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노사모 위시해서 국내외 진보좌익 세력들이 인터넷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대통령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차기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박근혜대표의 아버지)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진보좌익과 보수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이나 지하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공무원 및 그시대 언론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 학자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전부 일제 식민지 지배에 큰건 작건 협력한 게 아니냐? (일제가 철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탈을 많이 해갔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그럼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인가요?)
그당시 반체제 지하활동을 빼고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그어떤 사회생활을 조선땅에서 공식적으로 할수가 있을까요
아예 시골에서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는가?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독립투사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보라 박정희는 이렇게 살지 않고 만주군이 됐으니깐 '친일파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 비난하는 당사자들이 그때 박정희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으면 모두 목숨을 당연히 내걸고 독립투사로 나서 일제와 싸웠을까?하는 의문을 낳을 뿐입니다. 진짜 나쁜 놈은 저렇게 훌륭한 삶을 산 위인을 두고 나보다 훌륭한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업적을 숨기고 악의적으로 모함하고 음해를 하는 세력들입니다.
박 대통령은 위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모셨고 후세가 마땅히 본 받아야 된다며 사당을 짓고 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언제 그런 분들을 홀대하고 푸대접한 적이 있습니까?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북괴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자신의 과거경력을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승곤(92)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비밀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세계일보-]
역사적으로 본다면 일제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했으며 군사적으론 공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세력이기 때문에 진보좌익들과는 원래부터 철천지 원수가 아닐수 없습니다.
빨갱이들이 못 마땅할지라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일제와 대립하고 투쟁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입장에선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아닙니다.
저런 인물들한테 독립투사라고 훈장을 준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대한민국의 이념으론 이해할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진보좌익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 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바로 성장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첫번째 형태이며. 공산주의는 여기서 더 발전된 더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라 규정함.)
왜냐면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이어받는다"라고 명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임시정부는 절대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평화적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반공의 정신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합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공산주의자 집단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이 목적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제일의 목적이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념화 되어 민족이란 이름으로 포용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김구 선생님과 함께 상해 임시 정부는..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그 활동을 돕는 자는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임정에서 축출하였으며,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한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상해 임정에는 성재 이동휘란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임정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입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군자금이 부족하여 활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동휘는 이들에게 몰래 임정의 자금을 지원 하였습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임시정부는 이동휘 국무총리를 해임 조치를 하였습니다.)
그당시에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청년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합니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박정희는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청소년시절부터 군사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소 일본에 대해 자꾸 반항적인 성향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정희에 대하여 경찰,행정,학교를 장악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억압이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박정희에게 배운 이영태는 이낙선(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 ‘박정희’ 79쪽)}
[ 교사시절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평소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정순옥씨의 증언입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벌주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하여 살렸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어요. 그리고 언젠가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주영배씨의 증언입니다.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전경숙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세계일보 "만주군 박정희를 보는 시각" 발췌-]
가까운 거리에서 박대통령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김종신씨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간단하게 "왜놈들 하도 심하게 굴어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사학에 대한 공부욕구와 말단 교사로서 현장에서 당하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과 위협이 문경에서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가 힘들어서 무상 대학급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박정희의 민족감정은 부추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시절1기생 이기건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발췌: 권장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군인은 소위 이상 경찰은 경사 이상 관료는 고등문관 이상으로 대상을 제한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박정희 대통령(소위)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고발]
일제 패망과 함께 김일성은 소련군을 등에 업고 소련군 대위로 평양에 입성하여 38선 이북을 장악하였다.
곧바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은 헤알리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명을 앗아 갔으며 골 깊은 민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였다.
전후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 댓 가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절반을 중국에게 헌납하였다.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일성, 김정일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으며 얼빠진 인간들은 보란 듯이 혁명열사 능을 참배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6.25동란 당시 북한의 부수상을 역임한 1급 전범이다.
좌파들은 박정희대통령의 현존하는 기념물을 없애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 민족의 원흉 홍명희의 생가를 복원하려는 천인공노할 음모까지 꾸미고 있다.
여운형은 일제 말(1943년) 수차에 걸쳐 일제의 학병지원을 독려한 당시의 신문기사가 발견되었다. 또한 일제에 전향서를 제출하고 황국식민서사를 한 명백한 친일파이자 남한 내 공산주의의 거두였다. 이런 여운형에게 노무현 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2005년 3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김지태는 일제시대에 가장 악명 높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로부터 불하받은 2만평의 땅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으킨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이다.
동양척식회사로부터 특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일본의 주구노릇에 충실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제 말에는 군수공장을 운영하여 일제에 협력하였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부일장학회의 부일이라는 뜻은 일본을 부강하게 하자는 설도 있다.
노무현대통령은 중. 고등학교 시절에 김지태가 만든 부일장학금을 받았고 변호사 시절에는 당시 100억 원이 넘는 김지태의 상속세 관련 변호를 맡아 승소.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조세전문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사명단에서 친일파의 거두 김지태를 왜 제외시켰는지 궁금하다.
또 민족문제연구소의 논리대로라면 민족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여 긁어모은 친일파의 더러운 돈으로 공부하고 친일파를 변호하여 재산을 축적한 노무현대통령도 마땅히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2. 김희선의원의 부친 김일련(가나이 에이이치)은 만주경찰 특무로 독립군을 수도 없이 색출하여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3. 이미경의원의 부친 이봉권은 일본군의 핵심 사찰요원인 황군 헌병오장으로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4. 신기남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시게미쓰 구니오)도 헌병 오장으로 군림하며 독립군 색출과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5. 정동영 전 의장의 부친은 착취와 수탈의 최 일선 기관인 조선식산은행 산하 금융조합서기로 5년간 근무하였으며 6.25동란 당시의 행적도 불분명하다.
6. 유시민장관의 백부는 면장이었고 부친은 훈도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열우당의원들과 좌파들은 사실적 자료와 명백한 친일근거에도 불구하고 친일인사명단에서 모두 제외되었다.
