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사랑받을만 한가요?

기웅서2009.06.13
조회96

죄에 대해 잠깐 묵상했다.

 

죄인으로서 죄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아찔한 모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정의하는 작업은

내 안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제3자의 입장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나를 합리화시키려 하고 보호하려는 본능에서 탈피하여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절대적 시선'에 눈높이를 맞추고자 함이다.

 

죄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고차원적인, 그리고 가장 객관적인 대답은

'모든 게 내 탓이오'라는 반응이 아닐까 한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 아닐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의 미덕을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거의 없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혹 있더라도 그 안에 억눌린 자아가

뱀이 똬리를 튼 형국으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분열과 분쟁과 전쟁과 타툼의 원인은

죄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응징과 보복을 가하려는

인간의 끝 모를 자기 보호 본능과 자기 우월감에서 비롯된다.

이 반대편 끝에는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무한한 자기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

자기를 사랑하는 감정이 비뚤어지면

다른 사람을 폄하하고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이 높아질 것이라는

상대적 우월감이 작용하고,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자신이 절대자인 양, 혹은 절대 선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 모를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

 

역사를 통틀어 드러난 인간의 광기는 대부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인간 자신이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고 그것의 판단자가 되며

나아가 결정권자과 실행자가 된다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 말고는 없다.

광기란, 외압에 의해 제어당하지 아니하고 굴복하지 아니하려는 

일종의 자아도취 상태이며,

이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의 가치를 부여한다.

 

두살배기 아기를 보자.

그 아이에게 있어서 광기란 무엇인가.

자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그는 밤새 울음을 울 수도 있다.

자신 안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욕구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으로써

아기는 울음을 택한다.

그리고 그 울음을 잠재워줄 외부적 요인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울어댄다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달라는

일종의 시위라고 생각해보자.

이보다 앞 뒤 안가리는 식의 맹목적인 자기 사랑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죄와 죄의식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죄가 인간의 비뚤어진 자기 사랑이라면

죄의식은 이러한 사랑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인식이 곧 죄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죄의식을 죄의 소멸과 곧장 연결시킨다.

아기들이 자신들의 욕구가 충족되거나 혹 거절당했을 때,

그 반응을 잘 살펴보자. 비단 아기들뿐만은 아니지만.

 

아기들은 욕구가 충족되면 일시적으로 잠잠해질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욕구가 발생되면 주저 없이 감정을 폭발시킨다.

반대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발악을 하며 대들지만,

계속해서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그것이 욕구의 소멸로 이어질리 만무하다.

인간의 단절된, 혹은 충족되어지지 않은 욕망은

반드시 다른 방법이나 기회를 통해 분출되고,

그것은 처음의 욕구보다 더 강렬할 수도 있다.

 

인간의 죄의식은 자아욕구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원하는 바가 절대적으로 옳고 선하다는 생각하는 바가

항상 나에게 충족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아는 제어되어야 하며

그로부터 기인하는 욕구 또한 절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법이 생겨난 이유를 생각해보자. 

인간이 원하는 바대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법은 필요 없다.

법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비인간화를 억제하기 위해 인간 스스로가 정해 놓은

일종의 경계선이다.

이 이상을 넘게 되었을 때,

즉, 한 개인의 욕구가 다른 개인 혹은 집단에게

직간접적인 정신적, 물리적 손해를 입혔을 때,

그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으로써 법이 제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이란 것이 항상 절대적인 기준일 수는 없다.

마약을 재배해서 그것을 복용하는 것이

하나의 기호활동과도 같은 남미나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마약복용 금지법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지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

일부 원주민들은 양귀비를 재배하여 마약을 자급자족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민주사회에서 제정한 법의 잣대를 내민다면

그들이 그것을 알아 들을 수나 있을까?

 

법이란 시대나 환경에 따라서 끊임없이 그 모양이 변한다.

