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사건을 보며 이것 저것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했으며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가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뒤 지방에 내려가 심취하여 읽었던 '칼의 노래'는 저 또한 심취하여 두 번 연이어 읽어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죽음이 저에게는 마냥 슬픔과 비통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이 몰고 올 사회적 파장, 그리고 분열과 대립의 골이 과연 어떠한 양상을 띠게 될지,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죽음이 몰고 온 파장은 그의 살아있을 때의 파장보다 컸습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밉니다. 어제는 북한이 20kt급의 위력을 지닌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다며 자화자찬했습니다. 그리고 신종 인플루엔자는 잠시 소강 상태에 있는 듯하더니만 갑자기 감염자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 사탄의 세력이 점점 자신의 힘을 나타내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멸망의 때가 이르기까지 그들은 기를 쓰고 발악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진정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은 사탄이며, 세상은 어찌했든 멸망에 이를 뿐입니다. 잠시 잠깐 평화가 올 수도 있고 전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자만이 그 뜻대로 기도하며 이 세상의 요동함에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탄이 원하는 것이 분열과 대립이라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이 사회는 다시금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이고 이명박 대통령도 대통령입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권세자를 향하여 분노한들 그들은 변할까요? 그들을 향해 분노하는 내 자신만 답답하여 속 터질 뿐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왜 권세자를 위해 기도하라는지 어렴풋이 알 듯합니다. 진정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진정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남유다 멸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비참한 생활을 합니다. 그들의 왕은 이방민족의 궁궐 밥상머리에서 왕의 녹을 받다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남은 자들은 바벨론의 안정적인 생활에 젖어들어 바벨론 정착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가슴 속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했습니다. 70년 뒤에 포로생활의 고역을 마치고 고토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세 이레를 기도했습니다. 그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다니엘의 기도를 가로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금식하며 주야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기억하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답답함을 우리의 분노나 인간적 연민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실을 넘어서서 이 세상 역사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 속에서 끝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원하시며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나의 기도는 표리부동한 거짓 고백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습니다. 마음에 분노와 불평이 가득한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를 향해 가졌던 마음과 무엇이 다를까 싶었습니다.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을 가리던 박넝쿨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벌레가 갉아먹어 버리자 요나는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은, "네가 이 박넝쿨을 아꼈거늘 저 니느웨의 앞 뒤 분간 못하는 백성 10만 명과 많은 가축들은 아끼지 아니하느냐?" 고 되물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처한 상황만을 보고 불평하며 원망하는 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그 속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려는 노력은 잘 못합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보다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떠한 생각과 평가를 내놓기 바쁩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 나의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 (빌4:7-8)이 우리에게는 한 없는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현실 세계에 소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하나님으로 소망 삼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향해서 나는 왕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합니다. 여전히 제 안에 살아 숨쉬는 자아의 크기가 큽니다. 그 크기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짓눌러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며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아니함을 믿으며 날마다 성령 충만하기를 구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제 마음과 생각을 지켜서 이 세상에 만연한 죽음의 영과 비판과 분열과 분노와 분쟁과 저주와 악독과 살인과 음란과 거짓의 영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리에 날마다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서에 남긴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무도 원망 말라" 우리는 원망과 분노로써 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아니, 세상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세상이 바뀌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바뀌는 것이 쉽습니다. 내가 바뀜으로써 죽음의 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노.사.모. 라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진정 노.사.모. 라면 아무도 원망 말라는 그 유서의 내용을 수 십, 수 백 번 읽었을 터인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를 원망하려 합니다. 그래서 조문 온 사람들을 돌아가라 합니다. 봉화 마을에는 현 정권을 비판하는 현수막이 즐비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탄핵이라는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이면 쥐새끼는 뭐냐는 현수막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한 비판을 하며 무엇을 위한 반대를 합니까. 진정 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랑한 사람들일까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는 그 동안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한때 자신의 적이었던 자들까지도 원망 말라는 진정 통 큰 남자의 진심이 어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들이 망자의 뜻을 다시금 죽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노건평, 박연차가 죽어야 한다며 서슬 푸른 칼날 같은 독설을 내뿜습니다. 과연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의 광기와 살기의 근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요한서신과 유다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마귀에 대한 평가입니다. 살인의 영과 광기의 영이 점점 사람들을 옭아맵니다. 그들 자신만 옭아매면 다행인데, 그 악한 영의 기운을 다른 사람을 향해 흘려 보냅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요아스는 의로운 제사장 사가랴의 피를 제단 위에서 흘렸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의로운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다고 하십니다. 원수 마귀의 계략은 옳은 것을 그르다 하며 그른 것을 옳다 합니다. 굽은 것을 곧다 하며 곧은 것을 굽었다 합니다.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들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각과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며 순수한 인간 본성에 충실하여 파괴와 분열에 앞장서게 합니다. 