북한의 8월9일자 로동신문에서는 남조선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진호라는 사람이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극구 찬양했다는 내용을 인용 보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북좌파라는 사실적 표현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하여 지난 3월3일 애국인사 8인을 민형사상으로 고소하여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대한민국의 공안당국은 민족문제연구소 김진호라는 사람의 실체를 밝히고 이적행위에 대하여 당장 수사를 착수해야 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북한 로동신문의 기사에 대하여 왜 한마디 반박도 못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가 없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묻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북좌파가 아니라면 북한의 로동신문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 되는 것이 아니던가?
지난 2000년 11월5일에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동당, 서총련, 인터넷대자보, 홍익대 민주동문회가 주동이 되어 문래공원 내 박정희대통령 흉상을 끌어내린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은 박정희대통령이 청산과 극복의 대상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 했고 이날의 광란을 주도한 곽태영은 2005년 4월19일 4.19묘지에서 박근혜대표의 화환을 짓밟은 장본인이다.
곽태영은 일제시대 자신의 창씨개명 사실을 아직까지도 숨기며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는 파렴치한 위선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만길, 이영희, 강정구 등 친북인사들의 소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 대한 친북좌파라는 표현이 명예훼손이라는 억측으로 코메디를 연출하고 있다.
눈만 뜨면 역사청산과 민족공조를 부르짖는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김일성, 여운형 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궁색한 변명으로 면죄부를 주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공교롭게도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북한정권이 부르짖는 역사청산과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은 거의 일치한다.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무현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북한의 김정일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박정희 죽이기에 골몰하는지 그 깊은 속내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은 통치기간동안 북한의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제압하고 감언이설에 능한 친북 진보좌파들의 망상을 보기 좋게 깨부쉈으며 북한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막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셨다.
지금 북한의 김정일과 친북좌파들이 대한민국을 장악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박정희대통령과 미국이다.
그들에게 박정희대통령과 미국은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북한 김정일의 논리를 가장 충실하게 이행하는 전위대에 불과할 뿐이다.-박정희바로알리기국민모임 김동주 대표-
먼저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진보좌익들은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과 문헌 사료를 북한 김정일과 남한의 친북좌경세력 특히 친노방송과 언론들이 샅샅히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말로 지어내 둘러대는 것이 바로 연변학계,연변자료 어쩌구 하면서 공갈치는 것입니다. 말이 학계이지 그들은 완전 북한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③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대통령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대통령이 소학교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신념을 가지고 한 민족교육 및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이기청씨가 밝힌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격 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요?.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이런 글에서는 박정희가 "요시"하며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군으로 근무할 그당시 소속부대의 작전지역에는 독립군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 요즈음의 이름은 청더 (承德,승덕)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한홍구는 박정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욕을 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지금 노무현이 만든 과거사위에서 맹렬히 활동중.)
........ 중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국내외 진보좌익 세력들이 현재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항일세력 및 항일군대 운운하며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마치 조선의 독립투쟁과 관계있는 세력처럼 교묘히 속이는 조작에 관한 설명을 드립니다.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근무할 1944년 당시에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같은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이 그들로썬 참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합니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의 항일사료를 어쩌구하면서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그쪽은 완전 친북학계입니다. 북한 김일성,김정일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입니다.
여러분 팔로군이 뭘까요? 팔로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마디로 모택똥이의 팔로 빨갱이 공산군이였습니다. 팔로군은 모택동이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박살이 나자 마침 일어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중국공산군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본래 명칭은 홍군이라 불림)
모택동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것은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더욱이 아시다시피 팔로군은 중국통일후에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6.25때 국군과 연합군을 공격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한국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면 모택동은 독립투사입니다.
이젠 고구려역사를 갖다바치는것도 모자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더니 중국 공산군이 대한민국 독립군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팔로군은 우리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현재 박정희는 간도특설대 출신이란 저서에 대해 박대통령 유족이 고인에 대한 명예홰손으로 고소하여 재판중입니다.)
[간도특설대 1기생 이용씨 증언 "박정희는 간도특설대가 아니다"[세계일보 2006-08-08 07:12] <!-- 끼워넣기 --><!-- 끼워넣기 --> 그런 인물이 강원도 정선의 외진 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육군 소장, 강원도지사, 교통부 차관, 철도청장, 인천제철 사장….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그는 산골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용(李龍·85),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이방인의 방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그였지만, 서울에서 네 시간 남짓 자동차를 몰고온 취재팀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이렇게 6월 중순과 하순 취재팀은 두 차례 그를 방문했고, 다시 두 차례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와의 대화는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이자 ‘역사 탐사’였다.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이력’이 있었다. 해방 전 이력, 구체적으로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1932∼45년)에서의 행적이었다. ‘간도특설대’(1938∼45년). 바로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 부대로,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부대 1기생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1938년 지원 당시 그의 나이 17세.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조선인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동기는 ‘순수’했는지 몰라도 군인이 된 그는 항일독립군과 싸우며 일제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됐다. 그렇게 만주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틀 속에서 출세를 도모했던 이들은 많다. 육참총장, 합참의장, 교통장관을 지낸 백선엽(87·간도특설대 출신)씨도 그 중 한 명이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휩싸여 있다.
대다수는 ‘옛일’을 속이거나 끝내 덮어둔 채 이미 세상을 떴다. 몇 안 되는 산 자들도 열이면 열 입을 다무는 현실이다. 그 시절의 선택과 행동이 떳떳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일까. 백씨도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 “골치 아프게 왜 옛날 일 갖고 그러느냐”며 끝내 만남을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이씨는 달랐다. 그 시절의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했다”(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석범 회고·1987년 ‘만주국군지’)는 따위의 모순된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 시절을 고백했다. 그는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를 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그는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라”며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과는 과대로 밝히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느냐”는 말에 “사실대로 밝히고 후세에 전해야지”라고 답했다. 이 같은 관점이 고백의 배경인 듯했다.
