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The Thirst]- 최고의 영화.(스포주의)

송지은200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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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허락하소서.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두 뺨을 떼어내어 그 위로 눈물이 흐를 수 없도록 하시고,

어깨와 등뼈가 굽어져 어떤 짐도 질 수 없게 하소서.

머리에 종양이 든 환자처럼 올바른 지력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영원히 순결에 바쳐진 부분을 능욕하여 어떤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하시며,

저를 치욕 속에 있게 하소서.

아무도 저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저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소서."

 

 

 

종교, 성스러움, 신부, 성자 , 병원, 청결

쾌락 ,피 , 섹스 , 살인, 죄, 거짓말 , 도박

 그리고 사랑

 

천국과 지옥. 구원과 타락.

 

영화 박쥐는 이질적인 배경과 극적인 환경에서 스토리를 진행시켜나간다.

그런 요소들이 이 영화를 더 자극적이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 하게 만들었던 것이리라.

 

 

인종차별-

 

  극중 송강호는 숱한 환자들의 죽음 앞에서 신부로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에 무기력을 느끼고 인류에 보탬이 되고자 백신 개발 연구에 참여한다. 바이러스는 백인남성, 아시아 남성에게서만 발병한다. 흑인,여성에게는 발병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번 권력이 뒤집힌다.

 

백인,아시아 남성들은 흑인 남성 의사들과 여성 간호사들의 실험대상이 된다. 환자복을 입고 침상에 누워 그들은 아래에서 흑인 의사들의 눈을 쳐다보며, 주체가 아닌 객체로 활동한다.

 

 

죽음, 그리고 부활-

 

영화 초반부에 신부였던 송강호는 죽음 앞에서 평안을, 천국에서의 부활과 안식을 기도해주었다.

첫 장면에 나오던 환자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말을 한다.

 

"정말 맛있게 먹더라구요. 다 죽어가는 걔들에게 제 품 속에서 녹던 그 카스테라 줬던거, 걔들이 그렇게 맛있게 먹은거 주님이 기억하시겠죠? "

 

죽음 앞에 한 없이 약해지는 인간.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 참 연약하지.

 

 

극 중 송강호는 백신 개발 실험에서 참가한 500명 중 1명 최초로 살아난다.

단 신부가 아닌 흡혈귀로 부활한다.

 

그런데 말이다.

부활 후의 삶은 애석하게도 그를 더욱 괴롭게 한다.

살아나서 기쁜게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려던 '선'이 무너지는 순간들만을 맞이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정말 '선'을  행하고자 시작한건데......

 

부활의 삶에서 그는 너무 많은 쓰라림을 겪는다.

 

장님 신부님.

자신을 실험실로 보내 준 장님 신부는 송강호에게 피를 나눠달라고 애걸한다. 제발 괴로워도 좋으니 앞을 보게 해 달라고. 그간 성스럽고, 신부로서 자신의 멘토링을 해 준 분이 무릎을 꿇고 애걸하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장님 신부를 뒤로 하고 성당을 뛰쳐나오는 송강호의 표정은 압권이다.

도망치고 싶은 현실. 그게 그의 현재다.

그러나 살아야만 한다.

 

김옥빈도 부활한다.

첫 번째 부활은 송강호와의 만남.

 

"그럼 날 수 있어요?" 

눈을 크게 뜨고 송강호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그녀.

송강호의 품안에서 하늘을 날며 미친 듯이 즐거워하는 그녀의 표정엔 희열만이 가득했다.

내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이 장면이 내겐 제일 완소 씬 중 하나.

토할 것 같은 현실에서 땅을 딛고 있는 자체가 고역이었던 그녀에게 송강호와의 비행은 최고의 일탈이자 사치가 아니였을까?

 

 

두번째 부활은 억압받던 천덕꾸러기 며느리에서 쾌락을 쫓는 흡혈귀로.....

흡혈귀가 되기 전 그녀는 송강호에게 살인을 당한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배신감 때문.

그녀를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거짓말을 했다니......

김옥빈의 목을 부러뜨린 후 송강호의 행위를 보았는가.

숨이 멎은 육체를 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사랑' 없고 '증오'로 가득찬 애무를 보았다.

