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및 대중, 그리고 언론에 대한 소고

김수영2009.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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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및 언론, 그리고 대중에 대한 소고

 

 

 

1. 지식인과 언론인

 

i. 시인은 단어로써 현실세계를 제어하는 힘을 갖는다. 반면에 지식인들은 단어와 사상을 곁들여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현자는 글을 쓰지 않아도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고, 시인은 굳이 출판하지 않더라도 시를 쓸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글을 출판하거나, 혹은 작금의 사태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널리 알려야만 한다.

"이성을 대중화하라"는 논제는 두뇌 속의 지식과 언론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따라서 간헐적으로 신문 등에 글을 써올리던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이제 세상을 주관적인 잣대로 재단해내는 전문가가 되었다.

 

ii. 이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위가 곧 정의인 양,

자신의 이념에 대하여 이견이 있는 자들을 무참히 도륙해낸다(이는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정부에 의한 행위라면 합리적인 태도이긴 하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에 약간 뒤쳐진 희생양인 비순응주의자가 누구를 막론하고 깨닫지 못하고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수많은 혁명가와 개혁가, 경제인, 정치인 등 한사람 한사람에 의해 순응주의가 평준화된 세상에서, 지적인척하고 근엄한체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 틀어박혀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은 시대의 흐름에 뒤쳐질 수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반항적인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뭔가 대단해지는 것도 아니다. 정체성조차도 불투명하다.

자신이 알고있을 법한 내용이라면 언제라도 모습을 드러내어 말로써 상대방을 짓밟으며 대중을 이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이 있다. 원형이 아니라하여 비정상, 혹은 미완성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변형된 것은 변형된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언론의 변질. 그리고 대중.

i. 누구나 알고있을법한 내용이지만, 어떠한 사안에 대하여 이를 상징적으로 자신의 코드에 맞게 의미심장한 표현을 하는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는 전문가들.

사실이 아니던 것도 그들의 손에 쥐어지면 순식간에 논리정연한 사실로 둔갑되어 대중을 파고든다.

이처럼 작은 숨결로 거대한 돌풍을 일으킬 수 있는 의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미 일반화된 다소 따분한 이념은 제쳐두고, '현실적 상황'이라는 다소 어색한 영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즉, 어떤 대안이 이 문제를 어떻게 대신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아닌 실제로는 별 것도 아닌 사안이 어떻게 언론의 주목을 벗어나 웃어주기조차 힘들정도로 엉뚱한 내용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라는 자세이다.

 

ii. 수십억의 개별적 인격체들이 만들어낸 (그릇된)지성과, 상상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독특한 생각과 행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으로부터 비롯된 이념이 순진한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것이라 가정한다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불쌍한거다.

여기에서 기인한 시너지효과는 기가막힐 따름이다.

대중역시 그들 각자의 이념 안에서 언론과 지식인들의 단 몇 마디만으로 멋대로 사안을 판단하고 재단해내는 전문가가 되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손을 들어주는 지식인과 언론을 따르며, 결국엔 이념의 대립을 스스로 조장하며 같은 과정의 반복을 일삼다가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신을 붕괴시킨다.

다시말해 언론이란 매체가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세계가 그들의 자아와 정체성을 창조하고, 다시 그 자아와 정체성이 그들의 세계. 즉 그들의 매체를 변화시킨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분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객관적 타당성이 결여된 궤변적 발언은 그 결과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어서, 대중에 의해 심판받고 승자의 논리대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진실이 말도 안되는 논리에 무너져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영부영 방황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떠올려보면 누구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이러한 언론인과 지식인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을 보는 시각'.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독특한 시각은 새롭게 드러나서 잘 모르는 것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우리가 잘 아는 어떤 것에 비교함으로써, 단어와 단어사이의 괴리를 심화시켜 사회적으로 필요한 비현실적인 글을 생산해낸다.

그들이 대중에게 호소할 때 잊지 않는 사실이 있다.

'무엇인가를 줄기차게 말한다면 얻을것이 거의 없다'라는 것이다.

결국, 무엇에 대해서 말하는가, 라는 의문 보다는 어떠한 사안에 대하여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말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그 말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로부터 귀결되는 바가 있다.

누구도 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개인적이거나, 역사적인 체험에서 빌어온 모델들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참고할 따름일 뿐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실제로 찾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자타가 공인하는 입증된 선례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자들의 태도이다.

이들은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외에 다른 방안을 통해서 새로운 것이 드러날 수 있고, 이 새로운 것이 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아예 배제해버린다는 것이다.

 

 

3. 내적 효과

i. 일이 뜻대로 진척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흔히 두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다. 자신들의 정의에 비추었을 때,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건에 대하여 언론들이 입을 다문 채 침묵으로 일관하는것처럼 말이다.

다른 하나는 조심스레 말하는 것이다. 언어라는것은 치장하기 나름이어서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그 실질적 의미는 동일하지만) 선한 의지로 행하여진 행위이더라도 얼마든지 악惡으로 변질될 수 있다.

 

사회적으로 현안이되는 문제를 '나'라는 편협한 시각에서 언급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자신만의 진리를 모두의 진리라 착각하고, 그 감정을 객관적인 시각이라 착각한다면 지식인 혹은 언론인이라는 명성은 그저 허울좋은 가면에 불과할 뿐이다.