그는 다만 재중동포(조선족) 사회에서 간도특설대의 만행으로 전해지는 부녀자 성폭행,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군기가 엄한 부대로, 민폐는커녕 오히려 도와준 일이 많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분은 만주 보병 8단(團)”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비밀광복군 활동설에 대해서도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대에 있었나.
“아니다. 없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44년쯤 베이징 부근에서다. 각각 팔로군 토벌작전 중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안투 명월구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자주 왔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분은 만주군 제8단 소속으로 활동영역이 달랐다. 간도특설대는 열하로 옮기기 전 백두산 밑 안투현에서 토벌을 했다. 토벌 대상은 김일성 부대였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건 거짓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나.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때 내가 그 부근(베이징)에 있었으니까.”
―간도특설대 창설 목적은 알았나.
“몰랐다. 한국 사람들로 이뤄진 군대라고 해서 갔다.”
―간도특설대에 죽 있었나.
“1938년 이등병으로 들어갔다가 42년 봉천(지금의 선양) 육군훈련학교에 들어가 44년 졸업하고 소대장(소위)으로 진급했다.”
―육군훈련학교에 다니는 동안 간도특설대를 떠나 있었던건데, 그 기간에 박정희가 왔으면 몰랐을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분은 8단에 있었다.”
―해방 후 행로는.
“해방되자마자 남한으로 왔다가 46년 4월쯤 다시 만주로 갔다. (왜 돌아갔나) 뭐, 고향이 거기니까. 모친도 거기 있었다. 그러다 남한 갔다 왔다고 해서 붙잡혀 옌지감옥에 갇혔다. 4개월쯤 살다가 노역장에 장작 패러 불려나갔을 때 탈출했다. 튀어본 사람이나 알지, 담을 넘어서 한 100m까지가 아주 무섭다.” -기사끝-]
⑥ 변신의 달인 박정희는 한때 빨갱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하죠.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빨갱이라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설사 활동을 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사람을 배신자, 기회주의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대로 남로당에 남아서 공산당 활동을 계속 했었어야 된다는 얘기일까요?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어디 소속들이길래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빨갱이들은 무슨 신이라도 된답니까? 박정희 본인의 증언도 무시하고 저들은 박정희를 수사한 수사관이 빨갱이 같다고 했다는 겁니다. 생각해 봅시다 수사관의 입장에선 당연히 도둑이라고 해서 잡아왔는데 그럼 도둑으로 의심하지 변호사처럼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겠습니까? 박정희 보다 더 높은 사람도 조금이라도 걸리면 공산당이라 숙청됐는데 재산도 별로 없는 박정희가 어떻게 뇌물이나 주고 죄를 뺐겠습니까? 진짜 빨갱이였다면 어떻게 살아 남았겠습니까? 진보좌익들은 형인 박상희가 빨갱이로 죽었으니 동생 박정희가 복수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빨갱이가 됐다고 합니다.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지 저들이 어떻게 해서 당사자 보다 더 잘 안다는 건지? 실소만 나올 뿐입니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 대통령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을 운운하는데 어쨌든 창씨개명으로는 친일파의 기준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완전 아전인수격 입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만주군이나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군대지휘관 이라 함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다면 임무를 잘 수행해 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가진 모둔 나라는 군지휘관 양성 전문 군사학교를 건립 운영하는 겁니다.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선 지휘관의 판단 하나가 전 부대원의 생명을 좌지우지 합니다. 광복후 일본군대나 만주군대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수 없습니다.
독립군 출신들이 그자리를 전부 채울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당시 현실은 제대로 배운 사람들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시절이였습니다. 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일본군 고급장교 출신들이 고위층 장성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출신입니다.
북괴가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과 치정관계 내연녀였던 무용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친일파 청산 작업은 공작이며 음모였다
-북한 고위간부 중요 명단 -
부주석 김영주 -만주군 통역 (김일성 동생, 김정일 작은아버지) 북조선 공군 총사령관 이활 - 나고야 항공병학교출신 -허민군 9사단장
-강치우 기술부사단장
-김기옥 제1연대장 -김한욱 제2연대장 -북한공군간부 20명은대부분 일본제국군출신, 10명 만군(만주군) 출신
-장헌근 사법부장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남로당 2인자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군은 문화선정성 부부상 :일본군 밀정
-김정제 보위성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북한이 처단한 친일파 명단
1)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및 그 추종자들: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의 간디 조만식> 선생을 처형시킨 죄목은 [친일 반민족주의자] 이다. 2)현준혁 ; 일제에 저항하던 사회주의 문학자, 김일성 보다 월등 뛰어난 지식으로 자신을 압도하자 [친일 분자] 로 몰아 처형
3)오산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는 3.1 운동때 기독교 대표이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다. 남강 이승훈선생 역시 말이 필요 없는 항일운동가. 항시 학생들에게 "공부열심히 해서 일본놈을 앞지르라 그래서 독립을 쟁취하라"하신 애국자 이시고, 수차례 옥고를 치루신 분이다. 김일성이 붙인 죄명은 [친일파 학교]
4)대성학교 출신들; 평양의 대성학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이다. 이학교 출신들이 김일성 보다 명망이 크자 모조리 처형하면서 붙인 이름이 역시 [반민족주의 학교]
6)박헌영, 이강국, 임화 등; 잘알다 싶이 남로당 이다. 모두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죄가 [친일파. 섹터주의자. 회색분자.]
7)허가이 일파; 김일성보다 좀 유식하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 정통 이론가 이다. 하여간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 꼴을 못보는 김일성이 사형시키면서 씌운 죄가 가당치 않게스리 [미국 간첩] 모스크바 유학간놈이 미국 간첩이라니 김일성도 참 ...
