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연개소문의 반정에 대한 평가는,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하였다는 부정적 견해와, 고구려의 자긍심과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것이었다는 긍정적 견해가 있다.
연개소문의 반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영류왕의 지나친 친당사대정책을 꼽고 있다. 실제 영류왕은 당나라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봉역도를 받치는가 하면, 당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수나라와의 전쟁 기념탑인 경관을 해체한 바 있다. 여기에 진대덕이란 인물의 정찰을 방조하고,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중국포로들을 송환한 것 조차 모두 영류왕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려는 입장도 있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추진하고 있던 천리장성 축조 중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반정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되어 온 측면이 많다.
하지만 영류왕은 그 무엇보다도 수나라와 20년간에 걸친 대립과 전쟁으로 인해, 피패해진 국력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였이다. 또한 수나라 멸망이후 빠르게 중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왕조를 성립시킨 당나라에 대한 성향과 전력분석이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영류왕의 친당정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며, 그 자체로 고구려의 주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선 622년에 발생한 포로송환문제는 당나라의 요청에 의해 양국에서 1만명씩 상호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기 때문에, 오히려 영류왕의 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봉역도를 바친부분, 전탑을 허문 부분, 그리고 진대덕이란 인물에게 정탐을 허용한 부분인데 , 특히 돌궐의 가한 힐리가 잡힌 것을 기념하여 봉역도를 받친 부분은, 고구려의 주권을 훼손시키고 나아가 고구려의 군사기밀 정보를 유출시킨 실책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진대덕의 정탐행위에 대해서도 영류왕의 실책임은 분명하지만, 영류왕이 고의적으로 방관하거나 허용한것은 아니었다. 다만 진대덕이 정탐행위를 일삼았을 때, 나라 안 곳곳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등 일선관리들의 무책임하고 무사안일한 행동은 지탄받을만한 것이었다. 비록 전쟁중은 아니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를 끝없이 위협하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관리들이 신경을 써 세심하게 관찰하였다면 진대덕의 정탐행위를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돌궐과 세력을 연합하여, 당나라를 공격하는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니었겠냐는 추측은 역사감각이 떨어진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지도는 당나라 건국 초장기 시절 지도인데, 얼핏 세력의 면적만을 보면 마치 돌궐이 당나라와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실제로 돌궐의 힘에 의해 통제되는 세력범위는 극히 일부분이며 더구나 부족단위의 세력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전체를 통제할마한 통일세력조차 없었다.
그런 가변적이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 유목세력과 연합한다는 것은, 오히려 고구려의 국방에 위협을 증가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시대 때야 고구려가 주변유목민족의 힘을 완전히 앞도할 수 있었고, 또 북연과 혈맹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당시 당나라의 힘은 돌궐과 고구려를 상대로 동시 양방향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돌궐과의 연합은 고구려로서는 재고할만한 성격의 외교전략조차 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는 연개소문 반정을 한 직접적인 이유에 대해, 천리장성 축조를 중단시켰기 때문으로 이해되어 온 축면이 많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영양왕이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를 강행시켰기 때문으로 본다. 그 기본적인 이유로는 삼국사기에 영류왕이 천리장성 축조를 중단시켰다는 언급이 전혀 없을뿐 아니라, 장성축조는 매우 힘들고 오랜시간이 걸리는 일이어서 귀족세력사이에 가장 꺼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리장성은 도읍 평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연개소문과 같은 대귀족세력에게 그일을 전담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중앙정권에서 낙천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영류왕의 온건정책으로 인해 강경파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에서, 강경파의 대표주자인 연개소문이 중앙권력에서부터 축출되자 무력대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반정은 고구려의 주체성회복 차원에서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권력쟁탈전 측면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만약 연개소문이 순수한 주체성과 자긍심 회복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면, 왜 무너뜨렸던 경관을 다시 복원하려 하지 않았는가? 또 당태종 이세민에 의해 강점된 서변의 영토들을 훼복하려는 노력을 하지않고 전력을 남쪽전선에 집중 투입시켰겠는가? 물론 당태종 이세민이 내린 신하의 예 요구를 거부하여 고구려의 독립성을 드러내긴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혁명의 대의명분을 실현 시켰다고 보긴 약하다. 더욱이 당나라와 충분히 대등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뛰어나지 못한 왕족세력들을 총장으로 임명하여 엄청난 패배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그가 1인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실력위주 보다는 세력위주로 인사를 고용하고 배치시켰다는 증거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 당나라의 침략을 모두 막아냈다고 선전하지만, 이것역시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당나라 군은 여러차례 평양성까지 육박하여 전쟁을 치뤘으며, 이는 사실상 전방의 전선이 붕괘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연개소문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방의 주요병력을 사병화 시키거나, 중앙의 방어태세 강화를 위해 대거 이동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후대이긴 하지만 고려 무신정권이 성립하였을 때도 이같은 현상이 초래되었다.
그의 혁명이 순수한 것었다면 모든 권력은 보장왕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최전방에 남아서 당나라의 대공세를 직접 막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의 정권장악은 최전방에 치명적인 군사공백과 전술붕괴및 충성심을 약화시켜, 고구려 멸망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연개소문 집권,고구려 멸망 원인?
연개소문의 반정에 대한 재고
현재 연개소문의 반정에 대한 평가는,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하였다는 부정적 견해와, 고구려의 자긍심과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것이었다는 긍정적 견해가 있다.
