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헛공부 없다.” 라는 말이 있다. 배워두면 다 쓸모가 있고,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잘 생각해보면 옛날에도 공부하기 싫어하는 마음은 똑같았나 보다. 그러니 이런 격려의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언젠가부터 ‘공부’라는 말은 우리에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단어가 되어 버렸다. ‘공부’라는 단어를 듣고 ‘사랑’, ‘행복’, ‘재미’ 이런 말을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공부’ 라는 말을 들을 때 생기는 마음은 아마도 ‘두려움’, ‘억지’, ‘책임감’, ‘부담’, 이런 단어들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공부가 싫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과연 공부가 싫기만 한 것일까? 중학교 때였던가, 고등학교 때였던가. 도덕 시간에 앎의 즐거움이란 단원을 배운 기억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욕이라는 것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즐거움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기타를 배우고 있었고, 그 기타를 배우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상당히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결국 기타로 먹고 살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이 좋았고, 배운 후에는 내가 기타를 잘 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좋았다. “앎의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참 공감이 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앎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있을까? 중,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또 요즘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봐도 그렇고, 누구하나 재미있게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없다. 학교야 말로 이 앎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임에도 말이다. 학교는 매일 매일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곳이다. 내가 지금까지 몰랐던 수학적 지식을 알려주고, 몰랐던 소설에 대하여 배우고, 도덕성과 철학을 배우며, 역사적 사실을 배운다. 또 몰랐던 영문법도 알려주고, 더 나아가서 음악적 지식과, 미술, 체육까지 두루두루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것으로 꽉 차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학교에서 ‘앎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한참 동안 고민한 후에 아니 사실 그다지 고민하지 않아도 그 대답을 알 수 있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앎의 즐거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새로운 것에 대하여 이 즐거움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이 앎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배우려는 마음이다. 쉽게 표현해 보면 알고 싶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려는 마음은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다는 것의 인정이다. 그리고 알고 싶다는 욕구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어떠한 대가를 지불 하겠다는 결심이고, 열심을 다하겠다는 열정이다. 배우려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앎의 즐거움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배우려는 마음은 어떨 때 생길까? 다음으로 찾아오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앞에서 나는 기타를 배웠던 시절을 이야기 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기타를 배우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손가락 끝에 물집이 생기고, 더 나아가서는 피멍이 들어 기타 줄에 살짝만 닿아도 손이 짜릿하게 아팠던 기억이 난다. 또 내 마음은 멋진 기타리스트들처럼 자유롭고 화려하게 연주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짜증냈던 기억도 난다. 손가락들을 다 잘라서 다시 붙이고 싶을 만큼 잘 움직이지 않았고, 내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의심이 들만큼 코드는 외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물론 그 즐거움이 영원하진 않았다. 한 6개월 정도인가 불사르듯 기타를 배우고는 이내 흥미가 떨어져 하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앞에서 이야기 한 질문, 배우려는 마음은 어떻게 생길까에 대한 대답이 하나 떠오른다. 바로 알고 싶다는 마음이다. 알고 싶으니까 배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알고 싶을까?
알고 싶은 마음은 여러 가지에서 온다. 내가 기타를 잘 치고 싶었던 이유는 언젠가 멋진 기타리스트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화려한 손놀림과 현란한 기타사운드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어떠한 모델을 보고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또는 어려움에 처해 알고 싶어 하기도 한다. 고3시절을 생각해보면, 공부가 즐거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문제를 못 풀면 수능에서 3점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그 3점이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지 하루를 꼬박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때만큼 교과서의 내용이 절실히 알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때때로 경쟁심에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는 농구를 좋아하는데, 처음부터 농구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우연히 들른 농구장에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굴욕을 맛봤다. 친구들이 농구를 못하는 것을 놀렸음은 물론이요, 농구의 기본적인 규칙도 모른다고 나에게 핀잔과 놀림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농구하는 나에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놀리는 친구들이나 그것에 발끈해서 화를 냈던 나나 참 어리긴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로 나는 농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니 거의 연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파고들었다. 그 때의 굴욕이 싫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농구를 했다. TV에서 나오는 농구시합은 꼬박꼬박 봤다. 그리고 다시 코트로 돌아 왔을 땐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고, 친구들과 즐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중요한건 그 때 내가 농구를 무지하게 알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런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배우려는 마음이 되고(사실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마음은 우리를 ‘앎의 즐거움’으로 이끌어 준다.