무서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평안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의인은 고난을 당하되 애매하게 당하며,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되 이유 없이 당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참으로 점잖습니다. 치열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을 향하여서는 눈과 귀를 닫고 안전한 방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똑바로 본 사람들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우리의 영이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세상의 종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신자 개개인에게 닥칠 영적 전쟁의 치열함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 밖에는 우리에게 승산이 없는 전쟁입니다. 칼과 활의 싸움이 아니기에, 핵무기와 미사일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죽이되 영혼은 멸하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 모두를 멸하시고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소망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다면 분명 그에 따르는 박해가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시시껄렁하게 모여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사탄은 세상을 통채로 집어삼킬 뿐만 아니라, 할 수 있으면 믿는 자들까지도 미혹하게 할 것입니다. 기도해야죠. 모이든지 흩어지든지, 기도에 힘쓰되 기도함으로 항상 깨어있어야죠. 세상이 우리를 분주함과 염려와 근심으로 내몬다 할찌라도,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만큼은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혹은 밤새워 기도하신 것처럼...... 주여, 이 나라를, 그리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왜 소수의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의 장난질로 인하여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가 도매금으로 함께 욕을 먹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한 이단들이 창궐하고 적그리스도들이 사신 주를 부인하고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세상에서, 믿는 자들의 믿음이 고난과 시험의 풀무 불에 던져질 그 날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늘 부족한 기도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는 저 자신의 어리석음에 둔감해지는 게 두렵습니다. 영적 둔감함이 육신의 피곤함을 가져오고, 육신의 피곤함은 다시금 영적 피곤함으로 이어지는 이 지독하고 교묘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려야겠다는 다짐을 매일 매일 합니다. 매일 하면서도 넘어지는 자신을 추스르고 또 추스르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뉘우치고 또 뉘우치는, 그러다가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는 날, 영광의 주를 눈으로 보고 한 없는 영광과 존귀와 찬송과 지혜와 능력을 돌리리라!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날마다 날마다 생각해봅시다. 매일 쳇바퀴처럼 도는 인생의 시간표에 스스로 떠밀려 살아가지 말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고 다른 서신에서 동일하게 외친 사도 바울이 진정 도달하고자 했던 푯대가 과연 무엇인지, 성도들이 바라봐야 할 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은 과연 어떠한 곳인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준비합시다. 곧,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할 말을 가르치실 것을 준비합시다. 기도로 끊임 없이 내 안에 살아있는 죄성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어나가는 신자 개개인의 영적 전쟁을 포기하지 맙시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이 말씀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매일 매일 상기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是日也 放聲大哭(시일야 방성대곡)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사건을 보며
이것 저것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했으며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가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뒤 지방에 내려가 심취하여 읽었던
'칼의 노래'는 저 또한 심취하여 두 번 연이어 읽어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죽음이 저에게는
마냥 슬픔과 비통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이 몰고 올 사회적 파장,
그리고 분열과 대립의 골이 과연 어떠한 양상을 띠게 될지,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죽음이 몰고 온 파장은
그의 살아있을 때의 파장보다 컸습니다.
국가적 위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밉니다.
어제는 북한이 20kt급의 위력을 지닌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다며
자화자찬했습니다.
그리고 신종 인플루엔자는 잠시 소강 상태에 있는 듯하더니만
갑자기 감염자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
사탄의 세력이 점점 자신의 힘을 나타내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멸망의 때가 이르기까지
그들은 기를 쓰고 발악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진정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은 사탄이며,
세상은 어찌했든 멸망에 이를 뿐입니다.
잠시 잠깐 평화가 올 수도 있고 전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가는 역사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자만이 그 뜻대로 기도하며 이 세상의 요동함에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탄이 원하는 것이 분열과 대립이라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이 사회는 다시금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이고
이명박 대통령도 대통령입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권세자를 향하여 분노한들 그들은 변할까요?
그들을 향해 분노하는 내 자신만 답답하여 속 터질 뿐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왜 권세자를 위해 기도하라는지
어렴풋이 알 듯합니다.
진정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봅니다.
진정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라와 민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남유다 멸망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비참한 생활을 합니다.
그들의 왕은 이방민족의 궁궐 밥상머리에서 왕의 녹을 받다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남은 자들은 바벨론의 안정적인 생활에 젖어들어
바벨론 정착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가슴 속에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했습니다.
70년 뒤에 포로생활의 고역을 마치고
고토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세 이레를 기도했습니다.
그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다니엘의 기도를 가로막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금식하며 주야로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기억하는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답답함을 우리의 분노나
인간적 연민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실을 넘어서서 이 세상 역사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 속에서 끝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원하시며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며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나의 기도는 표리부동한 거짓 고백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습니다.
마음에 분노와 불평이 가득한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를 향해 가졌던 마음과 무엇이 다를까 싶었습니다.
요나의 머리에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을 가리던 박넝쿨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벌레가 갉아먹어 버리자
요나는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은,
"네가 이 박넝쿨을 아꼈거늘
저 니느웨의 앞 뒤 분간 못하는 백성 10만 명과
많은 가축들은 아끼지 아니하느냐?"
