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건망증

박민진200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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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건망증

 

 

책을 사러 책방에 가면 언제나 고민한다. '아 뭘 읽지? 아니 뭘 읽어야 하지?'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읽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이 먼저 미친다. 하지만 어넺나 내가 책방에서 들고나오는 책은 정해져 있다. 그 흔한 문학서적이다. 최근에 구입한 책은 영화 <박쥐>의 원작 ‘에밀 졸라’의 작품인 <테레즈 라캥>이다. 내가 언제나 문학을 고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답잖은 자가개발서를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돈벌이 하자고 아까운 휴일에 허무맹랑한 20대에 10억 만들기라는 책을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양자택일의 순간의 기로에서 언제나 머릿속 테마게임을 하기 일쑤다. 그저 기분대로 문학을 읽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벅차다.

 

 

그래 결심했어! 언제나 내 테마게임의 머릿속 해피엔딩은 고루한 경제서이지만, 테마게임의 주인공 국진아저씨가 수 차례 골프로 인생의 나락을 맞은 것처럼 나도 문학작품의 선택으로 인생의 나락을 택하곤 한다. 문학이 주는 달콤함을 잊을 수 없어서... 카프카, 트루먼 카포티, 에밀 졸라, 피츠제럴드, 파트리크 쥐스킨트, 무라카미 류, 하루키 아저씨까지... 이야기가 주는 청명한 기운은 언제나 나를 영화 러브레터에서 흰 눈이 덥힌 산 아래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나카야마 미호’의 미소만큼이나 상쾌한 기분으로 이끈다. 하지만 문학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마음 속 한구석에 드는 건 왜일까? 문학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길가의 돌멩이처럼 천대받는 이 상황이 서럽다. 정말 문학은 바닥일까? 그렇다면 문학작품과 우리의 삶은 어떤 함수관계에 놓여 있을까? 현재의 나를 이루는데 문학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과연 문학은 내가 믿는 것처럼 20대에 10억 만드는 책보다 가치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난 언제나 문학이 삶을 완성한다고 믿어 왔지만, 실질적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그게 무엇인지 의구심만 더해간다. 도대체 어떤 거죠 톨스토이 아저씨?

 

 

 

‘파트리크 쥐스킨스’의 단편 <문학적 건망증>에는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어떤 책이 내게 감명을 주고, 인상에 남아 마음 깊이 아로새겨지고, 송두리째 뒤흔들어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거나>, <지금까지의 생활을 뒤바꾸어 놓았는가.>하는 것'이다. 과연 당신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그저 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헛된 이야기일 뿐인가? 문학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읽는 입장에서의 문학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한 남자가 도서관에 들어선다. 그리고 문학작품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아무 책이나 집어 든다. 그리고 읽는다. 가닥이 잡힐 것이다. 이 남자는 자신의 문학을 그리도 열심히 읽어왔기 때문에 무언가 나올 것이라 굳게 믿는다. 감명 깊은 구절을 읽으며 그는 줄을 긋고, 멋진 표현에는 감상도 적어 넣는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 책엔 내가 줄을 긋고, 글귀를 적으려는 곳마다 내가 적으려는 것과 똑같은 글귀와 표시가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이 책은 수년 전 내가 꼼꼼히 읽었던 문학작품이다. 내가 인상 깊던 구절을 또 읽으며 다시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난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메모를 보며 알았다. 이렇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다니. 도대체 난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도대체 난 그때보다 얼마만큼 삶의 시야가 넓어진 것일까? 같은 책에 같은 생각을 할 만큼 난 제자리 인생을 걸어온 것은 아닐까? 문학은 날 변화시켰을까?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좌불안석의 이 남자는 그리도 열심히 문학을 읽어오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고민하는 바가 바로 문학의 실용성 문제이다. 이는 오늘날 인문학의 실종과도 깊은 연관이 있지만, 문학으로서만 생각한다면 그저 이야기가 과연 내 인생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세상인데 문학 따윈 읽어서 모하냐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고민은 더 심해진다.

 

 

 

얼마 전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어톤먼트, Atonement>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 중 문학작품을 쓰는 브라이오니는 질투심에 언니와 형부의 관계를 의심해 헛된 말을 해 두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이 좀처럼 예상하지 못한 뜬금없는 곳에서 발동하여 다른 두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문학으로 속죄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죽음처럼 그녀는 자신의 속죄를 문학에 새겨 넣어 진실을 투영한다. 그때 문학이란 것이 삶의 진정성을 표현하는 좋은 도구라는 사실을 알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쓰는 작가에 대한 관점에서야 그렇다. 그 이야기를 구입 해 읽는 독자가 느끼는 바에 대해선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책을 읽는 자가 느끼는 효용가치는 어디에 있지? 실제로 브라이오니가 쓴 그 문학작품은 소설 속에서 언니와 형부를 위로하지 못하고, 그들의 죽음을 막지도 못한다. 비록 두 사람이 브라이오니의 작품을 읽지 못한 독자가 아닐지라도. 문학 자체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는 무력함이 영화에는 잔재한다. 제대로 된 사과를 못한 동생 브라이오니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다. <어톤먼트>는 과연 문학이 우리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미치는가 진지하게 고찰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2006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표한 ‘가라타니 고진’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우리 문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의 근대문학은 더 이상 존재가치와 존재이유가 없다는 이 도발적인 책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일으켰지만, 더 상심이 컸던 점은 이 책이 제기하는 의구심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꺼져가는 불씨처럼 문학에 대한 애착도 이제 사라지고 없다. 삶이 진저리 나게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경제침체의 무게가 목덜미까지 뻗쳐오는 이 순간에 문학은 과연 사치일 뿐이다.

 

 

오늘도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문학서적을 사서 읽지만, 문학을 읽는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 상황이 너무도 고역이다. 내 문학은 어디로 갔을까? 문학적 건망증은 그저 단순한 건망증으로 끝나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찝찝하다. 문학의 즐거움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꼭 무언가 도움을 얻어야 겠다고 하는 그 어리석음이 두 볼을 붉게 달아오르게 한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변화시켰다는 말은 문학의 꼬리표에는 붙일 수 없는 것일까. 어릴적 침대에서 애틋한 마음으로 읽었던 톨스토이 전집도 이제 공허하게 사라지는 기분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기억조차 남지 않게 되는 문학처럼, 서서히 용해되는 문학의 위대함은 모호한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더 이상 인생과 문학의 함수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독자나 문학의 의의를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읽은 <테레즈 라켕>의 테레즈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죄의식을 느끼는 것처럼, 평생 내 마음 한구석에서 크나큰 숙제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위대한 문학작품을 불필요한 유희의 산물로 여길 것이 분명하다. <문학적 건망증>의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다. 마치 문학이 당신에게 하는 충고처럼 느껴진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