8)윤공흠 일파: 사건이 크다. "당은 인민을 위해 한것이 무엇인가?" 하고 과감하게 김일성에게 대든 당시 "경공업 상(장관)"이다.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친일파]
9)김무정 일파. 중국 팔로군 포병 사령관이었던 무정을 죽이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미국 간첩, 친일파] 일본군과 만주에서 죽어라고 전투한 사람에게 붙인 죄가 친일파입니다
김일성, 친일 인텔리도 간부로 등용했다 北 에 기록,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통역경력" [2005-09-16 12:48]
▲ 중강지질탐사대 노동자들을 지도하는 김일성 1948년 북한 정권수립 이후 친일 경력자와 인텔리, 일본인 상당수가 정권기관과 경제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북한 역사서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면서 남한 일부에서 제기해온 '북한은 완전한 친일청산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됐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조선전사』 현대편(23편) '민주건설사 1'에 의하면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중략),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전사』는 김일성이 당시 과학자, 기술자, 문화예술인 등의 인텔리들을 인민정권기관과 중요 산업 기업소들의 책임적 지위와 그리고 교육, 문화, 보건 기관들의 중요 부서에서 일하도록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
또 이 역사서는 “지난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일제기관에 복무한 데로부터 자신들에게 적지 않게 남아있는 부르죠아 사상을 뿌리뽑고, (중략) 맡겨진 혁명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해나갔다”며 인텔리들의 북한 사회에 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친일 경력을 가지고도 북한의 정권 중심부에 진출한 인물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권력 핵심을 장악했던 인물로는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 (金英柱)가 대표적이다. 김영주는 만주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해방 이후부터 70년대까지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행세해왔다.
▲ 김일성 동생 김영주 독립운동가 이용상 시인은 자신의 회고 글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장교 자격으로 항복한 일본군을 만났을 때 일본군 통역인 김영주를 만났고, 두 사람이 함께 중국군 부대에서 기거했다”고 증언했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등 고위탈북자들은 “김영주가 중국 본토에 갔다가 관동군에 체포된 것은 사실"이라며 “북한 내부에서는 김영주가 어쩔 수 없이 이용당했다는 논리를 쓰면서도 관동군 복무사실은 철저히 숨겼다”고 말했다.
친일경력 김영주, 20년간 북한의 2인자로 군림 그는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일행위는 비밀에 붙여진 채 57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시작으로 권력 요직을 거치면서 7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에 이어 실질적 2인자 역할을 했다.
북한이 1948년 채택한 헌법에 따라 구성된 초대 내각 사법상에 임명된 이승엽은 전향 친일자 교육을 담당했던 대화숙(大和塾) 출신으로 인천양곡조합 간부를 역임했다.
친일파 건국 관련자료를 집필한 김원률씨는 “여러 사료를 통해 이승엽의 친일행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승엽은 남로당 2인자로 남로당 중앙위원과 경기도당 위원장을 거쳐 48년 월북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서울시 인민위원장 직책을 가졌다.
이승엽은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서 활동하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간부로 활동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전향과 친일 행적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도 일제 강점기 시절 관료로 일정한 직위에 복무한 것만으로 친일인사로 등록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의 기준에서 보면 친일행위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 1981년 출판된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사전편찬위가 지난달 발표한 친일 인사 3090명의 명단에는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과 이름이 일치하는 경우가 42명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5명은 동일 인물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지만, 나머지는 동일인 여부가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 당시 조작된 남한 출신 대의원 360명이 포함돼 있어 친일 여부에 대한 검증을 확실히 거치지 않은 채 명단이 작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경제관련 인재 등용에서 김일성은 남한보다 더 실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김일성은 일본인과 일본기업에 종사한 기술자들을 우대했다. 남한의 미군정이 일본인 기술자를 대부분 일본으로 추방한 데 반해, 북한에서는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6,70년대 남한 경제개발의 주역이었던 오원철 전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의 증언과 관련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었던 그는 북한의 경제건설과 관련, 매주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보고와 중요자료를 받았다.
오 전수석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당시 868명이었다. 이들 가족까지 합하면 2,095명이다.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4,000원,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에게는 생명과 재산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오원철 저 제7권) 일본인 기술자에게 '노동영웅' 칭호, 특별대우 오 전수석은 "북한 당국은 1946년 흥남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일본인 기술자 코 지치로(昆吉郞)씨를 '노동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도 울산석유화학의 폴리프로필렌 공장건설 때 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은 1949년 실시한 ‘2개년 계획’의 경제 목표를 1944년도의 생산 수준까지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상황이어서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했다는 지적이다.
오 전수석은 “미군정은 일본의 기술을 무시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소련은 일본인이 운영한 공장과 기술진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면서 “김일성도 일본인과 이에 협력한 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 기관이 완비되기 이전, 해방 직후에는 상황이 달랐다. 1945년부터 1946년 초까지 해방 이후 소련 군정이 들어선 기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급투쟁이 급진적으로 진행됐다. 일제 시대 지주, 공직자, 공장 간부, 친일 부역자뿐 아니라 재산을 소유하거나 일정한 직위를 가진 인사, 인텔리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탄압을 받았다.
이후 1946년 3월 토지 개혁과 국유화, 선거를 거치면서 일제 강점기 토지와 재산, 공직을 가졌던 인사 대부분이 각종 권리와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 과정에서 절대 다수가 남한으로 내려왔다.
황장엽 전 비서에 따르면 실제 북한은 건국 이후 친일 청산을 할 것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가 1948년 따르면 황해도의 각급 인민위원회의 구성만 보아도 노동자 농민이 83%, 사무
역사바로알기 - 박정희에 대한 친일행적논란에 대한 종지부
--박정희 친일왜곡의 진상 및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
먼저 노사모 위시해서 국내외 진보좌익 세력들이 인터넷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대통령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차기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박근혜대표의 아버지)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진보좌익과 보수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이나 지하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공무원 및 그시대 언론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 학자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전부 일제 식민지 지배에 큰건 작건 협력한 게 아니냐? (일제가 철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탈을 많이 해갔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그럼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인가요?)