고 되물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처한 상황만을 보고
불평하며 원망하는 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그 속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려는 노력은 잘 못합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보다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떠한 생각과 평가를 내놓기 바쁩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 나의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
(빌4:7-8)이 우리에게는 한 없는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기 위함입니다.
현실 세계에 소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하나님으로 소망 삼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향해서
나는 왕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께 먼저 여쭈어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합니다.
여전히 제 안에 살아 숨쉬는 자아의 크기가 큽니다.
그 크기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짓눌러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며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아니함을 믿으며
날마다 성령 충만하기를 구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제 마음과 생각을 지켜서
이 세상에 만연한 죽음의 영과 비판과 분열과 분노와 분쟁과
저주와 악독과 살인과 음란과 거짓의 영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리에
날마다 나아가기 소원합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서에 남긴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무도 원망 말라"
우리는 원망과 분노로써 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아니, 세상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세상이 바뀌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바뀌는 것이 쉽습니다.
내가 바뀜으로써 죽음의 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 노.사.모. 라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진정 노.사.모. 라면 아무도 원망 말라는 그 유서의 내용을
수 십, 수 백 번 읽었을 터인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를 원망하려 합니다.
그래서 조문 온 사람들을 돌아가라 합니다.
봉화 마을에는 현 정권을 비판하는 현수막이 즐비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탄핵이라는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이면 쥐새끼는 뭐냐는 현수막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한 비판을 하며
무엇을 위한 반대를 합니까.
진정 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랑한 사람들일까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는 그 동안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한때 자신의 적이었던 자들까지도 원망 말라는
진정 통 큰 남자의 진심이 어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들이 망자의 뜻을 다시금 죽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노건평, 박연차가 죽어야 한다며
서슬 푸른 칼날 같은 독설을 내뿜습니다.
과연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의 광기와 살기의 근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요한서신과 유다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마귀에 대한 평가입니다.
살인의 영과 광기의 영이 점점 사람들을 옭아맵니다.
그들 자신만 옭아매면 다행인데,
그 악한 영의 기운을 다른 사람을 향해 흘려 보냅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요아스는 의로운 제사장 사가랴의 피를 제단 위에서 흘렸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의로운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다고 하십니다.
원수 마귀의 계략은 옳은 것을 그르다 하며 그른 것을 옳다 합니다. 굽은 것을 곧다 하며 곧은 것을 굽었다 합니다.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들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각과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며
순수한 인간 본성에 충실하여 파괴와 분열에 앞장서게 합니다.
무서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평안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의인은 고난을 당하되 애매하게 당하며,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되 이유 없이 당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참으로 점잖습니다.
치열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을 향하여서는 눈과 귀를 닫고
안전한 방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똑바로 본 사람들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우리의 영이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세상의 종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신자 개개인에게 닥칠 영적 전쟁의 치열함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 밖에는
우리에게 승산이 없는 전쟁입니다.
칼과 활의 싸움이 아니기에, 핵무기와 미사일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죽이되
영혼은 멸하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 모두를 멸하시고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소망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다면
분명 그에 따르는 박해가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시시껄렁하게 모여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사탄은 세상을 통채로 집어삼킬 뿐만 아니라,
할 수 있으면 믿는 자들까지도 미혹하게 할 것입니다.
기도해야죠. 모이든지 흩어지든지,
기도에 힘쓰되 기도함으로 항상 깨어있어야죠.
세상이 우리를 분주함과 염려와 근심으로 내몬다 할찌라도,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만큼은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예수께서 새벽 미명에, 혹은 밤새워 기도하신 것처럼......
주여, 이 나라를, 그리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왜 소수의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의 장난질로 인하여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가 도매금으로 함께 욕을 먹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한 이단들이 창궐하고 적그리스도들이 사신 주를 부인하고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세상에서,
믿는 자들의 믿음이 고난과 시험의 풀무 불에 던져질 그 날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늘 부족한 기도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는
저 자신의 어리석음에 둔감해지는 게 두렵습니다.
영적 둔감함이 육신의 피곤함을 가져오고,
육신의 피곤함은 다시금 영적 피곤함으로 이어지는
이 지독하고 교묘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려야겠다는 다짐을
매일 매일 합니다.
매일 하면서도 넘어지는 자신을 추스르고 또 추스르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다시 일어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뉘우치고 또 뉘우치는,
그러다가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는 날,
영광의 주를 눈으로 보고 한 없는 영광과 존귀와 찬송과
지혜와 능력을 돌리리라!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날마다 날마다 생각해봅시다.
매일 쳇바퀴처럼 도는 인생의 시간표에
스스로 떠밀려 살아가지 말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고 다른 서신에서 동일하게 외친
사도 바울이 진정 도달하고자 했던 푯대가 과연 무엇인지,
성도들이 바라봐야 할 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은
과연 어떠한 곳인지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준비합시다.
곧,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할 말을 가르치실 것을 준비합시다.
기도로 끊임 없이 내 안에 살아있는 죄성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이루어나가는
신자 개개인의 영적 전쟁을 포기하지 맙시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이 말씀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매일 매일 상기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