민주국가에서 국회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좀 더 합리적이고 모두에게 납득될만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입법부로써 국회는, 다수의 민심을 수렴하여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되, 국민투표라는 대표성의 장치를 통해

그 민심을 수렴하여 통합하는 기능을 갖는다.

 

하지만 이 입법부에서조차 개인의 욕구가 충돌한다.

다수의 뜻을 대신하여 발의하는 본래의 목적을 도외시한 채,

당장 눈 앞에 있는 반대세력이나 음해세력에 대한 반발심리로

발의되는 의견의 실효성이나 합리성에 대한 판단 이전에

자신의 욕구와 기본적으로 노선을 달리하는 상대를

무조건 비판하고 적대하시려는 모습이 부지기수다.

 

이 또한 인간 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자기 사랑의 비뚤어진 발현이다.

국가의 중차대한 법안을 논의하는 곳의 사정이 이러하다면

일일이 들여다보기 힘든 개개인의 사정이라고 별 수 있을까.

그들의 행태에 대해 손가락질 하고 욕하며

그들이 국민을 대표해서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임을 부정하는

절대 다수의 시민들이라고 해서 나을 게 있을까.

없다. 있어도 도토리 키재기와 다를 바 없다.

 

인간 안에는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괜찮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나는 저 말도 안돼는 말과 행동을 한 적이 없으니까.

라는 식의 상대적 우월감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은 교만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엇은 비교의식과 자기 사랑에 좀 더 가깝다.

자기 사랑은 항상 남을 깎아내리는 것과 노선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 둘은 항상 평행선을 긋는다.

둘은 항상 대립 관계에 있지, 서로를 동일시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열논쟁과 권력다툼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인간이 두 명만 모여도 자기를 자랑한다.

아이들이 모여서 싸우는 것을 잘 살펴 보자.

대부분 누가 더 낫냐고 따지다가 주먹다짐에까지 이른다.

어찌하든지 남도다 내가 더 나은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라도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기 원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들 안에는

자기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아울러

증오심이 존재한다.

이 증오는 애정과 자기비하가 교묘하게 결합된 상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 없어보이지만,

자기가 경외하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하거나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경외의 대상을 아예 증오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그를 죽이는 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증세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결국 그와 같은 존재가 되려 하는 자신 안에 억눌린 욕구가

비정상적인 형태로 분출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자기 비하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는 '자아'가 존재하며,

그 자아가 좀 더 우월하다고 '자아'가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자신을 높은 위치에 올리기도 하고

낮은 위치에 내려놓기도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 한 사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절대적 사랑이든지, 상대적 우월감 혹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기형적 형태의 자기 사랑이든지간에

인간 안에 있는 자기 사랑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다.

그것은 때로는 은밀하고 때로는 광적이다.

 

죄가 무엇인가를 논하는데, 뜬금없이 자기 사랑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는 뜬금없는 게 아니다.

모든 죄는 자기 사랑의 비극적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판단의 기준에 자기를 절대가치로 둔다.

그리고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가치에 대서는 극단적 배격을,

그것에 부합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병적인 중독 증세를 보인다.

 

모든 중독 증세나 도취증상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 그것은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인 자기사랑인데

정작 자신은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

때로 죄의식으로 인해 그러한 모습을 증오할 수도 있지만

결국 다시금 자기를 사랑하는 행위라고 결론짓는다.

대부분의 중독 증세는 쉽게 끊을 수 없다.

이는 죄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내가 좋아하면 그만이라는

자기 절대화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자신의 욕구가 절대적으로 선하고 완벽하다는 생각은

광기 혹은 극단적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광기의 극단은 살인이며 비하의 극단은 자살이다.

이 두 가지 극단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제어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지는 가장 비참한 비극이다.

 

한 극단인 살인은, 자신의 욕구에 배반되는 존재 혹은 집단에 대한

불타는 증오와 저주의 감정의 폭발에서 기인한다.