그럼 학교에서 하는 공부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길까? 아니 왜 우리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일까? 사실 따지고 보면 학교 공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것을 압도할 만큼 하기 싫은 이유들이 더 많다. 공부는 스트레스를 준다. 그 이유는 뒤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공부가 말 그대로 공부(배우는 것)는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성적을 동반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성적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석차가 생기고, 석차가 생기면서 우열이 가려진다. 즉 잘하는 놈과 못하는 놈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놈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잘하는 놈들은 어디를 가도 인정받고 칭찬받는다. 하지만 못하는 놈은? 정확히 그 반대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잘하는 놈보단 못하는 놈들이 훨씬 더 많다. 왜냐면 이 기준은 너무나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1등보단 전부 다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못하는 놈들이 더 많을 수밖에.
이러한 우열은 우리를 공부가 더 이상 학습이 아닌 경쟁이 되게 한다. 이제 학교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앎의 즐거움’이 아닌 ‘승자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패자의 쓴잔’을 마시고 있다. 그러니 학교에 가기 싫을 수밖에 없다. 공부가 싫을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마음들을 버리고 ‘앎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즐거움을 회복해서 배우려는 마음으로 충만해져, 성적 따위를 연연하지 않고 공부를 즐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진정으로 공부를 즐길 수 있게 될 때 진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축구선수이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영표 선수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은 한다. 이 말이 사실 그가 처음 한 말인지 아니면 어떠한 격언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재능 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나는 축구를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이영표 선수는 이 말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타고 났다 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좋은 성적을 가질 수도 있지만 남는 것은 피곤함과 스트레스뿐이다. 즐기는 것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결과가 좋으면 더 좋고, 나빠도 사실 즐기는 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공부를 즐기는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이제부터 우리는 공부를 즐기도록 하자. 그 마음의 중심에는 배우려는 마음으로 가득차야 함은 말 할 것도 없다.
배우는 마음의 회복 옛말에 “헛공부 없다.” 라는 말이 있다. 배
배우는 마음의 회복
옛말에 “헛공부 없다.” 라는 말이 있다. 배워두면 다 쓸모가 있고,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잘 생각해보면 옛날에도 공부하기 싫어하는 마음은 똑같았나 보다. 그러니 이런 격려의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언젠가부터 ‘공부’라는 말은 우리에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단어가 되어 버렸다. ‘공부’라는 단어를 듣고 ‘사랑’, ‘행복’, ‘재미’ 이런 말을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공부’ 라는 말을 들을 때 생기는 마음은 아마도 ‘두려움’, ‘억지’, ‘책임감’, ‘부담’, 이런 단어들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공부가 싫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과연 공부가 싫기만 한 것일까? 중학교 때였던가, 고등학교 때였던가. 도덕 시간에 앎의 즐거움이란 단원을 배운 기억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욕이라는 것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즐거움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기타를 배우고 있었고, 그 기타를 배우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상당히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결국 기타로 먹고 살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이 좋았고, 배운 후에는 내가 기타를 잘 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좋았다. “앎의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참 공감이 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앎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고 있을까? 중,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또 요즘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봐도 그렇고, 누구하나 재미있게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없다. 학교야 말로 이 앎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임에도 말이다. 학교는 매일 매일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곳이다. 내가 지금까지 몰랐던 수학적 지식을 알려주고, 몰랐던 소설에 대하여 배우고, 도덕성과 철학을 배우며, 역사적 사실을 배운다. 또 몰랐던 영문법도 알려주고, 더 나아가서 음악적 지식과, 미술, 체육까지 두루두루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것으로 꽉 차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학교에서 ‘앎의 즐거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한참 동안 고민한 후에 아니 사실 그다지 고민하지 않아도 그 대답을 알 수 있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앎의 즐거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새로운 것에 대하여 이 즐거움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이 앎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배우려는 마음이다. 쉽게 표현해 보면 알고 싶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려는 마음은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다는 것의 인정이다. 그리고 알고 싶다는 욕구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어떠한 대가를 지불 하겠다는 결심이고, 열심을 다하겠다는 열정이다. 배우려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앎의 즐거움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배우려는 마음은 어떨 때 생길까? 다음으로 찾아오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앞에서 나는 기타를 배웠던 시절을 이야기 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기타를 배우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손가락 끝에 물집이 생기고, 더 나아가서는 피멍이 들어 기타 줄에 살짝만 닿아도 손이 짜릿하게 아팠던 기억이 난다. 또 내 마음은 멋진 기타리스트들처럼 자유롭고 화려하게 연주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짜증냈던 기억도 난다. 손가락들을 다 잘라서 다시 붙이고 싶을 만큼 잘 움직이지 않았고, 내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의심이 들만큼 코드는 외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물론 그 즐거움이 영원하진 않았다. 한 6개월 정도인가 불사르듯 기타를 배우고는 이내 흥미가 떨어져 하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그 때를 생각해 보면 앞에서 이야기 한 질문, 배우려는 마음은 어떻게 생길까에 대한 대답이 하나 떠오른다. 바로 알고 싶다는 마음이다. 알고 싶으니까 배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알고 싶을까?