그당시 반체제 지하활동을 빼고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그어떤 사회생활을 조선땅에서 공식적으로 할수가 있을까요
아예 시골에서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는가?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독립투사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보라 박정희는 이렇게 살지 않고 만주군이 됐으니깐 '친일파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 비난하는 당사자들이 그때 박정희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으면 모두 목숨을 당연히 내걸고 독립투사로 나서 일제와 싸웠을까?하는 의문을 낳을 뿐입니다.
진짜 나쁜 놈은 저렇게 훌륭한 삶을 산 위인을 두고 나보다 훌륭한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업적을 숨기고 악의적으로 모함하고 음해를 하는 세력들입니다.
박 대통령은 위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모셨고 후세가 마땅히 본 받아야 된다며 사당을 짓고 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언제 그런 분들을 홀대하고 푸대접한 적이 있습니까?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북괴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자신의 과거경력을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승곤(92)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비밀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세계일보-]
역사적으로 본다면 일제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했으며 군사적으론 공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세력이기 때문에 진보좌익들과는 원래부터 철천지 원수가 아닐수 없습니다.
빨갱이들이 못 마땅할지라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일제와 대립하고 투쟁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입장에선 진짜 독립운동가들이 아닙니다.
저런 인물들한테 독립투사라고 훈장을 준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대한민국의 이념으론 이해할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진보좌익들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 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바로 성장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첫번째 형태이며. 공산주의는 여기서 더 발전된 더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라 규정함.)
왜냐면 우리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이어받는다"라고 명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임시정부는 절대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평화적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반공의 정신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합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공산주의자 집단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이 목적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제일의 목적이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이념화 되어 민족이란 이름으로 포용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김구 선생님과 함께 상해 임시 정부는..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그 활동을 돕는 자는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임정에서 축출하였으며,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한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상해 임정에는 성재 이동휘란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임정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입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군자금이 부족하여 활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동휘는 이들에게 몰래 임정의 자금을 지원 하였습니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임시정부는 이동휘 국무총리를 해임 조치를 하였습니다.)
그당시에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청년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합니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박정희는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청소년시절부터 군사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소 일본에 대해 자꾸 반항적인 성향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정희에 대하여 경찰,행정,학교를 장악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억압이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박정희에게 배운 이영태는 이낙선(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 ‘박정희’ 79쪽)}
[ 교사시절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평소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정순옥씨의 증언입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벌주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하여 살렸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어요.
그리고 언젠가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주영배씨의 증언입니다.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전경숙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세계일보 "만주군 박정희를 보는 시각" 발췌-]
가까운 거리에서 박대통령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김종신씨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간단하게 "왜놈들 하도 심하게 굴어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사학에 대한 공부욕구와 말단 교사로서 현장에서 당하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과 위협이 문경에서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가 힘들어서 무상 대학급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박정희의 민족감정은 부추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시절1기생 이기건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발췌: 권장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군인은 소위 이상 경찰은 경사 이상 관료는 고등문관 이상으로 대상을 제한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박정희 대통령(소위)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고발]
일제 패망과 함께 김일성은 소련군을 등에 업고 소련군 대위로 평양에 입성하여 38선 이북을 장악하였다.
곧바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은 헤알리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명을 앗아 갔으며 골 깊은 민족 간의 갈등을 유발하였다.
전후 김일성은 중공군의 참전 댓 가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절반을 중국에게 헌납하였다.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일성, 김정일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으며 얼빠진 인간들은 보란 듯이 혁명열사 능을 참배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는 6.25동란 당시 북한의 부수상을 역임한 1급 전범이다.
좌파들은 박정희대통령의 현존하는 기념물을 없애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 민족의 원흉 홍명희의 생가를 복원하려는 천인공노할 음모까지 꾸미고 있다.
여운형은 일제 말(1943년) 수차에 걸쳐 일제의 학병지원을 독려한 당시의 신문기사가 발견되었다. 또한 일제에 전향서를 제출하고 황국식민서사를 한 명백한 친일파이자 남한 내 공산주의의 거두였다. 이런 여운형에게 노무현 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2005년 3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김지태는 일제시대에 가장 악명 높은 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로부터 불하받은 2만평의 땅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으킨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이다.
동양척식회사로부터 특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일본의 주구노릇에 충실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제 말에는 군수공장을 운영하여 일제에 협력하였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부일장학회의 부일이라는 뜻은 일본을 부강하게 하자는 설도 있다.
노무현대통령은 중. 고등학교 시절에 김지태가 만든 부일장학금을 받았고 변호사 시절에는 당시 100억 원이 넘는 김지태의 상속세 관련 변호를 맡아 승소.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조세전문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사명단에서 친일파의 거두 김지태를 왜 제외시켰는지 궁금하다.
또 민족문제연구소의 논리대로라면 민족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여 긁어모은 친일파의 더러운 돈으로 공부하고 친일파를 변호하여 재산을 축적한 노무현대통령도 마땅히 친일인사 명단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열우당 의원 부친들의 일제시대 행적-
1. 김근태 의장의 부친은 일제시대에 훈도였다.(당시 훈도는 군수 월급과 맞먹었으며 권한도 대단하였다)
2. 김희선의원의 부친 김일련(가나이 에이이치)은 만주경찰 특무로 독립군을 수도 없이 색출하여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3. 이미경의원의 부친 이봉권은 일본군의 핵심 사찰요원인 황군 헌병오장으로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4. 신기남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시게미쓰 구니오)도 헌병 오장으로 군림하며 독립군 색출과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5. 정동영 전 의장의 부친은 착취와 수탈의 최 일선 기관인 조선식산은행 산하 금융조합서기로 5년간 근무하였으며 6.25동란 당시의 행적도 불분명하다.
6. 유시민장관의 백부는 면장이었고 부친은 훈도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열우당의원들과 좌파들은 사실적 자료와 명백한 친일근거에도 불구하고 친일인사명단에서 모두 제외되었다.