김옥빈의 몸은 그에게 그저 고깃덩어리였다.

 

그러나 사랑이 뭐길래, 이내 그는 자신의 피를 그녀에게 흘려넣는다.

사랑의 표현이 피로 이루어지다니.

붉디 붉은 그 핏빛은 둘의 처절한 사랑을 증명하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김옥빈이 부활한후 그녀와 김해숙의 권력이 뒤바뀐다. 아들이 죽은 후 괴로워하던 김해숙은 온몸을 가누지 못 하고 자신이 '돌본다'고 이야기하던 김옥빈에게 '돌봄'을 당한다. 김해숙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보는 일' 뿐이다. 비록 '보는 일' 뿐이지만 그녀의 눈빛은 끝까지 섬뜩하다.

 

엔딩 씬에서 김해숙의 눈빛을 보며

"내가 이렇게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니들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라는 말이 떠올랐다. 증오와 복수엔 끝이 없고, 우린 그 감정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 역시 마찬가지.

 

 

손과 발

 

병원 침대에서 송강호와 김옥빈이 처음 성관계를 하던 씬에서

둘은 지독하게 느껴질정도로 서로의 손과 발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 장면이 더럽다고 생각했을 듯.

 

그는 그녀의 발부터 핥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모든 억압을 그녀는 맨발로 달리며 해소했기에.

그녀는 그의 손 끝부터 핥았다.

왜냐하면 그의 본능과 배치되는 종교적 의식이 그의 손끝에서 시작했기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그녀의 발과, 온갖 모순으로 억압받던 그의 손끝은

서로의 애무를 통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이 가져올 고통 따위는 상상 할 겨를도 없이.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니까.

 

 

우리가 바라보는 이분법적 세상과 시각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불합리한 것인지, 사실 어떤 것도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감독은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권력의 해체와 역전, 끝없는 타자화,  

누가 당신을 구원하고, 당신은 누구를 구원하려 했고

결국 무엇이 구원받음인가.

 

우리는 어쩌면 끝없는 자신만의 합리화 속에서

자기 좋을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런지도.

 

영화관을 나오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괜히 박찬욱이 아니였다.

그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것들을 극대화 시켜 화면에 옮겼고,

장소,소품,음악을 비롯한 장치들 하나하나가 치밀했다.

 

특히 논란이 되었던 송강호의 성기노출씬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노출은 성직자로써 기대받던 사회적 역할과

자신을 흡사 기적을 일으킬 예수로 추앙하는 자들의 믿음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을 극대화 시켰다.

물론 노출하지 않아도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포인트는 '표현의 극대화' . 

그의 욕망과 사회적 역할 사이에서 형성되었던 모순이 깨지던

그 순간, 내 속도 후련했다.

 

사랑.

 

"지옥에 가자."

 

타들어간 그들에게 남은 건 신발이었다.

 

"왜 꼭 도망가야해? 뭐 부터 챙겨야하지?"

부산을 떨던 그녀가 가방에 챙긴 것은.....그의 신발이었다.

일출을 맞으며 그녀가 주섬주섬 가방 속에서 신발을 꺼낼 때. 마음이 찡했다.

 

 

부르튼 그녀의 발을  감싸주던 그가 신겨준 신발

그리고 그가 신고 있던 건 그녀가 선물해주었던 신발.

 

애정과 애증이 교차해도

한없이 외로운 인간이 기댈 곳은 결국 인간이란 의미인걸까.

 

 

엔딩에 흐르는 송강호의 피리소리가 애잔했다.

죽음을 앞두고 피리를 불어달라던 첫 화면의 환자가 떠올랐다.

 

처음과 마지막에, 중간중간 피리를 활용한 감독의 의도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겠지만,

'구원'의 의미로 해석하면 너무 확대한걸까.

 

결국 결과는 그가 계속 읊조리던 그의 기도대로 되었다.

 

우리는 끝없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한다.

박쥐와 갈증이라는 제목을 택한 감독의 의도에 대해선 아직 해석해내지 못 했다. 한 번 더 보고 다듬어봐야겠다..

 

오랫만에 영화다운 영화 봤다.

정말 잘 만들었다. 소름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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