견하고 깨닫게 만드는 예술가들의 노력은 성현 못지 않는 치열한 삶의 고행(苦行)이다.
그러나 무의미한 한 장의 사진처럼,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재주는 있지만, 철학과 인생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작가들도 있다. 철학과 사색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게으른 탓이기도 하다. 숭고한 종교를 사사화(私事化, 개인의 사적인 일)시키는 맹신도처럼, 예술을 그저 단순한 개인의 취미로만 생각하도록 만드는 예술관의 태도를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만 없다.
예술의 공급자들은 자신이 창작한 시와 소설, 그리고 연극과 영화 그림과 음악이 사사화 되고, 상업주의에 휘둘리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것은 종교와 예술의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그릇된 신앙심과 예술관이 순수한 신앙과 위대한 예술 세계를 가로막는 자본의 힘으로 작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소비자들은 과거와 달리 현명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마비시키는 위험한 상품을 흔쾌히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의 자유와 권익을 교묘하게 억압하고 탄압하려는 정치세력에게 동조하는 신문을 구독하는 있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구입한 밍크코트가 야생의 밍크들을 학살하는 자본의 원동력이 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듯, 종교와 예술도 사사화 되면, 건물만 크게 만들 뿐 신앙은 궁핍해지고 왜곡되고, 예술은 화려하고 음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디, 철학과 사색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여기에 예술가들의 특별한 당부를 드리고 싶다.
예술을 위한 희생정신에 대해서.......
예술을 위한 희생정신에 대해서.......
예수님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 못 박히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고행(苦行)을 선택했다. 그들은 모두 만인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시켜 인류를 구원하고, 깨달음을 주기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성현들의 희생정신에 대해 우리들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성자와 성현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창작시 <빵을 굽는 시간>을 통해 언급했지만, 작은 사랑의 실천 정신마저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릇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역할이 있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있고,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해야 될 것이 있다. 그리고 직업과 재능에 따라 자신이 담당해야 할 것들이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과 희생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작은 예수요, 부처이다. 남들의 선행(善行)만 바라보고 칭찬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작은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자신의 만족을 위한 자족적 예술이 있고, 만인과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체적 예술이 있다. 뭉크는 <절규>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고,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스페인내전의 참상을 알렸다. 창작예술을 통해 감춰진 인간의 내면과 현실을 발견하고 깨닫게 만드는 예술가들의 노력은 성현 못지 않는 치열한 삶의 고행(苦行)이다.
그러나 무의미한 한 장의 사진처럼,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재주는 있지만, 철학과 인생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작가들도 있다. 철학과 사색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게으른 탓이기도 하다. 숭고한 종교를 사사화(私事化, 개인의 사적인 일)시키는 맹신도처럼, 예술을 그저 단순한 개인의 취미로만 생각하도록 만드는 예술관의 태도를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만 없다.
예술의 공급자들은 자신이 창작한 시와 소설, 그리고 연극과 영화 그림과 음악이 사사화 되고, 상업주의에 휘둘리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것은 종교와 예술의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그릇된 신앙심과 예술관이 순수한 신앙과 위대한 예술 세계를 가로막는 자본의 힘으로 작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소비자들은 과거와 달리 현명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마비시키는 위험한 상품을 흔쾌히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의 자유와 권익을 교묘하게 억압하고 탄압하려는 정치세력에게 동조하는 신문을 구독하는 있는 것도 모르고, 자신이 구입한 밍크코트가 야생의 밍크들을 학살하는 자본의 원동력이 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듯, 종교와 예술도 사사화 되면, 건물만 크게 만들 뿐 신앙은 궁핍해지고 왜곡되고, 예술은 화려하고 음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디, 철학과 사색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여기에 예술가들의 특별한 당부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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