북한의 8월9일자 로동신문에서는 남조선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진호라는 사람이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극구 찬양했다는 내용을 인용 보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북좌파라는 사실적 표현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하여 지난 3월3일 애국인사 8인을 민형사상으로 고소하여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대한민국의 공안당국은 민족문제연구소 김진호라는 사람의 실체를 밝히고 이적행위에 대하여 당장 수사를 착수해야 될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북한 로동신문의 기사에 대하여 왜 한마디 반박도 못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가 없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묻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북좌파가 아니라면 북한의 로동신문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야 되는 것이 아니던가?
지난 2000년 11월5일에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동당, 서총련, 인터넷대자보, 홍익대 민주동문회가 주동이 되어 문래공원 내 박정희대통령 흉상을 끌어내린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은 박정희대통령이 청산과 극복의 대상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 했고 이날의 광란을 주도한 곽태영은 2005년 4월19일 4.19묘지에서 박근혜대표의 화환을 짓밟은 장본인이다.
곽태영은 일제시대 자신의 창씨개명 사실을 아직까지도 숨기며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는 파렴치한 위선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강만길, 이영희, 강정구 등 친북인사들의 소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 대한 친북좌파라는 표현이 명예훼손이라는 억측으로 코메디를 연출하고 있다.
눈만 뜨면 역사청산과 민족공조를 부르짖는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김일성, 여운형 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궁색한 변명으로 면죄부를 주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공교롭게도 노무현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북한정권이 부르짖는 역사청산과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은 거의 일치한다.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무현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 그리고 북한의 김정일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박정희 죽이기에 골몰하는지 그 깊은 속내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은 통치기간동안 북한의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제압하고 감언이설에 능한 친북 진보좌파들의 망상을 보기 좋게 깨부쉈으며 북한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막강한 대한민국을 건설하셨다.
지금 북한의 김정일과 친북좌파들이 대한민국을 장악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박정희대통령과 미국이다.
그들에게 박정희대통령과 미국은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북한 김정일의 논리를 가장 충실하게 이행하는 전위대에 불과할 뿐이다.-박정희바로알리기국민모임 김동주 대표-
먼저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진보좌익들은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과 문헌 사료를 북한 김정일과 남한의 친북좌경세력 특히 친노방송과 언론들이 샅샅히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말로 지어내 둘러대는 것이 바로 연변학계,연변자료 어쩌구 하면서 공갈치는 것입니다. 말이 학계이지 그들은 완전 북한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③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대통령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대통령이 소학교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신념을 가지고 한 민족교육 및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이기청씨가 밝힌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격 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요?.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이런 글에서는 박정희가 "요시"하며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군으로 근무할 그당시 소속부대의 작전지역에는 독립군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 요즈음의 이름은 청더 (承德,승덕)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한홍구는 박정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욕을 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지금 노무현이 만든 과거사위에서 맹렬히 활동중.)
........ 중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국내외 진보좌익 세력들이 현재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항일세력 및 항일군대 운운하며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마치 조선의 독립투쟁과 관계있는 세력처럼 교묘히 속이는 조작에 관한 설명을 드립니다.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근무할 1944년 당시에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같은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이 그들로썬 참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합니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의 항일사료를 어쩌구하면서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그쪽은 완전 친북학계입니다. 북한 김일성,김정일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입니다.
여러분 팔로군이 뭘까요? 팔로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마디로 모택똥이의 팔로 빨갱이 공산군이였습니다. 팔로군은 모택동이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박살이 나자 마침 일어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중국공산군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본래 명칭은 홍군이라 불림)
모택동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것은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더욱이 아시다시피 팔로군은 중국통일후에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6.25때 국군과 연합군을 공격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한국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면 모택동은 독립투사입니다.
이젠 고구려역사를 갖다바치는것도 모자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더니 중국 공산군이 대한민국 독립군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팔로군은 우리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독립투사들조차 공격해서 상당수를 죽여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조선의 해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전 세계 공산화를 지향하는 공산주의 그들만의 혁명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현재 박정희는 간도특설대 출신이란 저서에 대해 박대통령 유족이 고인에 대한 명예홰손으로 고소하여 재판중입니다.)
[간도특설대 1기생 이용씨 증언 "박정희는 간도특설대가 아니다"[세계일보 2006-08-08 07:12] <!-- 끼워넣기 --><!-- 끼워넣기 -->
그런 인물이 강원도 정선의 외진 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육군 소장, 강원도지사, 교통부 차관, 철도청장, 인천제철 사장….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그는 산골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용(李龍·85),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이방인의 방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그였지만, 서울에서 네 시간 남짓 자동차를 몰고온 취재팀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이렇게 6월 중순과 하순 취재팀은 두 차례 그를 방문했고, 다시 두 차례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와의 대화는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이자 ‘역사 탐사’였다.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이력’이 있었다. 해방 전 이력, 구체적으로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1932∼45년)에서의 행적이었다. ‘간도특설대’(1938∼45년). 바로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 부대로,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부대 1기생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1938년 지원 당시 그의 나이 17세.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조선인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동기는 ‘순수’했는지 몰라도 군인이 된 그는 항일독립군과 싸우며 일제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됐다. 그렇게 만주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틀 속에서 출세를 도모했던 이들은 많다. 육참총장, 합참의장, 교통장관을 지낸 백선엽(87·간도특설대 출신)씨도 그 중 한 명이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휩싸여 있다.
대다수는 ‘옛일’을 속이거나 끝내 덮어둔 채 이미 세상을 떴다. 몇 안 되는 산 자들도 열이면 열 입을 다무는 현실이다. 그 시절의 선택과 행동이 떳떳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일까. 백씨도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 “골치 아프게 왜 옛날 일 갖고 그러느냐”며 끝내 만남을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이씨는 달랐다. 그 시절의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했다”(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석범 회고·1987년 ‘만주국군지’)는 따위의 모순된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 시절을 고백했다. 그는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를 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그는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라”며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과는 과대로 밝히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느냐”는 말에 “사실대로 밝히고 후세에 전해야지”라고 답했다. 이 같은 관점이 고백의 배경인 듯했다.
