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잠깐 정리하고 넘어갈까요?

김창규2009.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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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끝나지 않은 좌우 갈등에 관한 소고

2009.6.22.월요일

울컥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달리다 보니... 묘한 상념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늘어놓을 다소 긴 이야기는 한국의 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 이들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따로 공부하지 않고, 공교육이나 매체로만 현대사를 대한 이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이리라.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정도랄까.

을 이라 불러야 맞다는 설이 있다. 언뜻 별 차이 없어 보이는 두 용어는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두 시각을 대변한다.

이는 전쟁의 성격을 어찌 보느냐, 전쟁 발발의 시기를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갈린다.

 

 


1950년 6월 25일에 콰콰쾅, 시작되었다고 전쟁의 발발 시점을 그날로 명시한 시각이 이다. 이 시각은 이때의 전쟁을 '북한의 남침,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위한 침략 전쟁'으로 규정한다.

 

 


그에 반해, 은 해방공간(1945년-1950년)의 5년 중, 일부 시기를 전쟁 기간에 포함시킨다. 이 시각은 이 전쟁을 '좌우대립의 내란'으로 본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전쟁 이후 태어난 세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현대사 중, 일제 말기의 국내 상황은 거의 공백기다. 중고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질 않고 시험문제에도 나오지 않으니 교육 과정을 마친 이들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대해 잘 모른다. 당시, 국내에 친일파가 득세했다 정도가 기억된달까?

 

 



그렇다면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국내에 계셨던 우리 윗세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일제와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쥐죽은 듯 노예 생활을 감내하기만 했을까?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해가 1931년이다. 그 후 패망할 때까지 공출, 강제연행, 징집, 학도지원병, 정신대 등의 만행을 조선 땅에 저질렀다. 친일파들이 이때 기승을 부렸다. 박 모씨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게 이 시기이고, 이광수ㆍ최남선ㆍ백철ㆍ김동환ㆍ모윤숙ㆍ서정주ㆍ주요한 등이 친일문학을 한 게 이즈음이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는 역사가 과연 없었을까? 1930년대 초중반, 농민운동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른다. 이 시기의 항일무장투쟁이 얼마나 거셌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이 당시의 '국내' 항일운동은 제대로 가르치질 않을까?

 

 



사실은... 가르칠 수가 없는 거다. 싸운 자는 언제나처럼 소수였고 그들은 대부분 대한민국 정권이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인정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이들이라서.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한 이후, 1950년까지를 흔히 '해방공간' 내지 '해방정국'이라 부른다. 중고교를 경험한 이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이 시기는 시험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입시를 위해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몇 개의 굵직한 사건만 알고 있으면 입시 준비 끝인 시기이니. 이 당시를 이성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해방정국 당시 20대를 보낸 이들도 지금은 무덤 속에 있거나 8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이미 대중적으로는 잊힌, 잊히도록 강요된 역사가 되고 만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 5월에 성립되었다. 1945년의 해방부터 이때까지 3년여의,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공백이 있다. 잊힌, 잊히도록 강요된 공백이다. 해방 직후 여운형 등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1945년 8월 말, 자생적 인민위원회가 거의 전국을 장악해 치안을 유지했던 사실은 잊힌 역사가 되었다.

 

 


그들이 9월 6일 전국 1000여 명의 인민위원회 대표를 모아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했던 것도 잊힌 역사가 되었다. (친북 빨갱이 용어로 규정되다시피 한 '인민'이라는 용어에 유의하시길. 이 당시의 '인민'은 지금의 '보통 사람' 정도의 용법으로 쓰인 어휘였다.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여운형의 사상적 지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 당시 인민위원회는 여러 사상적 지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연합 조직에 가까웠다. 국내에 남아 있던 항일 세력의 총 결집체라 보면 딱 맞을.)

 

 

 

그리고... 1945년 9월 8일 인천을 통해 '점령군'으로 등장해 인민위원회의 자생적 치안권을 박탈한 미군정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해방군'으로 기억하고 있다. (미군이 점령군이었다는 것은 그들조차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고마운 '해방군'은 가공된 환상일 뿐이다.)

 

 



미군정이 치안유지를 위해 친일파들을 등용하고,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통역꾼'들만을 키웠다는 건 이제 그저 그런 얘기, 당연한 얘기처럼 되어 버렸다. 세상사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처럼. 미군정에 반대한 사람들은 모두 좌익 빨갱이로 둔갑해 버렸다는 것도 굳이 기억치 않으리라. (그들 모두가 좌익인 것은 아니었는데도)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의되고(모두 4개의 안이 결의되었다.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임시정부를 건설한다.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한다), 한반도엔 찬탁과 반탁의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신탁통치. 바로 이것이 해방정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왜냐하면 한반도 전역은 삼상회의 이후부터 단독정부 수립이냐, 통일정부 수립이냐를 놓고 거센 이데올로기 대립의 폭풍우 속으로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통해 이 시기를 배운 이들은 찬탁 진영은 빨갱이, 반탁 진영은 민족주의로 대부분 기억한다. 주입식 교육의 대단한 위력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껏 '역사적 사실'이라 알고 있던 것들의 '이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이때 이미 소련과 미국은 38선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두 국가의 대립이 격화될 한가운데에 불행히도 해방 조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는 남북에 각각 정부가 세워지기 이전이니, 조선이라 하는 것이 맞다)

 

 


이 상태에서 그나마 온전한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결정이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신탁통치는 또 다른 종속이니 즉각적 독립을 주장한다는 반탁은, 어디까지나 분할 점령된 조선의 분단을 당연시하고 2개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말에 다름아닌 것이다.