알고 싶은 마음은 여러 가지에서 온다. 내가 기타를 잘 치고 싶었던 이유는 언젠가 멋진 기타리스트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화려한 손놀림과 현란한 기타사운드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어떠한 모델을 보고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또는 어려움에 처해 알고 싶어 하기도 한다. 고3시절을 생각해보면, 공부가 즐거웠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문제를 못 풀면 수능에서 3점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그 3점이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지 하루를 꼬박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때만큼 교과서의 내용이 절실히 알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때때로 경쟁심에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는 농구를 좋아하는데, 처음부터 농구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우연히 들른 농구장에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굴욕을 맛봤다. 친구들이 농구를 못하는 것을 놀렸음은 물론이요, 농구의 기본적인 규칙도 모른다고 나에게 핀잔과 놀림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농구하는 나에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놀리는 친구들이나 그것에 발끈해서 화를 냈던 나나 참 어리긴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로 나는 농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니 거의 연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파고들었다. 그 때의 굴욕이 싫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농구를 했다. TV에서 나오는 농구시합은 꼬박꼬박 봤다. 그리고 다시 코트로 돌아 왔을 땐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라고 하면 좋겠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고, 친구들과 즐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중요한건 그 때 내가 농구를 무지하게 알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런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배우려는 마음이 되고(사실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마음은 우리를 ‘앎의 즐거움’으로 이끌어 준다.
그럼 학교에서 하는 공부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길까? 아니 왜 우리는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일까? 사실 따지고 보면 학교 공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것을 압도할 만큼 하기 싫은 이유들이 더 많다. 공부는 스트레스를 준다. 그 이유는 뒤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공부가 말 그대로 공부(배우는 것)는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성적을 동반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성적이라는 것이 생기면서 석차가 생기고, 석차가 생기면서 우열이 가려진다. 즉 잘하는 놈과 못하는 놈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놈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잘하는 놈들은 어디를 가도 인정받고 칭찬받는다. 하지만 못하는 놈은? 정확히 그 반대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잘하는 놈보단 못하는 놈들이 훨씬 더 많다. 왜냐면 이 기준은 너무나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1등보단 전부 다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못하는 놈들이 더 많을 수밖에.
이러한 우열은 우리를 공부가 더 이상 학습이 아닌 경쟁이 되게 한다. 이제 학교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앎의 즐거움’이 아닌 ‘승자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패자의 쓴잔’을 마시고 있다. 그러니 학교에 가기 싫을 수밖에 없다. 공부가 싫을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마음들을 버리고 ‘앎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즐거움을 회복해서 배우려는 마음으로 충만해져, 성적 따위를 연연하지 않고 공부를 즐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진정으로 공부를 즐길 수 있게 될 때 진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축구선수이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영표 선수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은 한다. 이 말이 사실 그가 처음 한 말인지 아니면 어떠한 격언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재능 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나는 축구를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이영표 선수는 이 말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선수이기도 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타고 났다 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좋은 성적을 가질 수도 있지만 남는 것은 피곤함과 스트레스뿐이다. 즐기는 것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결과가 좋으면 더 좋고, 나빠도 사실 즐기는 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공부를 즐기는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이제부터 우리는 공부를 즐기도록 하자. 그 마음의 중심에는 배우려는 마음으로 가득차야 함은 말 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