그는 다만 재중동포(조선족) 사회에서 간도특설대의 만행으로 전해지는 부녀자 성폭행,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군기가 엄한 부대로, 민폐는커녕 오히려 도와준 일이 많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분은 만주 보병 8단(團)”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비밀광복군 활동설에 대해서도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대에 있었나.
“아니다. 없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44년쯤 베이징 부근에서다. 각각 팔로군 토벌작전 중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안투 명월구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자주 왔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분은 만주군 제8단 소속으로 활동영역이 달랐다. 간도특설대는 열하로 옮기기 전 백두산 밑 안투현에서 토벌을 했다. 토벌 대상은 김일성 부대였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건 거짓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나.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때 내가 그 부근(베이징)에 있었으니까.”
―간도특설대 창설 목적은 알았나.
“몰랐다. 한국 사람들로 이뤄진 군대라고 해서 갔다.”
―간도특설대에 죽 있었나.
“1938년 이등병으로 들어갔다가 42년 봉천(지금의 선양) 육군훈련학교에 들어가 44년 졸업하고 소대장(소위)으로 진급했다.”
―육군훈련학교에 다니는 동안 간도특설대를 떠나 있었던건데, 그 기간에 박정희가 왔으면 몰랐을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분은 8단에 있었다.”
―해방 후 행로는.
“해방되자마자 남한으로 왔다가 46년 4월쯤 다시 만주로 갔다. (왜 돌아갔나) 뭐, 고향이 거기니까. 모친도 거기 있었다. 그러다 남한 갔다 왔다고 해서 붙잡혀 옌지감옥에 갇혔다. 4개월쯤 살다가 노역장에 장작 패러 불려나갔을 때 탈출했다. 튀어본 사람이나 알지, 담을 넘어서 한 100m까지가 아주 무섭다.” -기사끝-]
⑥ 변신의 달인 박정희는 한때 빨갱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하죠.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빨갱이라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설사 활동을 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사람을 배신자, 기회주의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대로 남로당에 남아서 공산당 활동을 계속 했었어야 된다는 얘기일까요?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어디 소속들이길래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빨갱이들은 무슨 신이라도 된답니까? 박정희 본인의 증언도 무시하고 저들은 박정희를 수사한 수사관이 빨갱이 같다고 했다는 겁니다. 생각해 봅시다 수사관의 입장에선 당연히 도둑이라고 해서 잡아왔는데 그럼 도둑으로 의심하지 변호사처럼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겠습니까? 박정희 보다 더 높은 사람도 조금이라도 걸리면 공산당이라 숙청됐는데 재산도 별로 없는 박정희가 어떻게 뇌물이나 주고 죄를 뺐겠습니까? 진짜 빨갱이였다면 어떻게 살아 남았겠습니까? 진보좌익들은 형인 박상희가 빨갱이로 죽었으니 동생 박정희가 복수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빨갱이가 됐다고 합니다. 형은 형이고 동생은 동생이지 저들이 어떻게 해서 당사자 보다 더 잘 안다는 건지? 실소만 나올 뿐입니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 대통령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을 운운하는데 어쨌든 창씨개명으로는 친일파의 기준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완전 아전인수격 입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만주군이나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군대지휘관 이라 함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다면 임무를 잘 수행해 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가진 모둔 나라는 군지휘관 양성 전문 군사학교를 건립 운영하는 겁니다.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선 지휘관의 판단 하나가 전 부대원의 생명을 좌지우지 합니다.
광복후 일본군대나 만주군대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수 없습니다.
독립군 출신들이 그자리를 전부 채울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당시 현실은 제대로 배운 사람들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시절이였습니다.
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일본군 고급장교 출신들이 고위층 장성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출신입니다.
북괴가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과 치정관계 내연녀였던 무용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친일파 청산 작업은 공작이며 음모였다
-북한 고위간부 중요 명단 -
부주석 김영주 -만주군 통역 (김일성 동생, 김정일 작은아버지)
북조선 공군 총사령관 이활 - 나고야 항공병학교출신
-허민군 9사단장
-강치우 기술부사단장
-김기옥 제1연대장
-김한욱 제2연대장
-북한공군간부 20명은대부분 일본제국군출신, 10명 만군(만주군) 출신
-장헌근 사법부장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남로당 2인자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군은 문화선정성 부부상 :일본군 밀정
-김정제 보위성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북한이 처단한 친일파 명단
1)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및 그 추종자들: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의 간디 조만식> 선생을 처형시킨 죄목은 [친일 반민족주의자] 이다.
2)현준혁 ;
일제에 저항하던 사회주의 문학자, 김일성 보다 월등 뛰어난 지식으로 자신을 압도하자 [친일 분자] 로 몰아 처형
3)오산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는 3.1 운동때 기독교 대표이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다.
남강 이승훈선생 역시 말이 필요 없는 항일운동가.
항시 학생들에게 "공부열심히 해서 일본놈을 앞지르라 그래서 독립을 쟁취하라"하신 애국자 이시고, 수차례 옥고를 치루신 분이다. 김일성이 붙인 죄명은 [친일파 학교]
4)대성학교 출신들;
평양의 대성학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이다.
이학교 출신들이 김일성 보다 명망이 크자 모조리 처형하면서 붙인 이름이 역시 [반민족주의 학교]
5)숭실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나 대성학교와 같이 이학교 출신들을 무수히 사형시키고. 뒤집어 씌운 죄가 [반민족 친미주의]
6)박헌영, 이강국, 임화 등;
잘알다 싶이 남로당 이다. 모두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죄가 [친일파. 섹터주의자. 회색분자.]