(중립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때때로, 하지만 매우 쉽게 부정론자. 혹은 비관론자라고 낙인 찍힌다. 암시했다시피 대중은 언어의 마술사들에게 놀아나고 이렇게 변질되어버리는 대중에게 진심을 담아 '아니오'라는 말을 하는 자들은 중립적 입장에 있는 자들과 비관론자들 뿐이다.)

 

ii. 자고로 사람은 숙적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 또는 범죄를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으나, 반대로 피해자는 그 정도를 부풀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향이 국가 또는 민족과 결부되어있는 사항이라면 자국을 대표할만한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행위를 보다 부각시키기위해 애쓴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데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는 것이다.

 

옹졸하다못해 치졸한 선택이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불리한 결과로 작용하더라도, 혹은 그 공동체의 감정과 상반되더라도 이러한 민족적, 자기중심적인 편견을 이겨내야 한다. 비록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들이나 아군으로부터 멸시와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보장될 앞날과 슬픈 현실사이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있어서는 안된다.

다행인건 지금의 지식인들과 언론들은 이러한 망설임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역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추측컨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불리한 과거의 사실들을 부인하려는 본능적인 경향은, 그 사실들이 우리의 상식에 어긋날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아집 속에서 얻어낸 상황에 의해 다수의 감정을 대변하게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궁지에 몰린 소외계층의 고충을 찾아낼 수 있겠나.

 

 

4. 외적 효과

i.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 원칙을 지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불필요한 희생을 짊어지려하지 않는다.

이에 기인하여 언론 혹은 여론. 또는 다른 지식인들 및 정치인과 그 대변인들과 영향력을 두고 벌이는 ‘세력다툼’에서 이들의 이상형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독단과 독선으로 행태를 결정하는 주체. 박식하면서도 그들의 말에따라 행위가 좌우되는.. 도대체 어찌할 수가 없는 반항자.” 쉽게말해 무지한 대중들이다.

 

ii. 매우 뛰어난 논리적 반론을 펴는 학자들도, 박식함을 자랑하는 진정한 지식인들도, 한 가지 간과하는 결정적인 사실이 있다.

위에서 말한 이러한 한 집단을 결속시켜 유대감을 형성시키는 것은 과학적, 논증적, 논리적인 근거가 아닌 “믿음”이다(#콩트 ; Aguste Comte).

분열되거나 일종의 패닉상태에 빠진 사회에서 최우선적으로 필요시되는 것은 ‘집단정신’이다. 이해관계(이념)등의 차이로 매순간마다 정체성을 잃고 멧돼지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의 우발적인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스스로의 의지로 하여금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통합된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은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강제되지 않더라도 그들 스스로 자신의 손을 들어주고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기관을 찾고, 이들이 대변해주는 말과 행동의 신뢰로써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iii. 겉으로 비판만하고 훈계만 늘어놓는 모습은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사태의 자총지총은 업신여기고 이런저런 궤변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현실에 맞게 행동하라는 것은 무리라 본다.

또한 저런 궤변론자들 즉, 자신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인하여 대중의 시선을 끌 수 있을 때에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대안이나 조언을 바란다는 것 역시 무리이다.

지식인이길 자처하는 사람들. 저널리즘으로 똘똘뭉친 매체로 불리길 원하는 언론들. 이러한 그들 나름의 투철한 “저항행위”가 이제는 그들이 말하는 저항의 실질적 의미를 쫓기보다는 대중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쫓고있기 때문이다.

 

 

5. 결어

i. 이런 열정들은 이 시대의 전유물인 듯하다.

지식인다운 지식인들의 면모는 찾아볼 수가 없으며, 언론은 직접 자신들의 중립성을 훼손하고 있다. 이 시대의 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들과 단절함으로써 자신들을 사회의 특권계급으로 착각한 채 살아간다. 앙시앵레짐 하에서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던 현상이 오늘날의 부르주아들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이러한 부르주아를 모욕하고 조롱한다.

노블리스오블리제 따위는 이미 그 의미자체가 무색해진지 오래다.

 

ii. 언론과 지식인. 사실에 대한 진위를 가려내야한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것이 비록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 혹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칼을 겨누게 되는 행위라 하더라도 말이다.

 

앞서야 할 것은 감성이 아닌 이성이다.

 

지금처럼 정지된 그들의 사고로 우리가 미래에 남겨줄 수 있는것은 다름아닌 당혹감이다. 그리고 의구심이다. 그리고 방황감이다. 가슴한편에 자리잡은 잘 포장된 에고이즘 따위로 그들을 따르고 추앙할 사람들은, 이미 정체성을 상실하여 누군가. 그저 누군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을만한 누군가. 무슨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논리적이지 못하더라도 그저 나의 말을 대신해줄 수 있는 누군가만을 찾고있는 감성조차 없는 대중들뿐이다.

 

iii. 대중. 사실에 대한 진위를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역시 다른곳으로 눈을 돌려보자. 흑백논리로부터 벗어나자.

지식인들과 언론들의 각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의 태도이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고, 여과하고, 아무도 가본 적 없는 황량한 영역에서 재분석하여 접근 할 수 있어야한다.

그들을 규탄하기 전에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그들을 따르고 존경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왜? 라는 물음표를 던져보자.

 

그 후에 결정하더라도 결코 늦지 않을것이다.