이는 상대적 박탈감, 혹은 욕구가 제어당한 경험,

때로는 사회 전체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그 깊숙한 내부를 들여다보면,

살인이 자기 열등감 혹은 과거의 상처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자기 안의 열등감을 커지면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한 증오가 생긴다.

그것이 권력이든 부이든 명예이든 외모든 상관 없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자에 대한 증오는

강도와 강간, 살인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범죄가 돈에 대한 욕심과 비뚤어진 성적욕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굳이 우리가 법의학자가 아니고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수긍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내가 가질 수 없을 바에야 그것을 가진 자를 없애거나

혹은 그를 죽이고 자신이 갖고자 하는 것을 빼앗는 것이

자기 사랑의 잘못된 한 극단에 위치한 살인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싸이코 패스에 대해서는

살인 자체에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문화가 한 몫 했다고 본다.

특히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오늘날 세계의 문화 풍조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빠르고 깊게 침투하고 있다.

자살폭탄 테러와 연쇄 살인사건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게임이나 오락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전쟁이나 총싸움,

혹은 격투나 살인의 장르들은

죄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극단의 상황을 설정한다.

인신매매는 비인간화의 매개체로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비뚤어진 성의식은 여성을 노예화시키고 상품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화에 노출된 사람들은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생명경시풍조에 쉽게 물들어 가고 있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은 힘겨운 파도를 거스르는 시대에 직면했다.

 

다른 극단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자살. 대한민국에서 하루에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가

30명을 훨씬 웃돈다는 사실을 아는가.

1년이면 1만 명이 훌쩍 넘는 사람이 자살로 죽는다.

4800만 명의 남한 인구의 4800분의 1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공식 집계가 이정도라면 사인이 불분명하거나

집계되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했을 경우 그 숫자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살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극단이다.

자살이 자기 비하의 극단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자살은 생명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다.

내 생명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것.

이것이 자기 비하인가?

자살을 깊이 들여다보자.

자살은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대한 최후의 반발이다.

자신이 변화시킬 수 없는 환경과 현실에 대한 발악이다.

변화되지 않는 주변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씨름하고 고뇌할 바에야

차라리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자살이다.

자살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자살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처음부터 자살이 좋다았면 굳이 자살 사이트를 만들고

같이 죽을 필요 없다.

유서를 남길 필요도 없고,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가질 것도 없다.

많은 눈물로 밤을 새울 필요도 없고,

자살할 방법을 궁리할 이유도 없다.

가장 쉽게 죽을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본능이 있다.

이 본능은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뉘우칠 수 없는 죄를 자살로써 갚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뉘우칠 수 있고 없고를 판단하는 기준이 자기에게 있다.

자살을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마음의 근심을 덜고자 하는데,

살아남은 자들은 근심이 더할 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은 졌을 망정,

다른 사람에게는 그 무엇보다 무책임한 행동이 자살이다.

명예롭게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에 대해서

정조를 지켰다, 끝까지 지조와 기개를 잃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하나. 결국 현실 도피의 극단에 불과한 것을.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거나, 대의를 이루기 위한 것과는 다르다.

기형적인 국가 사랑이나 대의명분과도 또 다르다.

이는 순전히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가 스스로 계획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바를 옳다고 생각하는 자아도취에 빠진,

그릇된 자기 사랑의 호수에 잠겨버린 사람을 지칭한다.

 

살인이냐 자살이냐는 

타인을 죽이느냐 내가 죽느냐의 선택인데 이 두 가지 모두가

현실 제거와 현실 도피를 통해

비뚤어진 자기 사랑을 완성하려는 죄의 결과다.

그런데 첫 번째의 극단은 자신의 죄를 뉘우칠 가능성이 존재하나,

두 번째 극단은 그 가능성조차 없다는 점에서

어리석음보다는 슬프고 안타깝다는 평가를 내린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그것이 정당화되거나 미화되는 요즘 세태는

뭐랄까, 집단적 광기에 중독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

 

죄에 대해서 인간 심리의 측면에서 접근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써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면

대답은 쉽게 나온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에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죄이며 죄는 거창한 살인이나 도적질, 사기 등

법에 저촉되는 행위의 총칭이 아니다.

