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안보-2·8독립선언 90주년
2·8독립선언의 배경과 역사적 의의
오는 2월 8일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2·8독립선언을 발표한 지 90주년이 되는 날이다.
2·8독립선언은 일본에 국권을 피탈당한 뒤 일본 동경에서 수학하던 재일 유학생들이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여러 단체를 결성하여 애국사상 고취 활동을 펼쳤으나,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여하한 활동보다도 일본의 한국 강점에 대한 부당성을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등에 널리 알려 독립에 대한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이러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을 비롯해 6·10만세 운동(1926년 6월, 대한제국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광주 학생운동(1929년 11월), 중국의 5·4운동(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2·8독립선언 9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2·8독립운동의 배경과 의의를 알아보고 우리 선열들의 우국충정의 희생정신과 애국애족정신, 강인한 자주적 독립정신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Ⅰ.2·8독립선언의 배경과 의미
2·8독립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각국은 자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도를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를 가지며, 어느 민족이라도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거나 기존 국가와 연합하는 것을 자유로이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고, ‘파리 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 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식을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이에 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 청년회관(YWCA)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김도연·백관수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 청년독립단을 결성하여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와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하이로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인쇄하였다.
2월 8일,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및 일본정부·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유학생 6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다. 결국 일본 경찰의 강제해산으로 10여 명의 실행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어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게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기여하였으며,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Ⅱ.독립운도의 시발점이된 2·8독립선언
2·8독립선언은 적의 심장부 동경(東京)에서 조선의 유학생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난 젊은 애국지사들의 피끓는 함성이었다. 2·8독립선언서에는 일제의 만행과 비인도적인 정책을 낱낱이 기록하여 일본의 조선통치의 부당성을 알리는 한편,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천명하였다. 독립선언서 원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 일본의 조선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 시의 정책을 반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응용하여 오족에게는 대소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信敎)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불소(不少)히 구속하며 행정·사법·경찰 등 제기관이 조선민족의 사권(私權)까지도 침해하며, 공리(公利)에 오족과 일본인 간에 우열의 차별을 설(設)하며 일본인에 비하여 열등한 교육을 시(施)하여서 오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인의 피사역자로 성(成)하게 하며, 역사를 개조하여 오족의 신성한 역사적·민족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능모(凌侮)하며, 소수의 관리(官吏)를 제한 외에 정부 제기관과 교통·통신·병비(兵備) 제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만 사용하여 오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생활의 지능과 경험을 득할 기회를 불득(不得)하게 하니 오족은 결코 여차한 무단전제 부정 불평등한 정치하에서 생존과 발전을 향수키 불능한지라. 그뿐더러 원래 인구과잉한 조선에 무제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여 토착한 오족은 해외에 유리(流離)함을 불면(不免)하여 국가의 제기관은 물론이오 사설의 제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사용하여 일변(一邊) 조선인으로 직업을 실(失)케 하며, 일변 조선인의 부(富)를 일본으로 유출케 하고, 상공업에 인본인에게는 특수한 편익을 전(典)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산업적 발전의 기회를 실(失)케 하도다. 이에 오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며,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상에 선진국의 범(範)을 수(隨)하여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는 오족은 반드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유(有)할지라.”(중략)
이처럼 2·8독립선언은 일본제국주의의 비인도적인 정책과 인간의 기본권 침탈, 민족적 차별대우, 역사 및 문화 왜곡, 일본으로의 국부 유출과 만행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었으며, 독립 이후의 신국가 건국이념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로 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함을 국가목표로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2·8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우국충정에 불타는 젊은 남녀 유학생들이 항일의 깃발을 높이고, 우리 민족의 독립근거와 그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왜 그동안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했는가 하는 이유를 명확히 하고 있다.
2·8독립선언은 항일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핀 독립헌장이었으며, 청년 학도들의 불굴의 용기와 뜨거운 민족애, 그리고 창조적인 청년정신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민족의 쾌거이고,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Ⅲ.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튼튼한 국방태세 확립
우리는 흔히 애국심에 대해 이야기할 때,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의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보여준 행동을 예로 들어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 선열들은 이스라엘 민족보다 50여 년이나 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맹휴학운동을 벌이고, 학비를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3·1운동을 비롯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1919년 2월 8일 이후 5월 중순까지 재일 조선인 유학생 359명이 귀국하였다고 한다. 당시 재일 유학생이 800여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과반수 유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열들의 이러한 우국충정의 애국애족 정신과 헌신적인 희생정신을 잘알지 못하고, 타국의 사례만을 애국심의 발로로 생각했던 점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2·8독립선언은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세계 만방에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3·1만세운동의 전주곡이었으며, 조국 광복의 힘찬 예언이었다. 또한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겨레의 자주성을 지켜온 강인한 민족혼의 표상이며, 우리에게 면면히 이어져 온 민족정기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군은 90년 전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부와 명예, 영달을 버리고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민족의 쓰라린 역사를 교훈 삼아 다시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굳건한 국방태세를 확립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시사안보-2·8독립선언 90주년
오는 2월 8일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2·8독립선언을 발표한 지 90주년이 되는 날이다.
