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흔적

원효식200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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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발을 발등에 반쯤 벗긴 채.. 그대로 미끄러지듯 책가방을 한쪽에 밀어 넣고 묵직한 문을 여는 순간

한 낮의 열기가 하루종일 방안에 스며들었는지 후끈한 기운이 한 동안 머리 위로 맴돌았다

 

지친 몸을 내동댕이치듯 책상에 걸터 앉아 몇 차례 긴 호흡을 들이마셨더니 뜨겁게 달구어진 내 몸은

어느샌가 땀방울이 맺히며 이마의 휘어진 곡선을 타고 넥타이를 풀어낸 하얀 셔츠의 목덜미를 축축하게 적셔가고 있었다

 

책상 위엔 몇 일전에 손좀 보겠다고 내동댕이친 낡은 쇠덩어리가 반짝이며 뭔가 신난 일이 일어난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같다

어려운 인연이 닿아 내 손에 머물게 된 클래식 카메라를 위로하듯 만지작 거리며 새로운 감회에 빠져 들곤 했다

 

과연 이 녀석은 얼마나 많은 찰나의 순간을 기록했을까..

1972년 Canon G-3 QL 17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작은 렌즈는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모험가의 눈망울처럼 영롱하게 빛을 냈고

최근 나와 함께 이름 없는 배회지를 떠돌며 순간의 추억을 담아 한 폭의 두루마리를 펼쳐 나갔다

40mm 단렌즈에 투과되어 돌아온 잔상은 나에게 미처 알 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이상하게 낡은 물건을 만지면 뭔가 알 수 없는 묘약에 빠져 버린 것처럼 철부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옛 추억을 더듬게 된다

 

왠지 방안에 가득 채워진 더운 공기에 질식할 듯 숨이 고르지 못한 탓일까..

이 시간의 공기는 마리화나의 뜨거운 안개가 피어오르듯 멈칫 거릴 틈조자 주지 않은 채 금지된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멍하니 렌즈에 투과되는 초점을 바라보다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지긋이 감으니 지난 날의 희미한 기억이 떠오른다

 

시대의 흐름 속에 많은 감정을 받아내며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오랜 친구가 나에게 묵묵히 말을 건네듯.. 한 가닥 둔탁한 셔터음이 경쾌하게 방안에 울려 퍼진다

 

세월이 흘러도 한결같이 추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놀라움에 이 녀석이 경이롭기까지하다

 

문득 나는 무슨 기분이 들어서였는지..

숨을 한번 몰아쉬고 무겁게 내려 앉은 몸을 일으켜 새워 창고로 발길을 돌렸다.

 

먼지가 소복히 쌓인 빛바랜 과일 박스를 뒤져 지난 날의 앨범을 하나씩 들추어 보았다

철없던 시절 막무가내로 찍어 대었던 사진들을 훑어 보며 낯선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뇌리속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생생한 전율처럼

과거의 나는 해맑게 웃으며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재미없는 제스쳐와 함께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내 모습

그래도.. 화려하진 않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가식이 없어 담백했고 무게가 없어 편안한 웃음이었다

 

앞으로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변함 없이 흐를테고...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낡은 유물로 전락해 버린 사진들을 보며

다시 회상에 빠져 제각기 흩어졌던 기억의 조각을 하나씩 맞추어 볼지도 모른다

 

책상 서랍에 넣어둔 하나의 사진을 꺼내 들었다

 

밝게 웃고 있는 너의 모습...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나의 집착은

곧 가득 타오르는 그리움으로 번져나갔다

 

헤어짐과 함께 서로 분명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이젠 제각기 흝어져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고 있을텐데

 

설레임이 가득했던 너의 잔잔한 미소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른 아침 어느 봄날..

날쌔게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던 한 마리 제비가 문득 떠올랐다

  

이러면 안되는데 다시 이 밤은 깊어가고

나의 시간은 샴푸 향기에 취한 듯 너를 향한 채 흘러가고 있었다

 

당신의 시간은 나와 다르게 가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멈출 수 없는 본능은 나에게 다가와 말없이 숨통을 움켜 쥔 채

시계 바늘을 반대로 꺽지 말아달라고 울부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