죄는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인데,

첫째와 둘째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것이다.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은 장가가고 시집가고 농사지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이 죄악이 관영했다고 평가하신 이유는 뭘까?

그들의 삶에 하나님은 없었다.

순수한 인간의 삶. 세상은 순도 100%의 인간들로 가득했다.

노아는 그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순도 100%의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인간의 자기 사랑을 제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은

인간을 폐쇄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는 듯 하다.

인간의 자유는 가장 인간다울 때 가능한데,

그것을 제한하는 하나님은 귀찮고 걸리적거리는 존재 그 자체다.

 

하지만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이다.

그를 떠나서는 인간에게 생명이 없으며 진정한 자아 발견은 없다.

동시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은 앞에서 길게 언급한 바와 같이

비뚤어지고 기형적으로 변형된 양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살펴보자.

하나님 없는 인간이 유토피아를 꿈꾸고 진보와 변혁을 꾀하지만

결국엔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과거 화려했던 고대 제국을 보라.

앗시리아와 바벨론, 헬라, 비잔틴, 로마 제국,

오스만 투르크와 몽고 제국,

근세에 등장한 프랑스와 영국, 독일과 일본과 소련의 제국주의,

20세기 들어서 등장한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

그리고 지금 세계의 신흥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

 

이들 모두가 한 때 천 년 왕국을 꿈꾸고

영원한 제국의 번영을 기워했건만,

지금 저들의 화려했던 시대는 박물관과 야외 유적지에 있다.

여행객들의 사진기 렌즈에 포착되는 피사체나

수학여행객들의 노트에 스크랩되는 학습자료에 불과하다.

현대 사회의 패권을 노리는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국가들도

과거 명운을 달리했던 제국들과 그 운명이 다를 것이라고 보는가?

 

진정 하나님은 원하시면 제국을 세우실 수도, 흩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앗시리아 제국을 몽둥이로 사용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몽둥이 앗시리아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했다.

도구가 사용자 앞에서 대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사야서를 깊이 묵상해보라.

모든 제국이 통 안에 든 한 방울의 물이요, 티끌에 불과하다는

이사야서의 기록은 현대에도 동일한 말씀이다.

아무리 미국이 강대하다 한들, 중국이 급부상한다 한들,

쓰촨성에서 발생했던 것과 같은 지진 한 번이면,

허리캐인이나 쓰나미와 같은 풍수해 한 번이면

하루 아침에 몰락하고 마는 연약한 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진정 인간의 영화란 장작에 붙은 불과 다름 없다.

장작이 다 타버리면 사그라드는 불꽃에 불과하다.

그러한 인간의 자기 사랑은 거대 제국을 만들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권력을 행사했지만,

그 말로는 또 다른 제국에 의한 멸망 혹은

제국 내의 반란으로 인한 정권 교체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한 사람의 인생 또한 이와 같지 아니한가?

제국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며 인간의 삶 역시

화려했던 순간을 위해 피어오르다가 결국 한 줌 재와 연기처럼

새카만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인간의 자기 사랑은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 막을 내린다.

그것으로 끝이다.

즉, 인간의 죄도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에 우리의 죄가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이다.

 

사람이 삶과 죽음에 대한 자기 주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가?

사람에게는 주권이란 것이 애시당초에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주권은 위임받은 것이기에 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한 청지기의 비유로써

주인이 맡은 것을 찾으러 올 때까지

주인의 소유를 잘 관리하는 사람을 선한 자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교회에서 비추어지는 모습.

그것은 얼마든지 가공될 수 있고 포장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당신은 무엇을 먼저 좇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청지기요, 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매,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행동할 수 있는 믿음이야말로

자기 사랑과 자기 연민에 중독된 현 시대에서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아 실현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이 아닐까.

 

이는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 -로마서 11장 3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