2·8독립선언은 일본에 국권을 피탈당한 뒤 일본 동경에서 수학하던 재일 유학생들이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여러 단체를 결성하여 애국사상 고취 활동을 펼쳤으나,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여하한 활동보다도 일본의 한국 강점에 대한 부당성을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등에 널리 알려 독립에 대한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이러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을 비롯해 6·10만세 운동(1926년 6월, 대한제국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광주 학생운동(1929년 11월), 중국의 5·4운동(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과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2·8독립선언 9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2·8독립운동의 배경과 의의를 알아보고 우리 선열들의 우국충정의 희생정신과 애국애족정신, 강인한 자주적 독립정신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Ⅰ.2·8독립선언의 배경과 의미
2·8독립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각국은 자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도를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를 가지며, 어느 민족이라도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거나 기존 국가와 연합하는 것을 자유로이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는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고, ‘파리 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 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식을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이에 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동경 기독교 청년회관(YWCA)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김도연·백관수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 청년독립단을 결성하여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와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하이로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인쇄하였다.
2월 8일, 독립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및 일본정부·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유학생 6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외쳤다. 결국 일본 경찰의 강제해산으로 10여 명의 실행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어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게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기여하였으며,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Ⅱ.독립운도의 시발점이된 2·8독립선언
2·8독립선언은 적의 심장부 동경(東京)에서 조선의 유학생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난 젊은 애국지사들의 피끓는 함성이었다. 2·8독립선언서에는 일제의 만행과 비인도적인 정책을 낱낱이 기록하여 일본의 조선통치의 부당성을 알리는 한편,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천명하였다. 독립선언서 원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 일본의 조선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 시의 정책을 반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응용하여 오족에게는 대소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信敎)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불소(不少)히 구속하며 행정·사법·경찰 등 제기관이 조선민족의 사권(私權)까지도 침해하며, 공리(公利)에 오족과 일본인 간에 우열의 차별을 설(設)하며 일본인에 비하여 열등한 교육을 시(施)하여서 오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인의 피사역자로 성(成)하게 하며, 역사를 개조하여 오족의 신성한 역사적·민족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능모(凌侮)하며, 소수의 관리(官吏)를 제한 외에 정부 제기관과 교통·통신·병비(兵備) 제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만 사용하여 오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생활의 지능과 경험을 득할 기회를 불득(不得)하게 하니 오족은 결코 여차한 무단전제 부정 불평등한 정치하에서 생존과 발전을 향수키 불능한지라. 그뿐더러 원래 인구과잉한 조선에 무제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여 토착한 오족은 해외에 유리(流離)함을 불면(不免)하여 국가의 제기관은 물론이오 사설의 제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사용하여 일변(一邊) 조선인으로 직업을 실(失)케 하며, 일변 조선인의 부(富)를 일본으로 유출케 하고, 상공업에 인본인에게는 특수한 편익을 전(典)하여 조선인으로 하여금 산업적 발전의 기회를 실(失)케 하도다. 이에 오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며,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상에 선진국의 범(範)을 수(隨)하여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는 오족은 반드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유(有)할지라.”(중략)
이처럼 2·8독립선언은 일본제국주의의 비인도적인 정책과 인간의 기본권 침탈, 민족적 차별대우, 역사 및 문화 왜곡, 일본으로의 국부 유출과 만행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었으며, 독립 이후의 신국가 건국이념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로 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함을 국가목표로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2·8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우국충정에 불타는 젊은 남녀 유학생들이 항일의 깃발을 높이고, 우리 민족의 독립근거와 그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왜 그동안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했는가 하는 이유를 명확히 하고 있다.
2·8독립선언은 항일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핀 독립헌장이었으며, 청년 학도들의 불굴의 용기와 뜨거운 민족애, 그리고 창조적인 청년정신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민족의 쾌거이고,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Ⅲ.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튼튼한 국방태세 확립
우리는 흔히 애국심에 대해 이야기할 때,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의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보여준 행동을 예로 들어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 선열들은 이스라엘 민족보다 50여 년이나 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맹휴학운동을 벌이고, 학비를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3·1운동을 비롯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1919년 2월 8일 이후 5월 중순까지 재일 조선인 유학생 359명이 귀국하였다고 한다. 당시 재일 유학생이 800여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과반수 유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열들의 이러한 우국충정의 애국애족 정신과 헌신적인 희생정신을 잘알지 못하고, 타국의 사례만을 애국심의 발로로 생각했던 점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2·8독립선언은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세계 만방에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3·1만세운동의 전주곡이었으며, 조국 광복의 힘찬 예언이었다. 또한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겨레의 자주성을 지켜온 강인한 민족혼의 표상이며, 우리에게 면면히 이어져 온 민족정기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군은 90년 전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부와 명예, 영달을 버리고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민족의 쓰라린 역사를 교훈 삼아 다시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굳건한 국방태세를 확립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방부 국방교육정책관실>
2009.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