 

 



좌우의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통일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당시의 찬탁 진영은 통일 세력, 반탁 진영은 반통일 세력이었다 보아야 한달까?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시기의 미군정은 해방군이 아니라 철저히 점령군으로서 행동했다.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빼앗은 일제의 가옥과 토지들을, 그들은 한반도를 점령하자마자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점령군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처사였겠지만. 이를 위해 신한공사라는 회사도 만들어 운영했다. 그들은 일제처럼 공출까지 시작했다. 땅을 빼앗기고 공출까지 당하게 된 농민들은 미군정에 거세게 저항했다.

 

 


그리하여 '대구 폭동'으로 불리게 될 '10월 인민항쟁'이 1946년에 전국적으로 불타올랐다.

그동안 3상회의 결정을 조율하려던 미소공동위는 결국 결렬되었고, 1947년 9월 조선의 문제는 유엔에 상정된다. 이때의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정확히 반대로 알고 있다.

 

 



동아일보가 보도하여 반탁 운동에 일조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은 정확히 반대로 쓴 기사였다.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고,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당시 소련은 조선을 즉시 독립시켜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권이 탄생할 것이라 본 것이고, 미국은 조선의 정세를 소련과는 반대로 파악했던 것이다. 미국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당시의 유엔은 당연히 미국의 손을 들어 주었고, 결국 미국의 뜻대로 남조선만의 단독선거가 열렸다. (이때는 대한민국 성립 이전이니 '남조선'이 맞다.)

 

 

 

다음 해, 제주의 4.3항쟁이 시작되었다. (1948년 4월 3일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까지 지속된 극한의 대립이었다) 1948년 이 해에 여순항쟁이 있었다. 이 항쟁들의 주요 이슈가 바로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정의 폭정에 항거'다.

 

 

 

이처럼, 해방정국 초기부터 시작된 좌우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1950년 6월 25일 이전에도 이미 한반도 이남은 실질적인 내전상태에 처해 있었다 보는 쪽이 으로 이 전쟁을 보는 시각이다.

그리고 1950년의 6월 25일이 온 것이다.

 

 

 

으로 이 전쟁을 보는 시각은 그래서 해방정국부터 노정된 좌우 갈등의 내전으로 이 전쟁을 규정한다. 이 시각을 이해하려면, 지금의 시각이 아니라 그때의 시각을 추측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좌든 우든, 그들은 모두 조선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의 조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은 쪽과, 차라리 조국이 갈라지는 것을 원한 쪽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하나의 조국을 가진 이들이었다. 둘로 갈라진 분단 상태 또한 지금처럼 고착된 상태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인 상황이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모두 80대 이상의 고령자들이나 증명 가능할 이야기겠지만. (45년생 조갑제처럼 해방정국 당시 코흘리개 아이였던 이들의 말은 그래서 이성적인 경험담일 수 없다)

 

 

 

 

 

전쟁은 '정전협정'에 의해 실질적으로 끝이 났지만, 물리적이며 강제적이고 살육과 피눈물을 동반했던 좌우의 갈등은 끝이 나지 않았다. '우'의 입장에서 보면, 물리적으로 삭초제근했음에도 독버섯처럼 피어난 '좌'의 재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시점 대한민국의 '좌'는 해방공간의 그 '좌'가 아니다. 해방공간의 좌익은 이미 실질적으로 거세되었고 대중에게도 잊혀 버린 존재들이다. 대한민국의 '우'가 '좌'라 칭하는 이들은 대부분, 해방공간에서는 중도라 불렸을 사상적 지향을 갖고 있다. 그들 중 누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 말하던가.

 

 

 

그렇지만... 이데올로기를 벗기고 보면, 대한민국의 '좌'는 해방공간의 '좌'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당연한 상식이 일반화되기 원한다는 점에서는. 그 당연함을 안보 논리로 좌익화하고, 빨갱이화하는 것은 언제나 대한민국의 '우'였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 안타까워 추모라도 하고자 순수하게 모인 이들을 경찰력을 동원하여 물리적으로 통제하려 하는 이상, 대한민국은 계속 '좌'가 탄생할 수밖에 없다. 그들 스스로는 전혀 자신을 '좌'라 생각하지 않을 이들마저도.

 

 

 

현재의 '좌우 갈등'은 그래서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그 갈등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분단 조국이 싫다는 당연한 상식 때문에 '좌'가 되어 버린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좌'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우'였다.

이 갈등을 '증오'로 만들어 또 다른 갈등의 폭발을 유도하지 마라. 대한민국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그저 상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 살고 싶을 뿐이다.

신독(kangbika@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