연개소문의 반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영류왕의 지나친 친당사대정책을 꼽고 있다. 실제 영류왕은 당나라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봉역도를 받치는가 하면, 당나라의 요구에 굴복하여 수나라와의 전쟁 기념탑인 경관을 해체한 바 있다.
여기에 진대덕이란 인물의 정찰을 방조하고,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중국포로들을 송환한 것 조차 모두 영류왕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려는 입장도 있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추진하고 있던 천리장성 축조 중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반정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되어 온 측면이 많다.
하지만 영류왕은 그 무엇보다도 수나라와 20년간에 걸친 대립과 전쟁으로 인해, 피패해진 국력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였이다. 또한 수나라 멸망이후 빠르게 중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왕조를 성립시킨 당나라에 대한 성향과 전력분석이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영류왕의 친당정책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며, 그 자체로 고구려의 주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선 622년에 발생한 포로송환문제는 당나라의 요청에 의해 양국에서 1만명씩 상호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기 때문에, 오히려 영류왕의 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봉역도를 바친부분, 전탑을 허문 부분, 그리고 진대덕이란 인물에게 정탐을 허용한 부분인데 , 특히 돌궐의 가한 힐리가 잡힌 것을 기념하여 봉역도를 받친 부분은, 고구려의 주권을 훼손시키고 나아가 고구려의 군사기밀 정보를 유출시킨 실책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진대덕의 정탐행위에 대해서도 영류왕의 실책임은 분명하지만, 영류왕이 고의적으로 방관하거나 허용한것은 아니었다. 다만 진대덕이 정탐행위를 일삼았을 때, 나라 안 곳곳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등 일선관리들의 무책임하고 무사안일한 행동은 지탄받을만한 것이었다. 비록 전쟁중은 아니었지만 당나라가 고구려를 끝없이 위협하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관리들이 신경을 써 세심하게 관찰하였다면 진대덕의 정탐행위를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당시 돌궐과 세력을 연합하여, 당나라를 공격하는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니었겠냐는 추측은 역사감각이 떨어진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지도는 당나라 건국 초장기 시절 지도인데, 얼핏 세력의 면적만을 보면 마치 돌궐이 당나라와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싶다.
그러나 실제로 돌궐의 힘에 의해 통제되는 세력범위는 극히 일부분이며 더구나 부족단위의 세력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전체를 통제할마한 통일세력조차 없었다.
그런 가변적이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 유목세력과 연합한다는 것은, 오히려 고구려의 국방에 위협을 증가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시대 때야 고구려가 주변유목민족의 힘을 완전히 앞도할 수 있었고, 또 북연과 혈맹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당시 당나라의 힘은 돌궐과 고구려를 상대로 동시 양방향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돌궐과의 연합은 고구려로서는 재고할만한 성격의 외교전략조차 되지 못하였다.
지금까지는 연개소문 반정을 한 직접적인 이유에 대해, 천리장성 축조를 중단시켰기 때문으로 이해되어 온 축면이 많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영양왕이 연개소문에게 천리장성 축조를 강행시켰기 때문으로 본다.
그 기본적인 이유로는 삼국사기에 영류왕이 천리장성 축조를 중단시켰다는 언급이 전혀 없을뿐 아니라, 장성축조는 매우 힘들고 오랜시간이 걸리는 일이어서 귀족세력사이에 가장 꺼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리장성은 도읍 평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연개소문과 같은 대귀족세력에게 그일을 전담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중앙정권에서 낙천시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영류왕의 온건정책으로 인해 강경파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에서, 강경파의 대표주자인 연개소문이 중앙권력에서부터 축출되자 무력대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반정은 고구려의 주체성회복 차원에서보다는, 오히려 개인의 권력쟁탈전 측면에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만약 연개소문이 순수한 주체성과 자긍심 회복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면, 왜 무너뜨렸던 경관을 다시 복원하려 하지 않았는가? 또 당태종 이세민에 의해 강점된 서변의 영토들을 훼복하려는 노력을 하지않고 전력을 남쪽전선에 집중 투입시켰겠는가?
물론 당태종 이세민이 내린 신하의 예 요구를 거부하여 고구려의 독립성을 드러내긴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혁명의 대의명분을 실현 시켰다고 보긴 약하다. 더욱이 당나라와 충분히 대등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뛰어나지 못한 왕족세력들을 총장으로 임명하여 엄청난 패배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그가 1인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실력위주 보다는 세력위주로 인사를 고용하고 배치시켰다는 증거이다. 그가 살아있을 때 당나라의 침략을 모두 막아냈다고 선전하지만, 이것역시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당나라 군은 여러차례 평양성까지 육박하여 전쟁을 치뤘으며, 이는 사실상 전방의 전선이 붕괘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연개소문은 자신의 안전을 지키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방의 주요병력을 사병화 시키거나, 중앙의 방어태세 강화를 위해 대거 이동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후대이긴 하지만 고려 무신정권이 성립하였을 때도 이같은 현상이 초래되었다.
그의 혁명이 순수한 것었다면 모든 권력은 보장왕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최전방에 남아서 당나라의 대공세를 직접 막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의 정권장악은 최전방에 치명적인 군사공백과 전술붕괴및 충성심을 약화시켜, 고구려 멸망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출처 : 야후 - 아침이슬 (vippds)]
연개소문에 대한 새롭게 알게되는 해석이네요.
연개소문이 순수하게 정권을 차지한건 아니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진행된거였는지 몰랐네요.
어쨌든 새로운 역사 지식을 알아갈수록 신비함과 재미를 느낍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