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서거] 도전·충돌·영욕의 삶 비극으로 마침표

남오희200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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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서거] 도전·충돌·영욕의 삶 비극으로 마침표

[盧 서거] 도전·충돌·영욕의 삶 비극으로 마침표
인권변호사로 정치입문… 5共청문회서 '스타'로

16대 대선서 기적적 승리… 퇴임후 검찰소환 등 수난

부산상고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은 두 차례 낙방 끝에 1975년 17회 사법시험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7개월의 판사 생활을 접고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81년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釜林)사건' 변론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88년 13대 총선에서 재야인사 영입사례로 국회에 입성한 그는 이듬해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져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계파 줄서기나 대세 편승을 거부한 채 과감히 현실에 도전하는 정치적 선택을 해 왔다. 90년 1월 3당 합당이 이뤄졌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을 "변절자"로 비난하며 따라가지 않았다. '바보 노무현'은 이후 14대 총선, 부산시장 선거, 16대 총선 때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워 당선 확률이 희박한 부산에 연이어 출마했다가 낙선한 데서 유래한 별명이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한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투표 하루 전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일방적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가 깨졌는데도 일궈낸 기적적 승리였다. 그는 변변한 조직도 없었지만 '국민참여 경선'과 승부사적 기질에 힘입어 '이인제 대세론'을 극복했고, 본선에서도 예상을 뒤엎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눌렀다.

하지만 대통령 재임 기간은 '도전'과 '충돌'의 연속이었다. 민주당이 구태라며 열린우리당을 만들고선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하자고 했다. "반미주의면 어떠냐"면서도 이라크 파병을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밀어붙였다. 스스로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규정할 정도로 달라진 국제경제 질서 속에서 위치 설정에 혼돈을 겪었다.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집권 초부터 그는 권력의 분점과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을 강조했다. '평검사와의 대화'란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은 검찰 권력의 힘을 빼는 과정에서 나온 불협화음이었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로 시대와의 불화는 정점을 이뤘다. 선거법 중립의무 위반, 국정ㆍ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63일 간이나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퇴임 이후에는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의 세종증권 인수 비리 구속을 시작으로 친인척의 비리 연루 의혹이 잇따라 터지면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마침내는 자신마저도 측근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돈 600만달러를 불법 수수한 혐의로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의 마지막 정치적 자산이었던 도덕성마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