7)허가이 일파; 김일성보다 좀 유식하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 정통 이론가 이다. 하여간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 꼴을 못보는 김일성이 사형시키면서 씌운 죄가 가당치 않게스리 [미국 간첩] 모스크바 유학간놈이 미국 간첩이라니 김일성도 참 ...
8)윤공흠 일파:
사건이 크다. "당은 인민을 위해 한것이 무엇인가?" 하고 과감하게 김일성에게 대든 당시 "경공업 상(장관)"이다.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친일파]
9)김무정 일파.
중국 팔로군 포병 사령관이었던 무정을 죽이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미국 간첩, 친일파] 일본군과 만주에서 죽어라고 전투한 사람에게 붙인 죄가 친일파입니다
김일성, 친일 인텔리도 간부로 등용했다
北 에 기록,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통역경력"
[2005-09-16 12:48]
▲ 중강지질탐사대 노동자들을 지도하는 김일성
1948년 북한 정권수립 이후 친일 경력자와 인텔리, 일본인 상당수가 정권기관과 경제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북한 역사서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면서 남한 일부에서 제기해온 '북한은 완전한 친일청산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됐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조선전사』 현대편(23편) '민주건설사 1'에 의하면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중략),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전사』는 김일성이 당시 과학자, 기술자, 문화예술인 등의 인텔리들을 인민정권기관과 중요 산업 기업소들의 책임적 지위와 그리고 교육, 문화, 보건 기관들의 중요 부서에서 일하도록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
또 이 역사서는 “지난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일제기관에 복무한 데로부터 자신들에게 적지 않게 남아있는 부르죠아 사상을 뿌리뽑고, (중략) 맡겨진 혁명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해나갔다”며 인텔리들의 북한 사회에 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친일 경력을 가지고도 북한의 정권 중심부에 진출한 인물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권력 핵심을 장악했던 인물로는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 (金英柱)가 대표적이다. 김영주는 만주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해방 이후부터 70년대까지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행세해왔다.
▲ 김일성 동생 김영주
독립운동가 이용상 시인은 자신의 회고 글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장교 자격으로 항복한 일본군을 만났을 때 일본군 통역인 김영주를 만났고, 두 사람이 함께 중국군 부대에서 기거했다”고 증언했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등 고위탈북자들은 “김영주가 중국 본토에 갔다가 관동군에 체포된 것은 사실"이라며 “북한 내부에서는 김영주가 어쩔 수 없이 이용당했다는 논리를 쓰면서도 관동군 복무사실은 철저히 숨겼다”고 말했다.
친일경력 김영주, 20년간 북한의 2인자로 군림
그는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일행위는 비밀에 붙여진 채 57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시작으로 권력 요직을 거치면서 7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에 이어 실질적 2인자 역할을 했다.
북한이 1948년 채택한 헌법에 따라 구성된 초대 내각 사법상에 임명된 이승엽은 전향 친일자 교육을 담당했던 대화숙(大和塾) 출신으로 인천양곡조합 간부를 역임했다.
친일파 건국 관련자료를 집필한 김원률씨는 “여러 사료를 통해 이승엽의 친일행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승엽은 남로당 2인자로 남로당 중앙위원과 경기도당 위원장을 거쳐 48년 월북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서울시 인민위원장 직책을 가졌다.
이승엽은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서 활동하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간부로 활동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전향과 친일 행적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도 일제 강점기 시절 관료로 일정한 직위에 복무한 것만으로 친일인사로 등록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의 기준에서 보면 친일행위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 1981년 출판된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사전편찬위가 지난달 발표한 친일 인사 3090명의 명단에는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과 이름이 일치하는 경우가 42명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5명은 동일 인물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지만, 나머지는 동일인 여부가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 당시 조작된 남한 출신 대의원 360명이 포함돼 있어 친일 여부에 대한 검증을 확실히 거치지 않은 채 명단이 작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경제관련 인재 등용에서 김일성은 남한보다 더 실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김일성은 일본인과 일본기업에 종사한 기술자들을 우대했다.
남한의 미군정이 일본인 기술자를 대부분 일본으로 추방한 데 반해, 북한에서는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6,70년대 남한 경제개발의 주역이었던 오원철 전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의 증언과 관련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었던 그는 북한의 경제건설과 관련, 매주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보고와 중요자료를 받았다.
오 전수석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당시 868명이었다. 이들 가족까지 합하면 2,095명이다.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4,000원,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에게는 생명과 재산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오원철 저 제7권)
일본인 기술자에게 '노동영웅' 칭호, 특별대우
오 전수석은 "북한 당국은 1946년 흥남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일본인 기술자 코 지치로(昆吉郞)씨를 '노동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도 울산석유화학의 폴리프로필렌 공장건설 때 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은 1949년 실시한 ‘2개년 계획’의 경제 목표를 1944년도의 생산 수준까지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상황이어서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했다는 지적이다.
오 전수석은 “미군정은 일본의 기술을 무시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소련은 일본인이 운영한 공장과 기술진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면서 “김일성도 일본인과 이에 협력한 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 기관이 완비되기 이전, 해방 직후에는 상황이 달랐다. 1945년부터 1946년 초까지 해방 이후 소련 군정이 들어선 기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급투쟁이 급진적으로 진행됐다. 일제 시대 지주, 공직자, 공장 간부, 친일 부역자뿐 아니라 재산을 소유하거나 일정한 직위를 가진 인사, 인텔리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탄압을 받았다.
이후 1946년 3월 토지 개혁과 국유화, 선거를 거치면서 일제 강점기 토지와 재산, 공직을 가졌던 인사 대부분이 각종 권리와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 과정에서 절대 다수가 남한으로 내려왔다.
황장엽 전 비서에 따르면 실제 북한은 건국 이후 친일 청산을 할 것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가 1948년 따르면 황해도의 각급 인민위원회의 구성만 보아도 노동자 농민이 83%, 사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